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조 전설' 나디아 코마네치
1.00!
전광판에 들어온 숫자 때문에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성미 급한 코치가 항의하려고 심판석으로 뛰어 올라갔다.
당황한 심판이 열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10.0, 10점 만점이란 뜻이다.
만점은 불가능하니 9.99까지만 나오도록 설계된 전광판 탓에 혼동이 생겼던 것이다.
14세 소녀는 관중의 환호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나디아 코마네치(Nadia Comaneci).
1976년 열린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이단 평행봉 연기로 올림픽 사상 최초로 10점 만점을 받은 체조선수, 고난도 공중돌기 기술에 '코마네치 살토'라는 이름을 붙인 체조계의 전설, 조국인 루마니아의 영웅이었으나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의 압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삼류 유랑극단을 전전한 비운의 여인….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살아온 코마네치는 지금 지적발달장애인들의 스포츠 잔치인 국제스페셜올림픽 위원회(SOI)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를 취재했다.
당신을 체조계의 전설로 만든 10점 만점의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훌륭했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심판들이 점수를 너무 잘 준 게 아닌가 싶었다.
물론 기뻤다. 하지만 그건 수많은 시간을 연습하고 무수히 떨어진 끝에 얻어낸 결과물일 뿐이다. 체조에선 누구도 운으로 우승하지 못한다. 연습에서 해내지 못했다면 실전에서도 해낼 수 없다."
현역시절 경기장에서 웃는 일이 거의 없어 '작은 바윗덩어리', '냉혈 벼룩'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자서전 '미래의 금메달리스트에게'에 '나는 좀처럼 울지 않는다.', '내 얼굴은 견고한 벽과도 같다.'라고 썼다.
정신과 의사라면 이 어린아이에게 어떤 커다란 억압이 있었던 게 아닌가 의심했을 것 같다.
"남들 앞에서만 울지 않았다. 상대에게 엉엉 우는 꼴을 보여 승리감을 맛보게 하고 싶진 않았다. 울어서 해결되는 일도 없지 않은가. 잘 웃지도 않았다. 나는 훈련하거나 경기하는 도중에는 웃지 않는다. 모든 것을 끝낸 뒤, 그래서 만족스러울 때 한번 웃는다. 성장 배경 때문이 아닐까. 사사로운 감정을 안에 담고 있어야지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었던 당시 루마니아의 사회적 분위기. 하지만 그런 나의 성격이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기계체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혼자 있을 때는 운다는 얘기인데.
"서른다섯에 결혼했고 마흔넷에 아기를 낳았다. 이제 겨우 네 살인데 세계 각국으로 출장이 많으니 아이를 집에 두고 떠나올 때 돌아서서 많이 운다. 나이가 드니 별것 아닌 일에 예민해지고 눈물이 난다."
아들 딜런(Dylan)이 체조를 하고 싶다고 하면 시킬 의향이 있나?
"체조? 하고 싶다고 하면 당연히 시켜야지. 힘들다고 못 하게 하는 건 직업을 갖고 싶어하는 딸에게 '결혼이나 하지 왜 힘들게 사느냐?'며 만류하는 것과 같다. 불가능해 보일수록 매력은 커지는 법이다."
당신의 체조인생에 늘 성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홉 살 때 처음 출전한 전국 선수권대회부터 실패를 맛봤다. 평균대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다. 그 참담함을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훈련했다. 76년 올림픽 이후의 슬럼프도 지독했다. 나를 정치선전에 이용하려는 정부가 코치 벨라와 떼어내 수도 부쿠레슈티로 불러올렸고, 해이해진 나는 폭식을 거듭했다. 재기할 수 없어 보이던 내게 벨라가 찾아왔고, 죽을 힘을 다해 다시 훈련에 임했다. 불어난 살을 빼는 것, 체조의 감각을 되찾기란 끔찍이도 고통스러웠지만 대가 없는 성공은 없었다. 그리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다시 금메달을 땄다. 내 최고의 경기는 76년이 아니라 80년 올림픽이었다고 생각한다."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루마니아 영웅이 된 당신은 온갖 루머에 휩싸였다.
대표적인 것이 독재자였던 차우셰스쿠의 아들 니쿠 차우셰스쿠와의 염문설이다.
"유명해지면 온갖 소문이 따라다닌다. 궁궐 같은 집에 산다, 열여섯 살 생일파티를 성대하게 치렀다는 둥 온갖 루머가 난무했다. 니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분명히 대답했는데, 다른 곳에 가면 또다시 묻는다. '다른 대답'이 나오길 기대하면서. 내가 대학 무용팀의 안무를 맡을 때 같은 건물에서 일했으니 니쿠를 알았던 건 사실이다. 같이 사진이 찍혔을 수도 있고.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
올림픽 영웅이었지만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자서전에 썼다.
마음만 먹었다면 명성을 이용해 부와 권세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부자가 되려고 체조를 한 게 아니다. '재주넘기'를 마음껏 하고 싶어서 여섯 살 때 체조교실에 들어갔다. 하늘 높이 치솟으며 무한한 공간을 가를 때의 느낌, 토대가 바위처럼 단단해야 어려운 기술들을 쌓아갈 수 있는 그 성취가 좋았다. 전 국민이 가난한 때라 나 또한 가난에 익숙해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일 먹을거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따뜻한 집, 그리고 누구도 나를 땅에 묶어둘 수 없는 '자유'였다. IOC 같은 국제조직에서 활동하면서 스포츠인으로서 내가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코치였던 벨라 카롤리가 미국으로 망명한 뒤 루마니아 정부는 수제자였던 나의 출국을 금지했다. 숨 막히는 감시와 통제, 도청과 미행 속에서 미쳐버리기 직전 망명을 생각했다."
1989년 당신의 망명을 도운 루마니아 출신 미국 시민권자 콘스탄틴 패니 때문에 당신의 미국 생활은 곤경에 빠졌다.
얄궂은 화장을 하고 삼류 유랑극단을 전전하며 서커스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서커스는 아니다. 콘스탄틴의 욕심으로 이상한 행사와 공연들에 불려다닌 건 맞지만 그걸 어떻게 그의 탓으로만 돌리겠나. 나의 잘못도 분명히 많았다. 나는 지금도 콘스탄틴에게 감사한다. 목숨을 건 망명길에 나를 헝가리로, 다시 오스트리아를 통해 미국으로 인도한 은인이었고, 뉴욕 공항에 내렸을 때 여기저기서 터지던 카메라 세례, 그 낯섦과 두려움 앞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은 콘스탄틴뿐이었다."
당신이 곧잘 '백마 탄 왕자'라고 표현하는 남편 바트 코너는 어떤 남자인가.
그 자신이 미국의 국가대표 체조선수였고 올림픽 금메달 3관왕이었다.
"콘스탄틴과 헤어진 뒤 절망에 빠져 있던 나의 손을 잡아준 사람이다. 다시는 체조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겠다는 내게 '스포츠에는 메달, 영광, 완벽을 넘어선 뭔가가 있다.'고 설득한 남자다. 지적발달장애인들의 스페셜올림픽에 헌신하게 된 것도 바트 덕분이다. 군중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연단에 홀로 서 있는 것보다 '나눔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손잡고 일하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
이름 '나디아(Nadia)'는 '희망'이란 뜻이다.
'코마네치'라는 성(姓)은 체조의 대명사가 됐다.
그 이름이 때로 버거울 때가 있지 않나.
"전혀! 나의 이름과 성취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스페셜올림픽을 통해 나는 매일매일 자신의 장애와 투쟁하며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을 본다. 그들이 내 삶에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1996년 루마니아에서 치러진 당신의 결혼식은 무척 성대했다.
대통령이 국가기념일로 선포, 모든 국민이 휴일로 즐겼을 만큼.
"분에 넘치게 크고 화려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은 나를 통해 한때 루마니아가 누렸던 영광, 미래에 다시 보여줄 수 있는 희망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찬란한 루마니아의 매력을 내 결혼식을 통해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루마니아 출신 작가 헤르타 뮐러는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은 무너졌지만, 그 잔류세력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조국 루마니아를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신은 어떤가.
"지금도, 미래에도 내 입에서는 '루마니아가 싫다.'는 말은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루마니아의 빛나는 성취와 뼈아픈 상실이 내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루마니아인들의 그 뻔뻔한 고집과 거짓말까지도 사랑한다. 그것이 루마니아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당신 부부와는 오랜 친구라고 들었다.
"1991년 미국에서 스페셜올림픽이 열리고 있었을 때다. 헬스클럽에서 바트와 운동을 하고 나오다 엘리베이터에서 아널드와 만났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춰 섰다. 5분, 10분이 지나도록 꿈쩍도 하지 않기에 내가 아널드에게 물었다. 당신 터미네이터 아니냐고. 그러자 아널드가 손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열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셋이 기어나오자 프런트 데스크 여자가 어안이 벙벙해서 우릴 쳐다보더라."
당신을 보면 '철의 여인'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불굴의 강인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살아가면서 '적'을 만들지 않는 겸손함이 더욱 대단하다.
"삶에 적을 만드는 것은 득이 되지 않는다. 친구를 가까이하되 적은 더 가까이해야 한다. 그래야 강해지고 행복해진다."
책을 통해 배운 것인가.
"아니. 인생을 통해 온몸으로 배웠다."
김윤덕 기자
Butterfly, Paul Mauri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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