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미운 며늘 불쑥 던진 말에 상처받아, 저희도 나이들면 알겠지
영감, 잘 지내슈?
여기는 시방 추석 명절이라 어수선하다우.
세월이란 놈은 또 왜 이리도 잘 가는지.
입만 청춘인 짱순이 댁은 뜀박질 흉내를 내면서는 '우산 뽈트 달려가듯 세월이 간다'고 하더이다.
'우산 뽈트'가 뭔지 영감은 아슈?
또 그놈의 청승이라고 하겄지만, 내가 오늘은 이바구 좀 해야겄소.
그까짓 갱년기 국물에 말아먹은 지 십수 년이고, 하루하루 숨 붙여 사는 것도 기특한 칠순 늙은이가 암만해도 우울증에 걸렸나 보오.
해 저물녘 마루에 걸터앉아 있으면 나도 모리게 철철 눈물이 나고요.
허구한 날 바람이라 내 속을 숯검댕이로 태운 영감탱이, 산송장이라도 좋으니 아랫목에서 좀 더 뭉개다 가지 그새 갔나 싶습디다.
노망이 맞디요?
그래도 추석이니 자식들 만나 좋겠다고요?
좋지요.
떡두꺼비 같은 내 손주들이 좋지요.
자식, 며느리들은 어려워요.
갸들 머리에도 서리 내려 그런가, 해가 갈수록 말 붙이기도 힘드네요.
대문간 들어설 때부터 내가 아들, 며느리 눈치를 본다면 말 다했지 뭐유.
귀성길 차 안에서 다투진 않았나, 그까짓 차례가 뭐라고 돈 버니라 피곤에 전 아들 며느리가 아이들을 데불고 예닐곱 시간씩 고속도로에 갇히게 한 건 아닌가.
미리미리 음식 장만해놔야지 서둘렀어도 차례상 올리기 직전까지 잡일이 넘쳐나니 며늘애들 눈 맞추기 면구스럽고, 짜증도 나고요.
명절은 1년에 한 번만 치르면 안 되는 건지 염라대왕한테 좀 물어보슈.
지난 설엔 둘째 며늘애가 '기름진 명절 음식 누가 먹는다고 이렇게 많이 하세요?' 하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디다.
'누가 먹긴 누가 먹어, 니가 먹고 니 남편이 먹고 니 새끼들이 먹지 이것아!' 소리가 목울대를 넘어오는데, 꿀꺽 삼켰지요.
서울 올라갈 땐 동그랑땡 하나 안 남기고 들기름에 참깨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가는 주제에.
먹다 남은 과일까지 죄다 싸주면 그제야 얼굴에 웃음이 뽀얗게 펴져서는 '어머니, 또 올게요옹~.' 하고 자동차에 낼름 올라타는데 이뻐(?) 죽겄어요.
이래저래 퍼주고 나면 시에미는 김치에 물 말아 먹기 일쑤라는 것을 애들은 알까요?
나도 뒷집 짱순이 댁처럼 김치 담그고 고추장 담가 보낼 때 택배비에 수공비까지 에누리 없이 받아낼까 고심 중이라오.
삼팔광땡 시어머니 만난 줄도 모르고 투덜거리기는.
안 그러우?
그래도 몇 살 더 묵었다고 큰 며느리는 말이라도 따뜻하게 합디다.
그 목석 같던 며늘애가 음식 몇 가지는 알아서 만들어도 오고, 말끝마다 '무릎도 아픈데 좀 앉아 쉬세요.', '어머니 음식은 언제 먹어도 맛있어요.' 하는 소릴 다 할 줄 알고요.
일면식 없는 처녀들이 느닷없이 전화 걸어 '고객님 사랑합니다~.' 해도 가슴이 뭉클한데, 며늘애한테 그런 소릴 들으니 목이 다 울컥합디다.
더러 못된 시어머니도 있겄지요.
세상 변한 줄 모르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시어머니도 가다가다 있겄지요.
암만 그래도 배 속에서부터 며느리 괴롭히려고 작심하고 태어난 시에미가 있겄어요?
유세를 부려봤자 한물간 권력이요, 낼모레 저승길 떠날 신세인데 애교로 좀 봐주면 안 되나요?
제 아들 굶기나 싶어 며느리 집 냉장고 단속하는 시어머니도 별로지만, 명절이라면 도끼눈부터 뜨는 유식한 며늘들도 격은 없어 보입디다.
허구한 날 어린 자식 쥐 잡듯 하는 저희는 얼마나 잘난 시어머니 될란가, 저승 가서 지켜볼라고요.
그러게 물려줄 땅이라도 좀 있었으면 나도 큰소리치고 살 것 아니유.
살아 생전 뭐 하고 싸돌아다니느라 밭 한 뙈기를 못 사놨수.
거두절미하고, 저승길에 무사히 갔거든, 백수 된 우리 셋째 좋은 직장 구하게 해달라고 염라대왕님한테 빽 좀 써보슈.
마흔이 코앞인데 여태 제짝 못 찾은 우리 딸내미, 주름살 늘지 않게 틈날 때마다 좀 굽어살펴주시오.
참, 내년 추석은 큰아들네가 남영동 콘돈가 뭔가 하는 데서 지낸답디다.
음식은 저희가 장만할 터이니 날더러는 맨몸으로 오랍디다.
우리 손주들 좋아하는 깨송편 만들어서 이고 지고 갈라요.
영감도 정신 바짝 차리고 잘 찾아오시오.
알토란 같은 손주들 보고자프면 우산 뽈트처럼 씽씽 달려오시오.
날래 얼래 날아오시오.
추석 차례 과정을 배우는 결혼 이민 새댁
글 김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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