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콜럼버스보다 앞서 대항해를 한 정화​

부에노(조운엽) 2021. 2. 6. 05:54

 

콜럼버스보다 앞서 대항해를 한 정화

대항해시대를 이야기하면 우리는 콜럼버스를 기억한다.

그러나 중국에는 콜 할아버지보다 구십여 년 앞서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중국에서 동남아를 거쳐 인도, 아프리카까지 대항해를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역사학자들의 관심을 받는 대단한 인물이다.

정화는 국적은 명나라이지만 유라시아의 이슬람교 집안 출신이다.

14세기에 명나라의 영락제는 윈난성을 정복하면서 곤명의 성인 남자를 모두 죽이고, 어린 남자아이는 거세해서 포로로 잡아갔다.

정화는 어린 나이에 명에 끌려와 환관이 되었다가 영락제가 건문제를 쫓아내고 황제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환관의 대빵이 되었다.

당시 다른 나라의 기술로는 꿈도 꿀 수 없는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연안항해로만 아프리카까지 갔다고 한다.

영락제의 하명을 받아 1405년부터 25년 동안 일곱 번이나 서쪽 바다로 대원정을 떠나 20만km를 항해했다.

정화가 이런 원정을 나선 이유는 세계에 명나라의 개국을 알리고 조공을 바치라는 압력을 넣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16개 나라의 사신을 배로 귀국시켰다는 말도 있다.

또, 배를 타고 도망갔다는 등 생사불명인 전 황제 건문제를 잡으려고 나섰다는 설도 있다.

정화는 삼십여 나라를 방문하고 마지막 7차 항해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정화가 첫 항해를 떠난 날을 바다의 날로 정해 기리고 있단다.

정화의 선단이 어디를 어떻게 항해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중국인 상인들이 호주의 해삼을 수입했다고 하니 정화 선단이 오세아니아도 갔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정화의 항해 때 아프리카 기린의 그림이 남아있다.

또 케냐의 한 부족 중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데 조사하니 중국인의 DNA가 있는 것이 확인되어 아프리카까지 간 것은 인정받고 있다.

정화의 원정단은 방문한 지역의 주권과 종교, 문화를 존중하였다.

아주 신사적인 방식이었다는데 대항해시대에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보여준 폭력적인 방법이나 노예무역, 강제 개종 등이 난무했던 것과 비교가 된다.

일례로 정화 함대가 스리랑카에 남긴 비문은 중국어, 타밀어, 페르시아어로 되어 있다.

중국어로는 외교 성과가, 타밀어 비문에는 현지 타밀 힌두교도들을 배려하는 내용이, 페르시아어로는 하나님 덕분에 무사히 항해했다는 것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정화가 대항해 지도자로 발탁된 이유 중 하나가 무슬림 출신이지만, 불교와 유교를 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화 교류 측면에서 정화의 원정이 요즘 중국의 패권주의 외교와 일대일로보다 훨씬 젠틀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화의 대원정 후 명나라는 더 해상 진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중국을 통일한 대부분의 역대 왕조들은 늘 북쪽의 유목 세력들, 서쪽 이슬람의 도발을 막아내기 바빴다.

천하의 당나라도 돌궐, 거란 등 유목 민족들에게 여러 번 당했다.

심지어 티베트 전신인 토번이 강성해 실크로드를 장악했던 당시 수도 장안까지 점령당하고 공물을 바치는 수모의 역사도 있었다.

정화의 원정에 비해서 훨씬 적은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작은 배 세 척으로 신대륙을 발견하고 탐험한 것이 세계사를 크게 바꾸었다.

그가 상세한 기록까지 남긴 것에 비하면 정화의 원정이 남긴 영향과 기록은 미미하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몇십 년 앞섰어도 역사를 바꾼 것이 별로 없어 세계 처음이라도 역사가들이 높이 쳐주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튼 정화의 해양 원정은 오랜 중국 역사에서 특이한 것이다.

인구가 많은 중국은 중원을 다스리고 주변 국가들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명나라 다음의 청나라도 서양과 무역은 하였지만,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청나라 때 들어온 선교사가 중국인들보다 다른 세계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었다.

정화의 원정에 의해 알게 된 세계에 대한 지식이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다.

정화의 대원정은 사실상 중국의 첫 해양 진출이자 마지막 원정이었다.

이 대원정이 없었더라도 중국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콜럼버스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고 인도로 가는 꿈을 꾸었다.

마르코 폴로는 아시아의 지팡구 즉, 일본은 섬나라로 황금이 아주 많은 나라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을 하고 에스파냐 이사벨라 여왕의 지원을 받아 산타 마리아호 등을 이끌고 인도를 향해 서쪽으로 씩씩하게 항해했다.

70여 일을 항해하여 마침내 섬을 발견한다.

콜럼버스는 드디어 인도에 도착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히스파니올라(아이티섬)와 쿠바였다.

그래서 지금도 카리브해의 섬을 서인도제도라고 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부르는 것이다.

다음 해 콜럼버스는 서인도 총독 계급장을 달고 17척의 선단으로 히스파니올라섬을 장악하였다.

인디오 원주민에게 가혹한 세금을 받고 금광 채굴 등 강제노역을 시켰다.

그의 끔찍한 지배로 석삼년 만에 원주민 인디오의 반 이상이 돌아가셨다.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가면 인도로 갈 수 있다고 믿었으나, 그가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하고 죽을 때까지 인도라고 생각한 곳은 아메리카였다.

15세기 말이 되어 포르투갈인은 아프리카 남쪽까지 탐험하였다.

디아스가 이끄는 선단은 아프리카 대륙 남쪽 끝까지 갔다가 심한 폭풍을 만나 되돌아오면서, 그곳을 '폭풍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포르투갈 왕은 아시아로 갈 수 있는 희망이 보인다고 하여 '희망곶'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498년에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한 것은 바스코 다 가마였다.

그는 인도에서 후추를 잔뜩 싣고 리스본에 돌아와 비싸게 팔아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것이었던 것이었다.

이후 중국은 해양 강국에서 멀어지고 중국 본토에 한정된 국가로 살았다.

이는 훗날 중국이 서구 열강의 침략에 어찌하지 못해 굴욕을 당한 결정적 이유였다.

만약 정화의 세계 최고 조선술과 해군력을 유지하고 발전시켰다면, 스페인 무적함대나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처럼 역사는 새롭게 쓰였을 것이다.

이러한 정화 원정대의 중단과 해양 강국에서 내리막길로 간 역사에서 정화 대신 콜럼버스를 더 기억하는 것이다.

바다를 지배한 나라가 세계를 호령하는 시대가 언제까지 이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