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차이나타운과 화교

부에노(조운엽) 2021. 2. 6. 05:46

 

 

Chinatown of Yokohama

차이나타운과 화교

요코하마에는 동양 최대의 차이나타운이 있다.

온 동네가 빨갛게 물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화권 문화에서 빨간색은 행운과 부를 상징하여 화교가 하는 가게는 빨간색 치장이 많다.

인천 차이나타운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규모가 크다.

일본에는 오래전부터 전쟁을 피해 건너온 중국인이 있었고 개항 후에 요코하마, 고베와 나가사키 등지에 중국인들이 들어왔다.

한국에 짜장면이 있듯이 나가사키에는 짬뽕이 있다.

일본이 개항하기 전, 에도 시대 때 유일한 개항장이었던 나가사키에서 일본과 중국의 식문화가 합쳐져 만든 맛있고 값싼 서민 음식이다.

화교는 중화민국 또는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가지고 다른 나라에 정착해서 사는 사람을 말한다.

중국을 떠난 화교들은 외국에서 돈을 벌어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현지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교류하고 현지어를 아예 배우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자기 나라 문화에 대한 집착이 강하여 거주지에서 중국어만 쓰는 차이나타운을 만들어 생활한다.

이런 화교들의 배타적인 태도는 현지인들과의 갈등과 대립을 부추겼다.

한일과 동남아 등에서는 화교 가게를 부수고 화교들을 패고 죽이는 폭동이 여러 번 일어났다.

이런 과정을 거쳐 화교들은 커뮤니티를 유지하되 현지인들과 섞여 사는 쪽을 택했고, 돈을 벌되 정치권 등 민감한 부분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화교 인구는 오천만 명이 넘는데 반 이상이 동남아에 거주하며 현지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

일본의 차이나타운은 20세기 초에 타이완에서 온 중국인이 집단 거주하며 자연적으로 생겼다.

재일교포는 나름대로 차별 받지만 성공한 사람도 있고 일본인과 잘 지내는 사람이 많다.

반면 화교들은 반중 감정이 심해서 차별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귀화하지 않으면 정치권이나 공무원 등 주류사회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근래에 일본에서 화교는 신화교와 기존의 구화교로 나뉜다.

신화교는 중일 수교 후 들어온 중화인민공화국 사람들이고 구화교는 오래전에 들어온 중화민국 사람들이다.

신화교 중엔 일본계도 많이 있다.

일본 패망 후 중국에서 못 나오고 중국인과 섞여 살다가 중일 수교 후에 일본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이들 역시 차별받는다고 한다.

구화교와 신화교는 민단과 조총련이 대립하듯이 일본 내에 두 개의 중국계 커뮤니티가 있다.

유명한 재일 화교로는 왕정치, 일본명 오 사다하루가 있다.

도쿄에서 중국 음식점을 하는 중화민국 국적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돈을 벌어 본토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국공내전으로 중국이 공산화되자 일본에 눌러앉았다고 한다.

외다리 타법으로 일본 프로야구를 지배한 타자 오는 귀화하지 않았고, 자신은 일본인 피가 섞인 중국인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일본 야구에서 홈런 하면 떠오르는 전설적인 거포이다.

행크 아론의 메이저리그 최다 홈런 기록을 넘어서 일본에서는 왕을 '세계의 홈런왕'이라 부르지만, 미국 쪽에서는 별로 인정하지 않는 편이다.

감독, 구단 관리자로도 성공한 아주 대단한 야구인이다.

일본 프로 야구 불멸의 삼천 안타 주인공 재일교포 장훈 선수와는 동갑에 프로 입단 동기로 집에 놀러 와 먹고, 자고 가기도 하는 절친이라고 한다.

재일 중국인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과 일본이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면서 현재는 일본 내 최대 외국인 집단이 되었다.

지금은 일본 화교들이 재일교포 수를 앞질렀다.

기존 화교와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재일 중국인들은 따로 노는 편이다.

우리나라에서 한국 화교와 대륙 출신이 소 닭 보듯 하는 것과 비슷하다.

미국에 중국인이 이민 오게 된 것은 19세기 때라고 한다.

노예해방 후 미국 개척 시대에 철도와 광산에 노동자로 간 중국인들이 차이나타운을 만들어 점점 커졌고 쿨리란 말이 이때 나왔다.

북미 화교들은 태평양 연안에 많고 캐나다 밴쿠버, 빅토리아에 많이 산다.

샌프란시스코, 뉴욕, 토론토 등에 큰 차이나타운이 있다.

유럽 대도시에도 중국인 식당이나 슈퍼가 가끔 보인다.

배 타고 유럽이나 중남미에서 상륙하면 우리를 보고 '치노'냐고 묻는 적이 많았다.

동양 사람은 중국아들밖에 없는 줄 아는 모양이지...

동남아시아에는 명나라 때 정화 함대가 7차례에 걸쳐 서쪽으로 원정을 하면서 화교들이 생기게 됐다.

그 후 중국인들이 비단과 자기를 팔고 향료와 건해삼을 구하기 위해 많이 왔단다.

그리고 영국의 노예 무역 금지로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고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개항하면서 많은 중국인이 먹고살기 위해 외국으로 나갔다.

말레이시아가 영국 식민지가 되면서 주석 광산과 고무 농장에 인력이 많이 필요하여 중국인 노동자가 몰려왔다.

싱가포르에는 화교가 너무 많아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따로 나가 살라고 쫓아냈다고 한다.

싱가포르 주지사 리콴유는 내쫓지만 말라고 울며불며 사정했으나 안 통해 중계무역으로 성장했다.

동남아에서는 화교가 많은 나라일수록 국민소득이 높다.

동남아 최빈국인 캄보디아와 미얀마는 중국계, 인도계를 추방, 학살한 후 경제가 그대로 주저앉고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화교가 동남아 경제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

세계에서 화교가 실패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가 우리나라이다.

우리는 뙤놈, 짱깨 또는 짱꼴라라고 부르며 화교를 차별하고 무시한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

짱깨는 화교 비단 상점의 지배인을 말하는 장궤에서 나왔고, 짱꼴라는 일본이 대만을 식민통치할 때 중국인을 무시하며 부르는 장코로에서 나왔다고 한다.

전 세계에 오천만 명 이상이 두루 퍼져 막강한 경제적 영향력이 있고, 어느 한 국가에 속하지 않은 세계적 규모의 화교 세력이 우리나라에서는 쪽을 못 썼다.

조선에 온 대다수가 산둥성 출신인 그들은 당시 먹고살기 위해 건너왔다.

억척스럽고 손재주가 좋은 이들은 중국집과 주단포목점 그리고 채소 재배를 잘해 근대 초기 조선 경제에 큰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조선은 씨앗을 구할 수 없어 채소를 일본에서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국내 거주 외국인은 대부분 화교였다.

화교 이외의 외국인은 서양 선교사 정도였다.

그러나 두어 차례 화교 배척사건으로 이백 명이 넘게 숨지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우리는 일본의 재일동포 법적 지위 문제로 많은 요구를 했으나, 우리 스스로 화교의 법적 지위를 해결해주려고 노력한 적은 거의 없다.

지금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에 비하면, 화교의 법적 지위는 부끄러울 정도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상업용 토지 50평 이상을 소유할 수 없다는 일제강점기의 외국인토지법을 그대로 적용해 재산상의 불이익을 주었고 거주 자격과 영주권, 참정권 문제는 형편없었다.

50평으로는 큰 중화요리점을 할 수가 없어 한국인 명의로 토지를 샀다가 떼인 화교가 수두룩했다.

화교는 삼 년마다 거주 허가의 연장을 받도록 했고 출국할 때에는 한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재입국도 허가를 받아야 들어올 수 있었다.

화교 가운데 거주 허가와 재입국 허가를 받기 위해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화교는 한국인보다 세금은 더 내는데 복지혜택은 거의 받지 못했다.

반면 재일 한국인은 다소 차별은 있으나 다른 외국인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 편이다.

그래서 한국 화교는 한국인, 대만인, 중국인도 아닌 나라 없는 난민이나 마찬가지였다.

21세기 들어 조선족을 중심으로 중국의 노동력이 많이 들어와 대림동에만 삼만 명 넘게 정착해 있다.

이를 신화교라 부른다.

이제 우리는 다민족 국가로 다양화된 세계에 살면서 이들과 잘 어울려 살아야 할 것이다.

조선에 온 화교가 돈을 벌면 고향에 소문이 퍼졌다.

먼저 이주한 화교는 고향의 식구, 친지를 조선으로 불러 현지 정착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런 점은 중남미 화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와서 정착한 화교가 친지들을 불러와 가게를 얻어주고 자리 잡을 때까지 운영자금을 빌려주어 벌어서 갚게 한다.

그리고 그도 또 그렇게 따라 한다.

우리나라 교민 사회가 본받을 점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인 이민자들도 교민끼리 상부상조하는 것이 부러울 정도이다.

일본에 흉년이 들어 쌀 한 톨 나오지 않아도 일억이천 일본인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브라질 교민이나 중남미 일본인 공동체는 잘 뭉쳐있다.

어찌 우리나라 사람은 외국에서 한국인 만나는 것을 꺼리고 조심하라고 하는가.

한번 짚어봐야 할 문제이다.

산둥성 자장미엔이 한국에서는 짜장면이 되어 국민 음식이 되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짜장면이 처음 나와 대중적인 인기를 끌 게 된 것은 해방 전후였다.

해방 후 한 화교가 사자 표 춘장을 만들어 팔았다.

이전에는 화교 가정집에서 된장 만들듯이 춘장을 담갔지만, 물엿을 첨가해 단맛을 내는 사자 표 춘장이 나오면서 지금 우리가 먹는 대중적인 짜장면이 됐다.

1970년대 중화요리 식당은 최고의 외식으로 서민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어렸을 때 입학, 졸업이나 귀빠진 날 엄마 아빠가 짜장면이나 탕수육을 사주시면 진고개식당에서 불고기 얻어먹은 만큼이나 행복해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정부 당국의 중화요리점에 대한 각종 규제와 과도한 세금으로 화교가 한국에 정이 떨어져 외국으로 많이 떠나 문을 닫는 중국집이 늘었다.

한국 화교는 미국, 대만, 중국으로 재이주했다.

외국으로 이주한 화교는 거기에서 한국식 중화요리로 성공한 사람이 많이 생겼다.

인천에서 중국집을 하다가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 간 한 화교는 중화요리점 'Feng Mei'를 개업해 큰 성공을 했다고 한다.

대만에도 한국화교가 운영하는 중화요리점이 적지 않고, 중국에도 진출해 한국식 짜장면을 팔고 있단다.

심지어 아프리카에도 한국 화교의 중화요리 식당이 있다고 한다.

유대인 못지않은 대단한 상술을 가진 화교가 한국식 중화요리를 세계화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