대서양을 건너 20년 동안 책과 함께 오고 간 편지
“저는 가난한 작가 지망생입니다. 꼭 보고 싶은 책이 있는데 권당 5달러가 넘지 않으면 보내주시겠어요?”
1949년 가을, 뉴욕에 사는 무명작가 헬렌 한프는 절판된 책을 다룬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런던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있는 마크스 서점에 편지를 띄웠다.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서...
그로부터 한 달여 뒤 두 권의 책이 대서양을 건너 헬렌에 전해졌다.
“‘윌리엄 해즐릿 산문집’과 ‘스티븐슨의 젊은이를 위하여’를 보내드립니다. 기뻐하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책도 구해 드리겠습니다.”
마크스 서점에서 일하는 프랭크 도엘이었다.
헌책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 보관된 책들.
한눈에도 정성껏 구해 보내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헬렌은 답장을 썼다.
“전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겨보았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이들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
그때 영국이 전쟁 직후 식량난을 겪는다는 소식을 들은 헬렌은 가난한 살림을 쪼개 햄과 통조림 등을 사 보냈다.
그 선물은 프랭크를 비롯한 서점 직원들 가족의 식탁에 올랐다.
손님과 서점 직원으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 두 사람은 어느덧 안부를 묻고 책에 대한 마음을 나누며 고단한 생활을 다독여주는 친구가 되었다.
“친애하는 헬렌 양. 지난번 요청한 책 세 권이 당신에게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구했는지는 묻지 마세요. 그냥 우리 서점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줘요.”
프랭크는 2년여에 걸쳐 리 헌트 수필집을 구해주고 때론 헬렌의 형편을 생각해서 책값을 받지 않았다.
덕분에 헬렌은 마음의 양식을 쌓고 방송대본이나 어린이 책을 쓰며 작가의 꿈을 놓지 않았다.
편지는 프랭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간 계속됐다.
얼굴 한번 본적이 없는 두 사람이 대서양을 넘나들며 따뜻한 우정을 나눈 건 오로지 책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 소중한 인연은 실패한 작가라고 실망하던 헬렌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프랭크와의 편지를 엮어 만든 ‘채링크로스 84번지’가 널리 이름을 알린 것이다.
실제 편지의 주인공이었던 헬렌은 희곡작가로 시작하여 방송 대본, 잡지 기사, 백과사전 항목 등 닥치는 대로 글을 썼지만 단 한 편의 희곡도 무대에 올리지 못한 별 볼 일 없는 작가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편지들 덕분에 널리 알려졌고, 그 내용도 영화 ‘채링크로스 84’, ‘유브 갓 메일’, ‘노팅힐’ 등의 모태가 될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이는 아마도 허구의 글을 압도하는 매력이 이 편지들에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편지를 읽는 것은 소설을 읽는 것과는 다른 감동을 준다.
요즘같이 인터넷이 발달한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현실세계에 살짝 발을 담고 비현실을 향하는 소설보다는 실제의 뭉클한 숨결이 느껴지는 편지에 의해 마음이 더 따스해지는 것 같다.
이제는 사라지고 기념 동판만 남은 마크스 서점.
지금도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것은 어딘가에서 또 다른 헬렌과 프랭크가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어갈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 아닐까.
진실로 책을 사랑하고, 책을 통해 삶을 가꾸어가던 사람들.
셰익스피어를 ‘다정한 윌리엄’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이 애서가들에게 뉴욕과 런던의 거리는 세 블록 아래보다 가까웠다.
죽고 난 뒤에도 이어지는 이들의 편지는 사랑과 존경으로 고요하고 거룩하게 남아 있다.
e-mail로 가볍게 마음을 날려보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쉽게 쓰고, 쉽게 지우고, 쉽게 버리는 마음들이 이미 우리를 물들여 버린 것은 아닐까?
편지지에 펜으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마음을 실어 보내고, 매일 우체통을 열어보며 답장을 기다리던 시절의 애틋함이 새삼 그리워진다.
Mary Hamilton, Joan Ba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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