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고 님과 겸둥이 소영 양에게
표지 모델로 나온 겸둥이 소영 양
명확한 꿈을 갖고 모든 감각을 스페인어 배우는데 집중!
카페에 용감한 젊은이 살리고 님과 겸둥이 소영 양의 남미 어학연수하는 글과 사진이 계속 올라와 내 옛날 생각이 나서 돌이켜봅니다.
나는 사춘기 때 지독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세상 사는 맛이 안 났다.
나름 유머가 있어 주변 사람들을 제법 웃겼지만 얼굴이 잘 빨개졌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다.
까라두라가 얼굴이 잘 빨개진다니... ㅎ
게다가 공부를 한다고 책상에 앉아는 있는데 성적은 자꾸 떨어졌다.
다른 친구들은 노냐 말이지...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 줄줄이 낙방하고 쪽 팔리게도 어린 나이에 벌써 재수를 했다.
공부 잘 하고 좋은 학교 다니는 식구들이 즐비한 집안에서 난 고딩 때 서울 대학 갈 거라고 큰 소리는 쳤지만 서울 상대나 외대도 못 갈 성적이었다.
서울에서 상~당히 떨어졌거나 외~진 곳에 있는 대학 말이다.
그래서 세상을 포기하려고 고3 초 어느 날, 등록금을 받고 학교로 안 가고 청량리 역으로 갔다.
설악산 깊은 곳에 가서 소주 먹고 칵 뒈질 거라고 작정하고, 날 더 이상 찾지 말라는 유서같은 편지를 부모님과 친구에게 두 통 써서 남영동에서 우체통에 넣고 말이다.
근데 강원도 가는 완행 열차는 밤에만 있었다.
그래서 기다리느니 무작정 부산으로 튀었다.
거기서 난생 처음 큰 배를 보았다.
기냥 대책없이 여기서 뒈지느니 배 한 번 타 볼거라고 일하는 분에게 배 좀 탈 수 없냐고 물었다.
내 몰골을 보고 그 분이 고등학교나 졸업하고 배를 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왕이면 공부를 더 해서 대우 받는 사관으로 타라고 하셨다.
우여곡절 끝에 외할머님이 혼자 사시던 완도에서 부모님 손에 이끌려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배를 타는 것을 알아봤다.
상담하시던 고2 때 담임 선생님은 안경 쓰고는 해양대학을 못 들어간다고 하셨다.
그래도 때가 되어 시험을 봤지만 네이비 ROTC에 준하는 신검에서 콘텍트 렌즈 낀 것이 걸렸다.
나중에 해대를 나와 1등 기관사를 하던 고딩 동기를 부산에서 우연히 만났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그 때 학교에서 나를 찾으려고 많이 수소문했단다.
오천 여명의 수험생 중에서 성적이 8등인가 해서 아까워서 조교요원으로 특별 입학시키려고 했다나.
그럼 집으로 연락하지 그런 소식을 전혀 몰랐는데...
암튼 그때 조교에게 안경 끼고 배를 탈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그랬더니 통신사 면허를 따면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통신과가 있는 학교에 입학해서 졸라 욜심히 공부했다.
통신사 면허는 국제 면허라서 쉽지가 않다고 했다.
내 모든 생각과 감각은 오로지 면허 따는 데만 집중했다.
나이트 클럽도 친구 따라 한 번 가보니 너무나 황홀해서 빠지면 안 되겠다 싶어서 단호히 끊었다.
졸업할 때 보는 의무 면허시험에 경인 지역에서 단 한 명만 전파통신 기사 자격증을 땄다.
난 또 재수해서 5년 만에 겨우 통신사 면허를 땄다.
그리고... 영광스럽게 12년 동안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며 외항선 통신장으로 근무했다.
파나마와 라이베리아 1급 통신사 면허까지 가지고 말이다.
그때 나는 대한민국 월급쟁이 중 1프로 안에 드는 급료를 20대의 나이에 받으며 자부심을 갖고 배를 탔다.
그런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카페 회원 Zapata 님은 미국 언리미트, 무제한 선장 자격증을 가지신 대단한 분이시다.
외국인으로는 영국 제독 출신 다음으로 두 번째로 따셨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서 육상 생활을 십여 년 하다가 다 정리하고 남미로 떠났다.
지금 잠시 태국에 머물고 있지만 내 꿈은 명확하다.
스페인어로 글을 쓰는 것과 라틴에 로망을 갖고 남미로 오는 젊은이들에게 작으나마 도움을 주는 일이다.
살리고 님과 소영 양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명확한 꿈을 가지라는 것이다.
스페인어가 되면 할 일이 많이 생긴다.
하다 못해 강사나 번역, 통역 말고도 국제적으로 움직일 여지가 많아질 것이다.
그런 꿈을 갖고 모든 감각을 스페인어 배우는데 집중하고 나머지 가지를 치면 귀국할 때 웃으면서 본인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을 거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