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게 사는 방법 중 하나
바둑 여신 디아나 프로 초단의 다면기
고수가 되는 방법
네비게이션이 없던 오래전 일이다.
친구와 함께 문상하러 충남 아산의 한 상가를 찾아 떠났다.
초행길인 데다 장례식장도 아닌 시골 민가를 찾아가는 게 만만치 않았다.
운전대를 잡은 친구는 근처에 와서 몇 번이고 같은 곳을 헤맸다.
'분명 이 근처인데…'라는 말을 반복하는 친구에게 나는 참다 못해 '그러지 말고 어디 들어가서 물어보자. 저기 구멍가게에 사람이 있네!'라고 말했다.
하지만 친구는 '다 왔어. 좀 기다려 봐.'라며 짜증을 냈다.
결국 20여 분을 더 헤매고 나서야 구멍가게 주인에게 물어 상가를 찾을 수 있었다.
'지역 전문가'인 구멍가게 주인에 물어봤으면 애초에 쉽게 해결됐을 것을 한참이나 돌아 어렵게 고생한 셈이었다.
그 친구야 잘하려 한 것이겠지만 나에게는 쉬운 방법을 두고 미련하게 고생한 경우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는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 잘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몇년 전 어느 광고에 나온 말이다.
바둑을 예로 들면 '7급 두는 사람이 죽는 점과 사는 점을 두고 밤을 새워가며 온갖 경우의 수를 놓고 침을 튀며 논쟁을 해도 과연 올바른 수를 짚어낼 수 있을까? 열심히 최선을 다한 건 분명하지만 바둑 유단자가 봤다면 몇초 만에 해결될 일에 불과하다.
결국 하수 여러 명이 고수 한 명을 못 당한다는 얘기다.
무협 영화나 무협지를 보면 '무림의 강호', '고수' 등의 말이 자주 언급된다.
내용이야 모두 다르지만 한 가지 비슷한 흐름이 있다.
부모나 연인의 복수를 위해 무림의 최고 고수를 찾아가서 무공을 전수받아 스승을 뛰어넘는 최고의 무림 고수가 되어 복수를 한다는 얼개다.
독학으로 무공을 쌓을 수도 있겠지만 혼자 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혼자의 노력은 미련한 도전이요 계획이기 쉽다.
무협지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눈을 크게 떠 고수를 찾아가서 마음을 열고 배우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다.
'인생도처유상수'라는 말이 있다.
'우리 삶에 가는 곳마다 숨어 있는 고수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삶의 도처에서 숨은 고수들을 예기치 않게 만나게 되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과거처럼 고수는 깊은 산 속에만 있지 않다.
우리 생활 곳곳에서 각 분야의 고수가 존재한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열고 보면 우리를 도와줄 고수들이 주변에 즐비하다.
다만 우리가 그들을 인정하지 않고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화가 피카소가 유명해지자 어느 부인이 찾아와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다.
피카소는 초상화를 5분 만에 그려줬다.
스스로 자신이 미술 분야의 고수라고 믿었던 그 부인은 성의 없어 보이는 피카소에게 사례비를 조금밖에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피카소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초상화를 5분 만에 그리기 위해 나는 30년 동안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물리적인 시간과 눈에 보이는 노력을 기준으로 삼는 하수의 평가로는 절대 고수를 알아보지 못한다.
자기가 아는 만큼 보이고 그만큼만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아집과 독단이라는 콩깍지에 씌어 주위의 고수들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못한다.
때로는 지독한 냉소주의로 모든 걸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운·학벌·배경이 좋아서 그렇다느니 또는 줄을 잘 타서라느니 온갖 이유를 들어 고수를 폄하하기 바쁘다.
하지만 고수는 돈·권력·명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경험·노력의 산물이다.
감동받지 못하는 사람은 감동적인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하듯이 고수를 인정하지 않으면 고수의 경지에 오를 수 없다.
지금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과 아이디어, 도처에 존재하는 고수들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현명함이 필요한 시대다.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이며, 발명이 아닌 발견의 시대다.
네트워크도, 인터넷도, SNS도 모두 다 '스마트'하게 열려 있다.
'고수' 또한 열려 있다.
당신이 마음먹기에 따라 그 고수는 내 편이 될 수도, 내가 고수가 될 수도 있다.
글 고영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