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문명만큼 신비스럽고 미스터리한 문명이 잉까문명이다. 잉까문명은 태양 숭배와 황금으로 유명한데, 잉까문명에 대한 연구는 그들이 어딘가에 숨겨 놓았으리라 전해지는 전설적인 황금 도시 두 곳 즉, 엘도라도와 파이치치를 중심으로 한 발굴을 통해 잉까인의 주거, 배수와 도로 관리 등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잉까문명을 건설한 잉까족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13세기 경 만꼬까팍이라는 전설적 인물이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남뻬루 고원의 꾸스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태양의 신전을 축조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잉까족은 남방의 아이마라족이나 북방의 창까족 같이 께추아 언어를 사용하는 뻬루 인디언의 한 집단이었으며, 그 당시 대부족이었던 창까족과의 전쟁에서 이겨 중부 뻬루고원까지 손에 넣었다.
이후 각지방의 도로가 정비되고 고원의 깊은 골짜기에도 다리가 놓여 유명한 잉까왕도(王道)의 도로망이 완성된 것이다.
창까족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이러한 업적을 남긴 파차꾸띠왕은 1474년 경에 죽었다고 알려져있다. 다음의 뚜파끄잉까 유팡뀌 황제의 시대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에콰도르 지방과 칠레, 아르헨티나의 북부도 잉까의 영토가 되었다.
질서가 확립된 행정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각종 공공 건축도 태양신전과 성채를 중심으로 각지에 세워졌다. 잉까제국의 근본적인 형태는 이 뚜파끄잉까 시대에 이루어졌으며, 이 잉까가 죽은 것은 1493년 경이었다.
잉까라는 말은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남아메리카의 중앙 안데스 지방을 지배한 고대제국의 명칭인 동시에, 그 사회의 중핵(中核)이었던 부족 및 그 지배계급의 사람들에 대해 사용된 명칭이다. 잉까족은 게추아족이라고도 불리며, 남방의 아이마라족이나 북방의 창까족 등과 함께 뻬루 인디오의 한 집단이었다.
잉까 신화에 의하면 네개의 '수유(Suyu)'로 나뉘어 각 수유의 모서리는 세개의 '배꼽(Qusqu)'이 서로 맞닿는 곳에 수도 꾸스꼬가 만들어졌고, 제국의 공식 언어는 께추아어였으나 몇 백개가 넘는 지역 언어가 통용되었다. 기원전 11000년 오늘날 뻬루라 불리는 지역에 정착한 빈족, 치무족, 나스까족, 띠아우아나꼬족 등이 기원전 1250년 경에는 안데스 산맥 지역에 부족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서기 600년 우아리 지역에서 온 민족이 200여 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며, 이때부터 미이라를 매장하는 풍습이 생긴다.
900년 경 우아리 민족이 사라지고 다시 여러 부족으로 갈라진 뒤 1105년 잉까부족에 신찌로까 군주가 등장하면서 세력을 넓혀가자 1438년 창까족이 잉까인을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 지역을 통합한 잉까제국도 얼마가지 않아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이즈음 1492년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가 우연히 아메리카 대륙에 오게 되고 이때부터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이 이 지역을 정복하게 되는데, 꾸스꼬를 기반으로 작은 왕국이었던 잉까는 1430~1532년에 전성기를 맞은 제국으로, 1세기만에 콜롬비아 남부에서 칠레 중부의 모든 왕국을 통일 흡수하였으나 에스파냐 정복군 사령관 프란시스꼬 삐사로에게 제왕이 체포되자 쉽게 멸망하고 말았다.
이 지역에서는 기원전부터 여러 문명이 명멸하였으며, 잉까는 그 최후에 나타난 제국으로 문자를 사용하지 않아 그들의 역사는 추정할 수 밖에 없다.
잉까 지도부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도록 권장했는데 그 중 최고의 신은 태양신 인띠였다. 태양의 신인 비라꼬차의 계시에 따라 최초의 잉까 선조들은 기원전 1200년경에 있던 전설상의 대홍수에 의해 이주했다.
이후 망꼬 까빡이라는 최고 지도자의 금지팡이가 가장 깊이 박히는 곳에 도읍을 정하라는 계시가 있었고 결국 세상의 배꼽이라는 지금의 꾸스꼬에 신의 계시에 따라 도읍을 정했다.
그들의 수도인 꾸스꼬는 인구가 20여만 명 정도 되는 큰 도시였다. 잉까인들은 네 개의 전설을 가진 씨족공동체인 아이유(Ayllu)를 통해 제국 이전부터 토지, 가축, 곡식 등을 공동소유하며 집단 생활을 하며 사회제도와 행정의 기본틀을 갖추게 된다.
그들은 께추아어를 사용했지만 문자는 없었고, 끼뿌(께추아어로 매듭을 뜻하며 매듭져 있는 일련의 끈 또는 줄의 다발로서 수를 계산하고 역사 사건을 기록하는데 사용)를 중심으로 자치적인 통치체제를 영위했다. 삐사로의 세 번째 탐험 때 잉까제국에는 분열이 일어났다. 삐사로는 그 이전 원정때 잉까제국에 천연두를 만연시켰었는데 그로인해 그들의 황제 위아이나까빡이 죽자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져 잉까제국이 둘로 갈라지게 된다. 형인 우아스까르는 꾸스꼬의 잉까(원래 고대문명을 세운 가문의 성을 가르키나 황제란 의미로도 쓰인다)가 되고, 동생인 아따우알파는 끼토의 잉까가 되었다.
그런데 우아스까르가 아따우알파의 추종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삐사로는 이를 빌미로 아따우알파도 처형하여 결국 1533년 꾸스꼬 잉까까지 최종적으로 점령한 뒤 1535년 항구도시 리마를 건설했다.
즉, 프란시스 삐사로가 도착하기 이전부터 이미 왕국은 둘로 나뉘어져 내전 상태였는데, 이는 이미 1532년 까하마르까에 기반을 둔 북부잉카를 정복한 후 주둔하고 있던 에스퍄냐 정복군 사령관 프란시스꼬 삐사로가 꾸민 잉까제국 정복 전략이었던 것이다.
잉까라는 말은 원래 어느 부족의 명칭이었지만 나중에 잉까제국의 황제를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오늘날에는 일반적인 잉까제국 종족을 지칭하는 뜻으로 통한다. 잉까라는 말은 인띱 추린(Intip Churin)이라는 태양의 아들을 의미하는 어휘에서 기인되었으며, 태양신은 잉까인들의 대표적인 신이다.
창조주 우이라꼬차가 무에서 만물을 창조한 것과 달리 태양은 창조주 의도대로 창조주 최고신이면서 잉까인들의 아버지로 군림했다. 잉까인들은 태양이 코카 잎을 즐겨먹는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옥수수 술을 빚어 태양에게 바쳤다. 그들은 술이 증발해버리는 것을 태양이 마신다고 생각했다.
끼야라고 불리는 달의 신은 태양의 아내로서 임산부의 신이라 불임 여인들이 달에게 아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잉까인들은 두개골을 수술할 정도로 의학이 발달했다.
1531년 프란시스꼬 삐사로 장군의 스페인 군대가 페루에 침투하여 북고지의 도시 까하마르카(Cajamarca)가 발견이 되고 거기서 아따우알파가 체포됨으로써 잉까제국은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후 스페인은 잉까지역을 식민지로 삼고 식민지 제도를 시행하였다.
잉까의 마지막 황제가 죽은 후 잉까인들의 독립운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망꼬라는 잉까인은 반란을 일으켜 꾸스꼬 북서쪽 계곡을 거점으로 1571년까지 저항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잉까문명은 신권을 중요시하는 제국의 성격을 띠었으나 평민을 위한 사회보장이 완비되어 있어서 ‘신권적 사회주의’라든가 ‘사회주의 제국’으로 구분된다. 잉까제국에 있어서 모든 토지는 황제에 귀속하며, 모든 지방의 촌락들에 있어서 경지(耕地)는 잉까·태양신·국민을 위하여 3등분되었다고 한다.
1911년 미국의 상원의원이자 고고학 교수인 히람 빙햄에 의해 발견된 마추삐추는 안데스 산맥의 해발 2,700m의 봉우리에 숨겨지고 우루밤바강의 계곡에 의해 둘러싸인 요새도시로 잉까제국의 영광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물이다. 그러나 수도인 꾸스꼬로부터 113km 떨어진 이 도시가 과연 어떤 목적에 의해 건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여러 건축 스타일로 건설된 궁전, 사원, 요새, 가정집, 광장 등이 있으며 고산지대임에도 불구하고 관개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그 위치로 볼 때 오얀따이땀보나 삭사우아만처럼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건설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황제가 신과 직접 대면하기 위한 곳, 혹은 천문학적 관찰을 위한 곳이었다는 등의 설이 있으나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마추삐추가 꾸스꼬로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요새였을까? 아니면 태양신의 처녀들에게 바친 일종의 수녀원이었을까? 망꼬 잉까(스페인인들이 옹립한 허수아비 잉까 지도자)의 마지막 피난처였을까? 마추삐추처럼 다양한 가정과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유적도 별로 없다.
깎아지른 절벽과 하늘을 찌를 듯한 봉우리로 둘러싸인 우르밤바 계곡. 마추삐추는 이 우르밤바 계곡지대의 해발 2,280m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마추삐추는 '나이 든 봉우리'라는 뜻인데, 산자락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공중도시'라고도 불린다.
잉까인들이 스페인 사람들의 공격을 피해 산속 깊숙이 세운 것이라고도 하고, 군사를 훈련해서 후일 스페인에 복수하기 위해 건설한 비밀도시라고도 한다. 또한 자연재해, 특히 홍수를 피해 고지대에 만든 피난용 도시라고도 한다. 도시의 총면적은 5㎢, 그 절반에 해당하는 비탈면은 계단식 밭이다. 서쪽의 시가지에는 신전과 궁전, 주민 거주지 구역이고 주위를 성벽으로 둘러쌌다.
16세기 후반, 잉까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이곳 마추삐추를 버리고 더 깊숙한 오지로 떠났다. 그 뒤 약 400년 동안 사람 눈에 띄지 않다가 1911년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람 빙엄이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마추삐추의 시공간은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그 유적에는 3대의 시간이 흐른다. 200톤이 넘는 거석, 정교한 다면체로 쌓아올린 '태양의 신전', 주신전 등은 건축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선사시대 사람들의 작품이다. 후대의 잉까인들도 고대인들만은 못하지만 나름대로의 기술로 고유의 건조물을 세웠고, 유적 붕괴 후에는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조잡하게나마 유적을 재건하고자 석축을 쌓았다. 이 3대에 걸친 건조물을 보노라면 문명의 영고성쇠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유적 꼭대기에 '인띠빠따나'라고 하는 제례용 석조물이 있다. 인띠빠따나는 '태양을 잇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이 석조물 위에 높이 1.8m, 너비 36cm의 돌기둥이 솟아 있다. 잉까인들은 천체의 궤도가 바뀌면 커다란 재앙이 생긴다고 믿고, 매년 동지 때 이 돌기둥 바로 위에 뜬 태양을 붙잡아 매려고 돌기둥에 끈을 매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둥을 해시계의 일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즉 이 기둥이 만드는 그림자가 시각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당시 기술력을 감안해 볼 때 너무 단순한 추측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유적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암반을 깎아 만들었으니 그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골드 헌터(Gold Hunter)들에게는 이 두 단어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엘도라도(El Dorado)와 파이치치(Paichichi), 두 곳 다 안데스 산맥 근처 밀림에 있다고 전해지며 엘도라도는 황금으로 이루어진 도시인 반면, 파이치치는 대규모의 황금이 숨겨져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잉까제국이 처음 서방 세계에 알려진 이후 이 두 도시를 찾기 위해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발견된 것은 마추삐추, 그란 파자뗀 같은 유적지였고 그나마 역사적 가치가 높아 그것으로 위안을 삼곤 하였다.
최근 뻬루의 일간지 ‘엘 고메르시오’가 뻬루 동부 원시림에서 가옥, 사원, 무덤들이 완벽히 남아있는 옛 유적을 발견하였다고 보도했다. 덧붙여 이 지역이 지난 500여년 동안 고고학자와 탐험가들이 찾던 엘도라도 도시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얘기는 없다.
1965년에 그란 파자뗀이 발견되었을 때도 그러한 추측과 소문이 떠돌았으나 사실무근이었다. 짐승과 인디언 추장 얼굴이 새겨져 있어 잉까 귀족 무덤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발굴을 시작한지가 꽤 오래인데도 잉까의 황금이 나왔다는 말은 없다.
또 마띠겐족이 문명을 피해 살던 판차꼬차 밀림에서도 1973년에 잉까 유적이 발견되었으나 황금은 나오지 않았다. 엘도라도가 황금인간일 뿐이라는 설도 있다. 1969년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따에서 몇 시간 거리에 있는 산 속 동굴에서 순금으로 만든 뗏목 모형이 발견되었다. 그 뗏목 위에는 순금으로 만든 추장이 서 있었고 그 뒤에는 8명의 부족 사람들이 노를 젓고 있었다.
스페인 군대에게 처음 엘도라도의 존재를 가르쳐준 칩자족은 이러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추장은 몸에 금가루를 바르고 황금을 구아따비따 호수에 던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해발 3,000m 높이의 화산 분화구 호수인 구아따비따 물을 다 빼내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그 바닥에서 금을 발견하였다는 소식은 없다.
잉까인들이 스페인군의 약탈을 피해 엄청난 양의 황금을 감추었다고 전해지는 파이치치에 대한 탐사 시도 또한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파이치치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아마존 밀림 어딘가에 깊숙이 숨겨져 있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발견이 안 될 리가 없다.
실제로 영국의 육군 대령이자 탐험가인 코로넬 퍼시 포셋은 1925년 잃어버린 옛 도시를 찾으러 아마존 밀림으로 들어갔고, 그의 실종은 20세기 탐험 사상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는다. 포셋은 탐험을 시작하기 전 여러 사전 조사를 하였는데 그 중 ‘알바레스의 브라질 탐험’, ‘옛 도시의 유적에 관한 보고서’등의 책을 발견하고 아마존 깊숙한 곳에 잃어버린 도시와 문명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역사적으로 전자는 1516년에 포르투갈의 알바레스가 겪은 실제 이야기이며, 후자는 1743년 포르투갈의 프란시스꼬 알바레스의 손자인 디아스가 발견한 금광을 찾으러 브라질로 건너 간 이야기이다.
포셋은 아마존 밀림에 사는 인디언들 조차 더 이상 들어가길 원하지 않는 지점에서 그들을 돌려 보내면서 그들 편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서신이 되고 말았다. 그 편지의 내용인 즉, ‘나는 지금 남위 11도 43분, 서경 54도 53분을 지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별 탈 없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느 탐험보다도 큰 사명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기어코 옛 도시를 찾고 돌아가겠습니다. 기쁜 소식을 기대하십시오. 1925년 5월 25일 포셋.’이라고 되어 있었다.
엘도라도와 파이치치의 존재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잉까제국은 역사상 가장 황금을 많이 가지고 있던 나라였고 한때 스페인을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로 만들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 스페인이 약탈해 간 양은 잉까제국이 가지고 있던 모든 황금의 4분의 1도 안 된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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