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라틴의 디바 샤끼라의 Whenever wherever

부에노(조운엽) 2016. 9. 21. 12:39

 

 

 

 

슈퍼스타 샤끼라

 

 

라틴을 대표하는 가수라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나 제니퍼 로페즈 등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샤끼라 또한 음악적 역량, 춤실력에 미모 등 뭐하나 빠지는게 없다.

한마디로 라틴에서 날아온 사기캐 여신이라고 보면 될 듯 하다.

현재 활동하는 라틴쪽 여신으로서는 거의 독보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녀는 1977년 콜롬비아, 바랑키야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어릴때부터 곡 필력을 뽐냈다.

4살 때는 'La rosa de cristal(크리스탈장미)'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이런건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타자기로 이야기를 쓰곤 했었는데 샤키라는 그거에 매력을 느꼈다.

그때문에 크리스마스때는 아버지에게 타자기를 선물로 달라고 한적도 있었다.

 

샤끼라의 아버지는 그녀를 데리고 어느 식당에 갔는데 드럼 비슷한 악기소리를 듣더니 테이블위로 올라가 춤을 췄다고 한다.

춤을 너무 잘추니까 사람들이 다 박수를 쳤다는 일화가 있다.

그때 이후로 그녀는 벨리댄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7살 때 타자기를 선물 받고 본격적으로 시와 노랫말까지 썼다.

그러던중에 그녀가 8살이 되던 해, 그녀의 오빠가 오토바이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게되는데 이에 샤키라는 슬픔에 빠져서 쓴 곡이 'Tus gafas oscuras(그대의 까만 안경)'이라는 곡이다.

자신의 슬픔을 감추기 위해서 검은 안경을 쓴다는 내용을 담은 곡이다.

 

샤끼라는 이때부터 가수가 되고 싶었다.

노래하는 것도 굉장히 좋아해서 합창단에 가기도 하는데 결과는 퇴짜.

목소리가 너무 쎄서 합창단과 맞지 않는다고 거절 당했다.

어떤 선생은 목소리가 염소같다며 그녀를 거절했다.

그녀는 학교에서 벨리댄스를 배웠다.

 

그러던 와중에 8살때 그녀의 집 형편이 기울어 그녀의 아버지는 파산에 이르렀고, 집을 처분하고서 미국에 사는 친척집에서 신세를 지게 된다.

그후 다시 바랑키야로 돌아온 샤끼라는 아버지와 고아원에 들렀다.

그리고 아버지는 말한다.

"샤키라, 저걸보렴. 우리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애들도 많단다."

사실 샤끼라하면 박애주의자로도 유명한데 이때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까.

이후에 그녀는 말한다.

"어느날 내가 유명한 가수가 되어 저들을 구하리라."

 

실제로 샤끼라는 엄청나게 기부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복구참사를 위해 400만 불을 기부했고, 만삭화보를 찍어서 유니세프 어린이재단에 기부했고, Waka waka 음원 수익을 아프리카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등 음악계의 기부천사로도 유명하다.

 

93년에 그녀는 비냐 델 마르 국제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상을 받는다.

96년, 그녀의 앨범이 8개국에서 1위를 하는 등 빌보드에도 순위가 오르고 그래미 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2001년에 'Whenever wherever'가 이천만 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기록했고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런 그녀는 박애의 여제.

외딴섬 하나를 통째로 사서 음악학교를 짓고 가수를 꿈꾸는 어려운 아이들을 지원했다.

또한 기부활동도 엄청나게 했다.

아직도 그녀의 전성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영원하라 샤키라!

 

 

 

 

 

 

 

 

 

Whenever wherever, Shaki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