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침팬지는 유전적으로 비슷하지만 운명은 전혀 다르다
"맙소사 돌아왔어. 내 고향이야. 여긴 지구였어. 정말 전쟁을 일으켰군. 이 미친놈들, 결국 지구를 날렸어! 저주한다! 모두 지옥으로 꺼져!"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1978년 3월 25일 토요일 MBC '주말의 명화'에서 '혹성탈출'을 방영했다.
기억이 맞는다면 나는 이날 이 영화를 본 것이 틀림없다.
글쓴이가 아직 코흘리개 어린 시절이었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받은 충격은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우주 비행사 찰톤 헤스턴은 인간이 원숭이 대접을 받는 미지의 행성에 불시착한다.
그의 동료는 유인원들에게 뇌수술을 당해 저능아가 되고 그 자신은 짐승 취급을 당하지만, 꿋꿋이 위기를 헤쳐나간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테일러가 발견한 것은 모래 속에 파묻힌 자유의 여신상, 그곳은 바로 지구였던 것이다.
최근 개봉한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원작 이전의 일을 다룬 것이다.
지구가 어쩌다가 유인원의 세상이 되었는지를 설명한다고 보면 되겠다.
모션 캡처로 구현된 유인원의 표정은 정말 소름 끼칠 만큼 섬세하다.
원작을 아는 구세대 관객의 지지는 절대적이고, 원작을 잘 모르는 신세대 관객들도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반응이다.
사실 원작 이전의 이야기를 다루는 가장 큰 약점은 반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원작이 반전으로 대박을 쳤던 것을 생각하면 손발 묶고 시작하는 셈이다.
하지만 영화는 영리하게도 유인원 시저의 심리 변화를 묘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시저가 보여주는 눈빛 연기는 웬만한 배우 못지않다고 생각된다.
이러다가 이 영화 주인공인 유인원이 오스카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하면서도 당연하지 않은 문제를 하나 생각해 보자.
인간의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게 다루어진다.
기형이나 육체적 장애, 특히 정신 장애가 있는 인간도 소중한 존재다.
본인이 원해서 죽겠다는 것을 도와주는 것도 불법으로 다뤄지며, 식물인간의 생명도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뿐이 아니다.
단지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배아 줄기세포까지 고귀한 존재로 다루어야 한다는 논쟁이 한창이다.
이에 비해 다수 동물은 단지 인간의 식량이 되기 위해 열악한 조건에서 강제 사육되며 대량으로 살육된다.
대량 살육이라고 했지만, 숫자를 보면 느낌이 다를 듯하다.
1년 동안 닭 150억 마리, 돼지 10억 마리, 소 13억 마리 이상이 도살당한다.
어떤 동물은 단지 주인의 행복을 위해 생식 기능이나 목소리를 잃은 채 애완동물이라는 형태로 살아간다.
사실 이들은 그래도 운이 좋은 것인데, 나머지 많은 동물이 이미 멸종되었거나 멸종 위기에 내몰린 경우도 허다하다.
침팬지는 좀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신약 개발을 위해서는 쥐나 개를 이용한 동물 실험을 해야 하는데, 인간의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병은 침팬지를 사용한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침팬지가 인간이 일으키는 치명적 질병에 인위적으로 감염된 후 신약을 투여받는다.
물론 대부분은 조사를 위해 바로 해부 되거나 부작용으로 죽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생체 실험에 사용된 마루타나 미국이 과테말라에서 성병 실험에 현지인을 이용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인간과 침팬지는 유전적으로 98.4퍼센트가 똑같다.
이는 얼룩말과 말의 차이보다 작은 것이다.
하지만 지구에서 침팬지와 인간의 운명은 완전히 다르다.
이런 차별은 근거가 있는 것일까?
침팬지는 인간보다 지능이 낮다고?
그렇다면 지능 장애를 가진 인간은 차별받아도 되는 걸까?
물론 장애 때문에 지능이 낮은 것과 원래 지능이 낮은 것은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태어날 때부터 지능 장애를 갖는 사람은 차별을 받아도 될까?
제인 구달 박사는 침팬지가 흰개미를 잡기 위해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진화의 추가 조금만 옆으로 기울었다면 우리가 동물원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구 위의 생명체 가운데 인간이 가장 고귀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환상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편견을 만들었다.
생명체가 아주 조악한 단세포에서 출발해 인간을 향해 진보해 왔다는 생각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유전자에 담긴 정보의 양을 보면 인간보다 식물이 훨씬 더 많다.
식물은 광합성을 해서 엽록소를 만드는 정보를 추가로 더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
인간은 뇌가 유난히 큰 동물이라고 여겨지지만 사실 고래의 뇌가 인간보다 몇 배나 더 무겁다.
우리는 돌고래를 보고 영리한 동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뇌가 인간보다 무겁다.
고래나 돌고래는 어차피 몸집이 커서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뇌와 몸무게의 비를 보면 조류가 인간보다 몇 배나 더 크고, 쥐가 인간과 비슷한 값을 가진다.
즉,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유전적으로 더 복잡하지도 않고, 더 큰 뇌를 가진 것도 아니다.
인간이 특별할 것이라 믿는 사람들에게는 좀 맥 빠지는 일일지 모르겠다.
기독교 국가 미국에서는 아직도 진화론은 창조론이라는 논쟁이 치열이다.
하지만, 이제 과학의 세계에서 진화론 없는 생물학은 뉴턴역학 없는 물리학이라고 보면 된다.
진화론도 과학 이론이니까 그 자세한 내용에는 논란이 있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인정하는 것 중 하나는 진화에 방향이 없다는 것이다.
진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유전자에 변이가 생겨야 하고 변이의 결과에 대해 자연 선택이 일어난다.
변이는 무작위로 일어나며 자연 선택은 그때그때 변덕스럽게 기준을 정한다.
따라서 에이즈 바이러스로부터 박테리아, 모기, 고등어, 닭, 침팬지, 인간에 이르기까지 현재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생명체는 오랜 세월 진화를 통해 선택되고 살아남은 고귀하고 특별한 존재들이다.
인간이 고귀하다지만, 우리는 정작 아프리카에서 비참하게 굶어 죽는 다른 고귀한 인간들에는 관심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종교나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수십만 명의 고귀한 인간이 다른 고귀한 인간에게 목숨을 빼앗긴다.
인간과 침팬지 사이의 유전적 차이가 작다고 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인간들 사이의 유전적 차이는 그 어떤 종에서 볼 수 없을 만큼 차이가 작다는 사실이다.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류 모두가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몇 사람의 자손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단 하나의 생명에서 출발하여 진화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따지고 보면 다 형제자매다.
이보다 더 놀라운 자연의 메시지가 있을까?
Alone again, Gilbert O'Sulliv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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