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와 16강전에서 역전 골든골을 넣는 안정환 선수
안정환 축구인생, 불행과 행운의 공존이었다
안정환 선수는 얼마 전 은퇴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운이 좋은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축구인생을 돌아보면 불행한 게 너무 많았다.
어릴 때 가정환경부터 그랬다.
프로선수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가 주인공이 된 2002년 월드컵 전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안정환 본인도 ‘우여곡절만 많았지 발자취는 남긴 게 없다.’고 말한다.
정말 안정환만큼 사연이 많은 축구스타는 드물다.
본인도 알고 주위 사람들도 안다.
그런데 그가 왜 은퇴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운이 좋은 선수라고 했을까.
행운과 불행.
얼핏 보기에는 다른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같은 건지도 모른다.
마냥 행복하다가도 뭔가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불운을 예감한다.
반대로 불운 속에서도 뭔가가 조금이라도 풀리면 곧 행복을 꿈꾼다.
행복 속에서 죽음을 상상하고 죽음 속에서 희망을 찾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그게 계속 반복되면 행운과 불행이 같다는 걸 깨닫는다.
안정환도 그랬다.
안정환은 어릴 때 불우했다.
홀어머니가 먹고살기 위해 일을 나갔고 외할머니 손에서 컸다.
안정환은 아직도 생부에 대해 입을 다문다.
2002년 월드컵 직후 그의 과거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아버지가 교사다.’, ‘아버지가 김 씨다.’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안정환은 과거 가정사가 공개되는 걸 싫어했고 입을 다물었다.
다만 지금 확실한 것은 안정환이 호적상 외삼촌 아들로 돼 있다는 사실이다.
안정환은 남서울중에서 공을 찼다.
워낙 볼을 예쁘게 잘 차서 고교 감독의 스카우트 표적이 됐다.
고교 진학과 관련된 복잡한 갈등 속에 서울공고에 진학했고, 이후 아주대로 갔다.
두 곳 모두 안정환 측이 가고 싶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아니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안정환은 ‘내가 어린 시절 편안하게 공을 찼다면 지금처럼 내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어려움이 나에게 강한 마음을 심어줬다.’고 고백했다.
안정환은 프로에 입문해서 곧바로 빅스타가 됐다.
신인시절인 1998년, 이동국, 고종수와 트로이카를 구축하며 프로축구 인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프로축구 MVP가 됐다.
당시는 2002년 월드컵을 앞둔 시점이어서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 좋은 선수들을 외국으로 보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그때 안정환의 외국 진출이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명분은 좋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당시 부산 대우를 인수한 현대산업개발은 슈퍼스타 안정환을 보내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여론의 힘으로 외국 진출을 이뤘지만, 안정환으로서는 마음고생을 무척 많이 한 시기였다.
그렇게 어렵게 간 곳이 이탈리아 페루자였다.
당시 이탈리아 리그는 스페인, 잉글랜드와 함께 세계 빅 리그 중 하나로 꼽혔다.
안정환도 그곳에서 반드시 성공해 더 큰 무대로 가겠다는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안정환이 페루자에서 2년 동안 뛴 경기는 고작 30경기에 골도 5골뿐이었다.
페루자에서 극심한 외로움을 겪은 안정환은 2002년 월드컵에서 인생역전을 노렸다.
히딩크 감독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 속에 안정환은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조별리그 미국전 동점 골, 16강 이탈리아전 역전 골든골이 그에게서 나왔다.
특히 이탈리아전 골은 행운이었다.
어쨌든 행운의 골은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것 같았다.
당시 안정환 매니저 노릇을 한 김상훈 씨는 ‘그 골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모두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희망은 허무하게 사라졌다.
월드컵 이후 안정환은 페루자에서 쫓겨났다.
이탈리아전 골든골 때문에 성난 이탈리아 팬들이 안정환 차를 부수는 등 안정환과 페루자는 동거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블랙번이 영입의사를 전달해왔다.
계약서에 서명도 했고 잉글랜드에서 살 집도 마련했다.
그렇게 다 이뤄진 것 같았던 블랙번 이적.
그러나 영국 노동청으로부터 취업허가서를 받지 못했고 결국 이마저 무산됐다.
이후에도 안정환은 팀을 찾지 못했다.
월드컵 2골을 넣은 스타가 둥지가 없는 무적 신세가 됐다.
안정환은 당시 지인에게 ‘한창나이에 은퇴해야 하는가.’라고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고민할 때 그에게 예상도 못 한 행운이 찾아왔다.
일본에 있는 PM이라는 회사가 안정환이 일본 시미즈에서 뛸 수 있도록 우리 돈으로 30억 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해 페루자, 부산 등이 서로 얽키고설킨 금전관계를 정리해준 것이다.
지금도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PM은 안정환이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은인.’이라고 말한다.
안정환은 일본에서 뛰다가 한국으로 왔고, 다시 한국에서 유럽으로 나갔다.
일본, 한국에 남으면 돈은 많이 벌 수 있었겠지만 큰 꿈은 꾸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로 갔고 독일월드컵 직전에는 독일 뒤스부르크로 옮겼다.
모두 월드컵 출전과 빅리그 진출이라는 꿈을 위한 선택.
월드컵 출전은 2006년, 2010년 두 번 더 이뤘다.
하지만 스페인, 잉글랜드 등 빅리그 진출의 소망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결국은 포기해야 했다.
어려운 어린 시절, 받지 못한 부모 사랑, 마음같이 되지 않은 진학, 말 못할 마음고생 끝에 이룬 이탈리아 진출, 그리고 월드컵 이후 당한 날벼락 같은 퇴단과 다 된 것같이 보이던 빅리그 진출 무산, 그리고 이어진 안타까운 무적선수 신세.
이 모든 게 당시는 불행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은인들이 나타났고 또 다른 해결책이 나왔다.
그렇게 안정환은 또다시 출구를 찾았고 또다시 뛰었다.
불행 속에서 매 순간 행운을 잡았고 그게 행복이 됐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다.
많은 사람이 이걸 알고 행운을 좇는다.
그러나 세 잎 클로버의 꽃말도 행복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리고 정신없이 행운만 좇다 보면 행복을 놓치기 일쑤다.
앞만 보고 달려오다가 한참 후에야 비로소 자신에게도 많은 행복이 있었다는 걸 깨닫곤 한다.
안정환도 얼마 안 되는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자신 주위에 자라난 수많은 세 잎 클로버를 뒤늦게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글 김세훈 기자
나 가거든, 조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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