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두바이와 우리 순이

부에노(조운엽) 2020. 9. 5. 11:36

 

우리 순이

두바이와 우리 순이

음악 : 순이 생각 https://www.youtube.com/watch?v=aYcwblC-gB8

바레인에서 원유를 싣고 나오는 길에 아랍 에미리트의 두바이항에서 선용품과 주부식을 조금 실으려고 외항에 잠시 정박했다.

비행기도 마찬가지지만, 배가 남의 나라 항구에 들어가면 항세를 내야 한다.

그래서 하룻밤을 넘기지 않고 후다닥 싣고 떠나야 한다.

두바이는 중동에서 물가가 비교적 싸고 없는 것 빼곤 다 있다.

바레인 출항하기 전에 미리 연락한 대로 한국 선식이 통선 타고 왔다.

배 타다 눈을 다친 전직 기관사가 유리알 눈을 끼고 선식 직원이라며 배에 올라왔다.

말로만 듣던 해적 후크 선장의 검은 안대를 생각하다가 그렇게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 또래 한국인을 이국의 항구에서 보니 기분이 묘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딛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동정 아닌 인간적인 존경심이 생긴다.

중고생 때 루이제 린저와 전혜린에 미쳐있던 애늙은이 남희 말로는 친했던 중학교 친구가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학교를 그만두고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공장에 다니는 눈치였다고 한다.

중3 올라가고 어쩌다 학교 교문 옆 후미진 곳에서 등하교하는 친구들을 아련하게 쳐다보는 그녀에게 목이 메어 차마 다가가진 못했단다.

심리적으로 피곤한 사춘기 여학생과 정작 먹고사니즘에 고단한 공순이란 이름의 남희 친구 순이...

고작 중3 방학 때 신문 한 달 돌렸던 내가 동시대를 살았던 공장 순이의 아픔을 알겠는가?

도시락 반찬으로 늘 김치만 싸가고, 퇴근길에 식당에서 고기 굽는 냄새에 군침만 삼키며 집에 가면 역시 찬밥에 묵은 김치밖에 없었던 어린 순이들...

월급날이나 되어야 돼지고기 떠다가 목구멍에 낀 원단 먼지를 내릴 수 있었다.

그나마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끼니를 거르는 동료보다는 나았다.

식구들 먹여 살리기에는 그녀들이 너무 어렸고 현실은 너무 팍팍했다.

학교에서 공부하며 친구들과 한창 수다 떨며 놀 나이에 공장에서 온종일 재봉틀을 돌리고 실밥 따던 우리 순이들...

화장실 가는 것도 눈치 보여 물도 마시지 않고 하루 열 시간 이상 버티던 그녀들은 바로 우리의 친구이자 누나, 동생 아니면 누군가의 귀한 딸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수출공단이 생기면서 이 땅의 많은 소녀가 공단에 들어갔다.

공단에서는 그나마 야간학교라도 다닐 수 있었다.

'엄마를 부탁해'를 쓴 작가 신경숙 씨도 낮에는 구로공단에서 일하고 밤에는 산업체 특별학급에서 공부하며 꿈을 키우던 공장 직원이었다.

오늘도 숙이는 팔이 떨어질 것 같았다.

시골에서 돈 벌러 올라온 순이 친구 숙이는 버스 안내양이다.

사람들이 차장이라 부르고 또래들은 차순이라고 비웃었다.

운전기사가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

차가 한쪽으로 기울며 사람들이 안쪽으로 쏠려 들어갔다.

버스 손잡이를 잡고 겨우 매달려 있던 숙이는 온몸으로 승객들을 안으로 밀면서 얼른 차 문을 닫았다.

사방에서 비명과 함께 욕이 튀어나왔다.

"에이~ 시발!, 여기가 무슨 콩나물시루냐?"

그러거나 말거나 버스는 다음 정거장에서 사람들을 내리고 또 태우고 간다.

5.16 쿠데타가 나고 60년대에 일은 없고 노는 사람은 넘쳐났다.

여자는 더 남아돌았다.

돈들이 다 어디 갔는지 엄마 아빠 주머니는 늘 비어있고 먹을 건 궁했다.

많은 시골 소녀가 군입 하나 덜려고 보따리를 싸서 무작정 상경했다.

하지만 배우지 못한 시골 소녀들을 기다리는 일자리는 별로 없었다.

버스 안내양은 학력은 물론 나이 제한도 없었다.

식모보다 나았고 공순이보다 쉬웠다.

사람대접 받기 힘든 시골 아가씨들에게 여차장은 쉽게 취직할 수 있는 훌륭한 직장이었다.

비록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차장이지만 그녀들도 꿈 많은 사춘기 소녀였다.

교복 입고 고학생이라는 학생이 물건을 팔려고 타면 동병상련이라고 차비를 받지 않았다.

어떤 남학생은 풋풋하고 예쁘장했던 숙이가 탄 버스를 기다렸다가 버스 회수권과 함께 편지를 주고 달아나기도 했다.

불과 십 대 어린 나이에 대부분 사람이 무시하는 버스 차장, 공순이 식순이가 되어있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 얼마나 쪽 팔릴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도 정말 개 같은 일이다.

그렇게 잠 못 자며 힘들게 일하는 대신 억척같이 돈을 모았다.

계 타면 부모님께 송아지라도 사라고 보냈다.

안 먹고 안 입고 모은 돈으로 동생들 학비도 댔다.

웃음 팔며 쉽게 돈 벌 수 있는 길도 있었지만, 우리의 순이 언니들은 우리와 동시대에 당당하게 살며 우리나라를 굴러가게 했다.

중동이나 일부 국가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못 사는 나라에서 가정부를 수입해서 쓴다.

그 일을 가정부 대주는 에이전시가 한다.

가정부를 구하고 싶으면 에이전트에 수수료를 주고 신청하면 된다.

캄보디아 사람은 빚을 내든 어쨌든 에이전시에 400불을 주면 월급을 더 받을 수 있는 타이로 가서 일할 수 있다.

그러나 중동에서는 오래전부터 에이전시에서 서류 작성비와 비행기 삯을 포함해 일이천 불을 따로 받고 인력을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수입해 조달했다.

가정부에게 매달 주는 월급 이삼백 불은 별개다.

그런데 이 소녀들이 정부 공식기구를 통해 들어온 것이 아니고, 그 소녀를 고용한 국제 조직 패밀리가 모든 관리를 하기에 가정부들의 여권 또한 그들이 갖고 있다.

이들이 월급을 잘라먹어도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이 어디에도 없다.

저임금은 고사하고 부당한 혹사와 학대가 일상이다.

가정부들이 집주인 식구의 성추행, 강간과 혹사로 자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소녀들이 비인간적인 대우에 견디다 못해 도망치면, 그들은 여권 없이 불법체류자가 되어 매춘과 마약 판매 같은 불법적인 일을 할 수밖에 없다.

 

 

하늘에서 본 두바이 스카이 라인

아랍 에미리트는 영국의 보호령에서 독립할 때 바레인과 카타르를 제외한 아부다비, 두바이 등 7개의 토후국이 연합해서 건국한 나라이다.

유럽 연합이나 미합중국과 비슷한 성격의 국가이다.

대통령은 7개 토후국 중 가장 힘이 센 아부다비가, 부통령 겸 총리는 두 번째로 서열이 높은 두바이에서, 나머지 다섯 에미리트들은 각료직을 맡아 세습하는 방식이고, 각 토후는 자치 관리한다.

이슬람 율법으로 통치되는 나라라 술을 마시는 것은 기본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21세 이상 비이슬람교도는 마실 수 있다.

다만 주류 판매가 허가된 식당과 주류 판매점에서만 구매가 가능하며 구매 라이선스가 필요하다.

또한 건물 외부에서 술을 마시거나, 술에 취해 돌아다니면 경찰이 잡아간다.

중동의 다른 이슬람 국가들처럼 금요일과 토요일이 휴일이다.

이 나라에서 일요일은 한국의 월요일처럼 일한다.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를 구성하는 7개의 토후국 중 하나이자 최대도시이다.

두바이 정부에서 오일머니로 세계의 투자자와 여행객들을 모으기 위해 모래사막과 바다 위에 세계지도, 야자잎 모양의 인공 섬을 만들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도 짓는 등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의 갑부들이 모이기 시작해 저 인공섬들에 집을 짓고 있다.

서구와 동북아시아의 글로벌 기업들이 가장 주목하는 시장 중 하나가 중동인데 두바이가 중동 비지니스의 베이스캠프로 적당하기 때문이다.

지금 두바이에서는 한강의 기적보다도 더 놀라운 기적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디든 중동 국가에서 방심하면 안 된다.

아랍 에미리트가 다른 이슬람권 국가에 비해 자유롭고 개방적일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엄연히 이슬람 종교법인 샤리아를 시행하는 나라이다.

두바이에서 이성 간 스킨십과 키스도 범죄 행위이다.

얼마 전 자국인이 차 안에서 키스했다고 징역형을 내린 적도 있고 외국인이라고 봐주는 것 없다.

관광이나 항공 환승 등은 아부다비, 도하와 더불어 중동 최강급이지만, 거주지로서 두바이는 국민을 통제하기로 악명 높은 싱가포르 못지않게 상당히 빡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