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로 돌아가고 싶었던 비올레따 빠라
비올레따 빠라(Violeta Parra)는 칠레 남부 산 까를로스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삶은 시작부터 고생이었다.
아버지는 악기를 잘 다루었지만 한량이어서 생활에 별로 보탬이 되지 않았다.
노래를 잘해 때때로 마을 잔치에서 노래 품을 팔던 어머니가 이에 질색하여 자식들이 기타를 만지는 것을 금했을 정도였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제대로 교육을 받은 자식이라고는 큰아들뿐이었다.
그 덕에 큰아들은 칠레를 대표하고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친 시인이 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니까노르 빠라(Nicanor Parra)이다.
반면 나머지 동생들은 처음에는 잔돈푼이나 받는 재미로, 나중에는 가세가 기울어 거리와 식당과 열차 등을 돌아다니며 노래 동냥을 해야 했다.
니까노르는 평생 이에 대해 미안해했다.
특히 비올레따의 천부적인 끼가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죽자 제일 먼저 비올레따를 산띠아고 데 칠레로 불러올려 어떻게든 학교에 다녀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니까노르 자신도 가난한 고학생 처지라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해서, 결국 비올레따는 어렸을 때부터 익힌 음악으로 밤무대를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나가야만 했다.
때로는 콩 한 포대로 한 달을 견뎌야 했고, 기타 케이스를 덮고 자야만 했다.
담배 연기 자욱한 바에서 새벽까지 노래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두 번의 이혼이 말해주듯 결혼 생활도 행복하지는 못해 비올레따는 어금니를 악물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삶과 맞서 나갔다.
적어도 파국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 비올레따 빠라는 여장부였다.
혹독한 삶 속에서 그녀를 지탱하게 해준 것이 바로 민속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이었다.
칠레 민속음악의 보고인 산 까를로스 출신인데다, 명연주자인 아버지와 노래꾼 어머니를 둔 비올레따에게 산띠아고에서 유행하는 민속음악은 도시민의 취향에 맞춘 빈 껍데기로 보였다.
처음 상경했을 때부터 비올레따는 피상적인 민속음악을 일소하고 진정한 민속음악을 보존, 재창조,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비올레따 빠라의 강인함과 열정을 늘 따사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오빠 니까노르가 동생에게 민속음악을 채집할 것을 권유했다.
그것은 늘 가슴 한구석에 아쉬움을 간직하고 살던 비올레따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
1953년 그녀는 본격적으로 민속음악 채집에 나선다.
비올레따의 삶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산띠아고 인근 동네의 이주민 촌은 물론 중부 지방 일대를 샅샅이 훑으며 다녔다.
아무리 외진 곳이라 해도 주저하지 않았다.
십 리 길이든, 백 리 길이든 기타를 짊어지고 하염없이 걷고 노새에 몸을 실었다.
낯선 마을에 들어서면 아무 집이나 무작정 들어가 노인들이 사는 곳을 물었다.
노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춤을 추라면 추고, 노래를 부르라면 불렀다.
죽어가는 노인의 말벗이 되어주고 옛 기억을 더듬게 하기도 했다.
녹음기는 가난한 비올레따에게 사치였지만, 그것이 없다고 채집 작업에 지장을 받지는 않았다.
마주치는 노래마다 어김없이 그녀의 영혼 속 깊이 새겨져, 공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로 쓰면 됐다.
그녀는 홀로 칠레 대학 민속연구팀보다 더 많은 노래를 채집하는 억척을 보였다.
그해는 또한 비올레따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은 해이기도 하다.
근대화와 도시화로 잊혀가던 민요가 비올레따의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되자 감격에 찬 청취자들의 편지가 많이 왔다.
가구도 변변치 않은 비올레따의 집에 애정이 담긴 편지 자루들이 넘쳐났다.
그녀는 수천 통의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보냈다.
가난한 살림에 우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자 청취자들에게 호소했다.
이번에는 쓰지 않은 봉투와 편지지와 우표가 넘쳐났다.
무명의 밤무대 가수가 억척스러움 하나로 일궈낸 결실이었고, 그래서 비올레따는 이 감격의 순간을 회고하며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진짜 인생은 서른다섯 살이 넘어야 시작돼요.”
1955년 민속 부문에서 칠레의 예술 대상인 까우뽈리깐 상(Premio Caupolicán)을 받았을 때 비올레따 빠라는 드디어 행복한 인생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올레따의 자그마한 체구에는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운 꿈과 열정이 있었다.
그래서 험난한 길을 마다치 않았고 불행을 자초했다.
까우뽈리깐 상도 결국 화를 부르고야 말았다.
발단은 바르샤바 국제민속대회 초청장이었다.
까우뽈리깐 상으로 칠레 민속의 대표성을 인정받으면서 날아온 초청장이었다.
두 번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홉 달짜리 딸이 마음에 걸렸지만, 칠레 민속음악을 타국에 알리겠다는 집념이 더 컸다.
비올레따는 가족을 두고 주저 없이 바르샤바로 떠났다.
그렇지만 대회 기간 중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한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 무너지지 않았다.
딸의 죽음을 잊기 위해 오히려 미친 듯이 공연에 몰두했고, 대회가 끝난 후에는 유럽을 돌아다녔다.
유럽 전체에 칠레 민속음악이 울려 퍼지게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두 번째 이혼의 발단이었다.
첫 번째 결혼 생활과 마찬가지로 일에 대한 열정이 파국을 부른 것이다.
그러나 비올레따 빠라는 그럴수록 일에 매달렸고 유럽을 몇 차례 오가며 굵직한 성과를 올렸다.
파리에서 '칠레의 노래'라는 음반을 녹음하고, 인류 박물관과 유네스코에 칠레의 소리를 기록으로 남기고, 칠레 민속을 소개하는 책을 발간하고, 루브르 박물관 부속 전시실에서 수공예품 전시회를 했다.
영국에서도 방송에 출연하고 BBC 방송국 자료실에 자신의 노래를 보존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결코 제 발로 찾아온 성과가 아니었다.
늘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던 그녀로서는 유럽에서 버티기조차 쉽지 않았다.
싸구려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고 귀신 나올 듯한 허름한 숙소를 전전해야 했고, '파리의 한 칠레 여인(Una chilena en París)'이라는 노래에 어렴풋이 나오듯이 숱한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러나 결코 굴하는 법이 없었다.
칠레 민속음악을 소개할 기회만 생기면 어디든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마치 민속음악을 채집하러 칠레 촌동네를 돌아다닐 때처럼.
하지만 문화의 도시 파리가 이방인에게 쉽게 문을 열어줄 리 없었다.
예술가의 오만을 당연시하던 그녀는 자신을 3인칭으로 호칭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파리에서도 숱한 사람을 만나고 숱한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비올레따 빠라가 왔다.'라고 말했지만 거의 냉소에 가까운 반응과 맞부닥뜨렸을 뿐이다.
그럴 때마다 비올레따는 수없이 분통을 터뜨렸다.
칠레 민속음악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입에 게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뛰는 일이 일상의 일이 되었다.
비올레따가 칠레로 돌아온 것은 ‘빠라 뻬냐(Peña de los Parras)’가 문을 연 다음이었다.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사벨과 앙헬이 파리의 샹송 카페에 영감을 얻어 1965년 산띠아고 시내에 연 라이브 카페다.
뻬냐는 예기치 않은 성공을 거두었고, 사회성과 서정성을 조화시키는 데 성공한 노래운동인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ón)의 모태가 되었다.
뒤늦게 유럽에서 돌아와 카페의 성공을 두 눈으로 목격한 비올레따는 가슴이 설렜다.
드디어 칠레 사회가 전통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녀는 산띠아고 외곽인 라 레이나(La Reina)에 천막을 치고 거기서 숙식하며 민속음악을 공연했다.
그러나 민속음악의 전당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내디딘 그 발걸음은 비올레따를 깊은 수렁으로 빠뜨려버렸다.
산띠아고 외곽까지 일부러 음악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데다가, 약속된 구청의 지원도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가난은 여전했고 마지막 남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던 이는 그녀의 직선적인 성격에 진저리치다 볼리비아로 가서 다른 여인과 결혼했고, 건강마저 비올레따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가난과 좌절과 질병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그 소식은 마지막 일격이 되었다.
비올레따는 그 유명한 '생에 감사해(Gracias a la vida)'를 작사, 작곡한다.
그녀가 직접 반주하며 부른 이 노래는 칠레인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노래이다.
1973년 삐노쩨뜨가 주도한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칠레 사회는 죽음의 그림자에 휩싸였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실종되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 삶은 형편 없었다.
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해준 희망의 노래가 바로 이 노래였다.
참혹한 최후를 맞은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울 때도, 실종된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랄 때도, 혹독한 탄압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때도 이 노래를 부르며 삶의 희망을 부여잡으려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생에 감사하며'는 늘 기억될 것이다.
칠레 민중 삶의 노래, 혁명의 노래가 되어 집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불렸다.
비록 이 곡의 노랫말은 삶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비올레따 자신이 빼앗긴 것을 하염없이 더듬고 있었다.
민속음악 전당으로 키워보겠다고 생각한 그 천막에서 결국 비올레따는 권총을 자기 머리에 쏘았다.
그리고 분신 같던 기타에 엎어져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평소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죽음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지만 아마도 비올레따는 죽음을 택하기까지 패기에 찬 젊은 시절이 그리웠을 것이다.
싸구려 선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다 술 취한 손님이 경우 없이 대하면 기타가 부서지도록 머리를 내려치던 당찬 여인이었던 시절이.
비록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꿈 많던 소녀였던 그때, 산띠아고로 올라온 뒤 처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바로 그 나이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일까.
비올레따 빠라는 만년에 '열일곱으로 돌아간다는 것은(Volver a los 17)'이라는 노래를 남겼다.
Volver a los 17, Violeta Parra
Volver a los diecisiete despues de vivir un siglo
es como decifrar signos sin ser sabio competente
volver a ser de repente tan fragil como un segundo
volver a sentir profundo como un nino frente a Dios,
eso es lo que siento yo en este instante fecundo
한 세기를 살고 열일곱 살로 돌아간다는 것은
고명한 현자는 아니지만 암호들을 풀어내는 것과 같고
문득 찰나같이 연약한 존재로 되돌아가
신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깊숙이 느끼는 것이네
이것이 바로 이 풍요로운 순간 내가 느끼는 것
Mi paso retrocedido, cuando el de ustedes avanza
el arco de las alianzas ha penetrado en mi nido
con todo su colorido se ha paseado por mis venas
y hasta la dura cadena con que nos ata el destino
es como un dia bendecido que alumbra mi alma serena
당신들의 걸음이 앞으로 나아갈 때 내 걸음은 뒤로 물러났지만
하나 됨의 활이 내 둥지를 관통해
그 풍요로운 색채는 내 혈관을 물들였네
우리를 묶는 운명의 단단한 사슬마저도
내 고요한 영혼을 비추는
순정한 다이아몬드 같기만 하네
Se va enredando, enredando, como en el muro la hiedra
y va brotando, brotando como el musguito en la piedra
como el musguito en la piedra, ay si, si, si
벽에 담쟁이들이 자라듯
그렇게 휘감겨 가네, 휘감겨 가네
돌멩이에 이끼가 끼듯
그렇게 싹을 틔우네, 싹을 틔우네
그렇게, 그렇게....
Lo que puede el sentimento no lo ha podido el saber,
ni el mas claro proceder ni el mas ancho pensamiento
todo lo cambia el momento colmado condescendiente,
nos aleja dulcemente de rencores y violencias
solo el amor con su ciencia nos vuelve tan inocentes
감정으로는 가능한 그것
지식으로도 불가능했었고,
가장 명확한 행동으로도,
가장 넓은 사고로도 어찌할 수 없었네
그 모든 것을 바꾸는 순간의
관대한 마법은 우리를 부드럽게
증오와 폭력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네
단지 사랑만이 그 기지로 우리를
그다지도 순수하게 되돌려놓네
El amor es tordellino de pureza original
hasta el feroz animal susurra su dulce trino,
retiene a los peregrinos, libera a los prisioneros,
el amor con sus esmeros, al viejo lo vuelve nino
y al malo solo el carino lo vuelve puro y sincero
사랑은 원초의 순수함을 지닌 회오리바람
광폭한 짐승조차도 그 부드러운 떨림을 속삭이고
순례자의 발길을 붙잡고,
죄수들을 자유로이 해방하네
그 광채로 사랑은 노인을 아이로 되돌리고
단지 애정만으로 악인을 순수하고 신실하게 만드네
Se va enredando, enredando, como en el muro la hiedra
y va brotando, brotando como el musguito en la piedra
como el musguito en la piedra, ay si, si, si
벽에 담쟁이들이 자라듯
그렇게 휘감겨 가네, 휘감겨 가네
돌멩이에 이끼가 끼듯
그렇게 싹을 틔우네, 싹을 틔우네
그렇게, 그렇게....
De par en par la ventana se abrio como por encanto
entro el amor con su manto como una tibia manana
y al son de su bella diana hizo brotar el jazmin,
volando qual serafin al cielo le puso a retes
y mis anos en diecisiete los convirtio el querubin
마법처럼 창문이 활짝 열리자
망토를 걸친 사랑이 망설이는 아침처럼 들어왔네
아름다운 기상나팔에 맞추어
사랑은 자스민을 싹 틔우고,
사랑의 대천사는 날아오르며
하늘에 귀걸이를 걸었네
그러자 아기천사는
내 나이를 열일곱으로 되돌려놓았네
Se va enredando, enredando, como en el muro la hiedra
y va brotando, brotando como el musguito en la piedra
como el musguito en la piedra, ay si, si, si
벽에 담쟁이들이 자라듯
그렇게 휘감겨 가네, 휘감겨 가네
돌멩이에 이끼가 끼듯
그렇게 싹을 틔우네, 싹을 틔우네
그렇게, 그렇게....
'라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Que sera, Semino Rossi y 도미니카 공화국의 산토 도밍고 축제 (0) | 2016.07.16 |
---|---|
Te perdiste mi amor, Thalia y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가수로 선정된 딸리아 (0) | 2016.07.14 |
El Jinete, Pasion Vega y 빼빼로 데이를 통해 본 순수문화와 허위문화 (0) | 2016.07.11 |
Prisionera (죄수), Pilar Montenegro y 분노를 잘 굴려야 멀쩡하게 살 수 있다 (0) | 2016.07.10 |
Donde estara mi primavera(내 사랑의 봄은 어디 있을까), Myriam Hernandez y 산티아고 데 칠레는 겨울 (0) | 2016.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