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엔n

아르헨티나 국가 부도의 교훈 4편

부에노(조운엽) 2009. 12. 12. 07:45

 

 

Menem y Cecilia Boloco

 

 

불사조들의 비상


그의 깜짝쇼는 70세를 넘어서도 식을 줄 몰라 자기 나이 절반의 미스 유니버스 출신 세실리아 볼로코와 결혼식을 시끌벅적하게 치르더니 신방 차린 지 2주도 안돼 무기밀매 혐의로 구속되었다.


가택연금 형태로 다섯 달 동안 궁전 같은 곳에서 오붓하게 지낸 뒤, '아마 우리가 어느 누구보다 가장 길고 달콤한 신혼생활을 했을 걸?'라고 이야기해서 '살인적 인플레를 잠재웠다는 고정환율제가 결국 국가 파탄을 가져온 주범으로 밝혀졌으니 우리는 그가 주는 독약을 서서히 마신 격이야!' 하고 한탄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미스 유니 버스 출신인 칠레나 영부인 세실리아

 


게다가 세실리아는 칠레인이면서 결혼 전부터 깻잎머리와 누드에 국기 색깔(흰색과 하늘색) 대형타월을 두르고 잡지 표지에 등장, '제2의 에비타' 분위기를 짙게 풍겨서 그들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깜짝쇼 커플'임을 보여주었다.


아르헨티나의 정치사에서 정치인 퇴장은 있을 수 없다.

그야말로 꺼진 불도 다시 보자요, 불사조들의 행진이다.

임기 못 채우고 물러난 알폰신 전 대통령과 데 라 루아에 패배해 정치은퇴를 선언한 두알데가 모두 상원의원 선거에 당선, 화려하게 복귀함으로써 불사조임을 보여주었다.

두알데는 대통령에 다시 선출되었으니 사람의 운명도 그렇지만 정치운명을 누가 점칠 수 있을까.

결국 그는 대통령직 4년을 데 라 루아와 공평하게 2년씩 나누어 갖게 되었다.

이렇듯이 이곳에는 정치 9단들이 수두룩하다.

메넴은 꽃 중의 꽃이자 거물 불사조이니 그는 정치 입신의 경지에 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노욕은 끊임없이 솟는 샘물인지 대통령에 다시 도전하겠다니 누가 알랴, 몇 년 뒤 국민들은 데 라 루아의 도전장을 접수하게 되려는지….

 

 

 

Casa Rosada


2001년 12월20일 황혼이 검붉게 스러져가는 저녁 7시 카사 로사다(대통령 집무실)의 정문은 이미 냄비시위대로 한치의 틈도 없었다.

데 라 루아 대통령이 사임서를 제출하고 가족이 기다리는 관저로 가는 길은 하늘 길밖에 없었다.

헬리콥터를 타기 위해 옥상으로 걸어가는 그의 어깨에는 이틀 사이에 몇 년의 세월이 얹혀있는 듯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다섯번째 불명예 퇴임 대통령을 갖게 되었다.

변호사 출신으로 36세에 상원의원에 당선,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려온 그였다.


"메넴에 질려 Mr. Clean이라는 그를 찍었어요. 얼굴이 바뀔수록 더 큰 자루를 들고 나타나는 도둑놈이자 거짓말쟁이인 정치인들에 질렸거든요. 그러나 언챙이 아니면 일색이라더니 데 라 루아는 색도 냄새도 맛도 없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어요. 문제만 생기면 전임자 원망하고 결정적일 때 꼭 실기를 거듭했습니다. 늘 열흘날 잔치에 열하룻날 병풍 치는 격이었지요. 게다가 보좌관은 뒤로하고 28세 아들 안토니오의 말만 들으니 뭐가 되겠어요. 6개월도 안돼 국민이 등돌리기 시작했지요. 중산층을 냄비시위에 끓어들이게 한 연설도 안토니오가 써준 것이라고 합니다."


시인 올란도의 말이다.

 

그만큼 언론에서 희화된 대통령도 드물 것이다.

그를 무능한 위기 관리능력 상실자로 비꼬고 찌르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일주일에 두 번씩 정기 방송되어 그 시간이면 영부인은 관저에 있는 20여 대의 TV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기 바빴다고 한다.

심지어는 그의 이름을 딴 'delarruizar'라는 새로운 용어도 생겼다.

주저와 혼돈, 갇혀있음을 뜻한다.

그는 현재 수도 남쪽 대서양 해변을 끊임없이 혼자 얘기하며 걷고 있다고 한다.


그가 물러나자 다시 페론당의 시대가 왔다.

페론당의 정치 9단 4인방이 밀실에 모여 마치 교황 선출하듯 뽑은 대통령이 산 루이스주의 알프레도 로드리게스 사 주지사다.

70일 시한부 대통령이지만 그는 선출되자마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나비가 꽃 본 듯이 활짝활짝 웃더니 곧 '함박웃음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누구는 강남제비를 닮은 '산 루이스 제비' 같다고도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웃어서 아름다운 여인

 


귀신 붙은 대통령 자리


그 자리에는 무슨 귀신이 붙었는지 앉기만 하면 사람이 변하나보다.

사 대통령은 4인방의 수렴청정을 받아야하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100만 일자리 고용창출, 노조 지도자 만나 정책 백지수표 발행 등 자신을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으로 잠시 착각하더니 4인방의 노여움은 물론 다시 일어난 냄비시위로 설자리를 잃고 일주일 만에 사임한다.


"사 대통령이 시골사람이라 그래요. 산 루이스 벽촌에서 18년 동안 주지사를 했잖아요. 그곳에서는 황제 같았거든요. 1993년에는 납치돼 모텔에서 'Y no C'라는 포르노에 출연, 섹스비디오를 찍은 사건도 있었지요. 그러나 납치됐다는 것은 그의 말이고 그가 18세 여자아이를 납치해서 찍었다는 말도 있어요. 이런 대단한 섹스 스캔들 뒤에도 그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주지사에 당선 됐습니다. 그러니 큰물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겠지요."


이름을 밝히기를 원치 않은 50대 남자가 들려준 '아르헨티나의 사 비디오' 이야기다.

 

그리고 골수 페론주의자며 정계의 원로 에두알도 두알데가 2003년 12월 다음 대통령 선거 때까지 2년 동안 대통령직을 맡는 조건으로 취임, 숨가쁘게 돌아가던 수레바퀴에 제동을 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 두 차례, 부통령 등을 거쳐 경륜으로는 충분히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10년 동안 전임자들이 신주단지 모시듯이 끌어안고 있던 아르헨티나의 애물단지 고정환율제로부터 탈출, 평가절하를 감행했다.

 

 

 

센뜨로에서 본 5월의 광장의 오벨리스꼬

 


아르헨티나 역사의 산증인인 5월의 광장(플라자 데 마요)!

1807년 이래 중요한 정치 사회 사건들이 그대로 녹아 있는 곳이다.

지난 열흘 동안도 이곳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모두 그 가슴에 품었다.

이 광장 바로 앞에 있는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는 시위대가 그려놓은 낙서로 흉하게 얼룩져 있다.


페론과 에비타, 그리고 영화촬영을 위해 이곳에 온 마돈나가 대중을 향해 손을 흔들던 그 유명한 발코니도 지척에 있다.


"우리에게 이 광장은 정신적 피난처이자 어머니 품 같은 곳입니다. 아직도 냄비 두드리는 소리가 남아있는 듯하죠? 저도 얼마나 열심히 두드렸는지 아직도 팔이 아파요. 덕분에 집에 있는 냄비는 모두 못 쓰게 찌그러졌어요."


광장에서 국기를 파는 후안은 아직도 며칠 동안에 생긴 변화가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냄비의 효과에 맛들인 일부 시민은 이제 작은 이권을 위해서도 냄비를 들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냄비가 집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콩가루 집안이 됐다는 얘기이자 집안의 평화가 사라졌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던데….

이제 평가절하의 여파는 화산 폭발에 비유될 만큼 클 것이다.

정치인, 기업가, 노동자, 그리고 국민 모두가 뼈를 깎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지금까지 피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볼 기회가 없었던 국민들이라 고통면역 제로이니 누구보다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아르헨티나는 영원히 표류하게 될 것이다.

70년 전 페론주의의 외투를 과감히 벗어버리든가 21세기에 맞도록 수선하든가, 세금을 내는 사람은 바보라고까지 얘기하는 부정의 뿌리는 국민 모두 스스로 도려내야 할 것이다.


축구 외에는 구심점이 없다지만 축구장의 한마음 열기를 왜 국가 바로 세우기에 쓰지 못하나.

무엇보다 아직도 포근히 잠자고 있는 천연자원을 개발하고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풍부한 관광자원의 상품화, 그리고 지구촌 곳곳에 우수와 열정의 멋을 뿌리는 탱고를 업그레이드한다면 '아르헨티나 드림'은 다시 피어날 것이다.



아르헨티나여 울지 마오


이 '아르헨티나 드림'은 많은 한국인을 이 땅으로 불러왔다.

196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첫 이민선이 들어선 이래 1980년대 말에는 교민수가 4만5000명까지 불어났으나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이곳에서 꿈을 접는 숫자가 늘어나 현재는 2만여 명 정도의 교민이 삶의 둥지를 틀고 있다.


다부지고 근면한 한국인들의 기질은 이곳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이미 '109 한국촌'을 비롯, 온세와 아베자네다 지역의 상가형성, 2개의 일간지 발간, 40여 개의 교회, 한국 병원, 한국인 골프장에 한국인 전용 묘지까지 갖추는 일을 36년만에 이룩했다.

이미 2세 중에는 의사, 변호사, 건축가, 언론인 등 전문인이 배출되어 현지 사회에 진출하고 있다.

이번 소요사태로 200여 가게가 털리고 수십 명이 다친 중국인에 비해 한국인은 4가족만이 재산피해를 입었다.

 

 

 

Evita Peron

 


사회정의당(PJ)의 대부 뻬론.

그의 두번째 부인인 에비타를 빼놓고는 아르헨티나의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사망 50주기에는기념관 개관 등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펼쳐졌다.


"지금 에비타는 이곳을 내려다보고 울고 있을 거예요. 그가 한 일이 다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이 어려울 때 마음을 기댈 피난처 역할을 아주 잘 해 주었지요. 나라가 최악의 상황에 빠져있는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우리를 이끌어줄 지도자가 없어요. 저는 그것이 더 암담하게 느껴집니다."


부에노스 대학의 사회학 교수 이사벨의 탄식이다.

 

에비타는 '부유한 자들의 창녀, 가난한 자들의 성녀'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지만 내가 만난 이곳 사람들은 거의 그녀를 마음의 안식처로 삼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비판하는 것은 첫번째 금기라는 것은 알 만한 외국인은 다 알고 있다.


 

 

레꼴레따에서 에비타를 추모하는 행렬

 

 

시내 중심가 특급 지역인 레콜레타.

고급 상가와 아파트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이곳의 명물은 1만7000평의 레콜레타 묘지다.

7만 명이 잠들어 있는 이곳은 18명의 전직 대통령, 장군 각료, 예술가 등 아르헨티나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만 묻힐 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 에비타의 묘도 있다.

찾기 어려울 만큼 묘지 왼쪽 한구석에 있지만 안내인 없이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늘 그녀의 묘 앞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있기 때문이다.


팜파주의 조그만 도시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탱고가수, 라디오 아나운서를 하다가 페론과 결혼해 영부인에 오른 전설 같은 삶을 산 여인.

골동품상이나 책방에 걸린 그녀의 사진은 지금 보아도 무척 아름답다.

그녀는 아르헨티나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갖게 해주었고 소외되고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에비타를 추모하는 열기는 지방에 가면 더 뜨겁게 느껴진다.

공공건물이나 식당 할 것 없이 대통령 사진보다 에비타의 사진을 더 많이 붙여놓았다.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답례하는 에바

 

 

레콜레타 묘지는 나도 자주 찾는다.

에비타의 집 앞에 서니 오늘은 저절로 'Don't cry for me, Argentina'가 입가에 맴돈다.


아르헨티나여, 나 때문에 울지 말아요.

나는 항상 당신들 곁에 있었어요.

때로는 어렵고 험하게 살아왔지만 그래도 약속은 늘 지켰어요.

나를 멀리 하지 마세요.

 

 

글 : 시인, 수필가, 주 아르헨티나 대사 부인 이강원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