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 III
‘승정원일기’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청와대 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오백 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후손들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이억오천만 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아니면 80년 걸린답니다.
이렇게 많은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선조의 문화유산입니다.
‘일성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 자, 반성할 ‘省’ 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왕이 쓰니까 그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 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럴 때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다음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으로 썼습니다.
국방,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와 교육에 관한 사항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백오십 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책들을 전부 우리말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다음에 영어로 하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다 번역합니다.
그리고 컴퓨터에 올린 다음 전 세계 주요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백오십 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천만이 되고, 십억이 되면 이 사람들이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사람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 하는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손 못 대고 있을 뿐입니다.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백 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이백 년에 한 번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이천 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면 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정문에 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역사 이천 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이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이천 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복사해서 기록관에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으로 리히터 규모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있었고 고려 시대에도 11회, 조선 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이천 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우리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그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알아보겠습니다.
세종이 등극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신하에게 묻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바른 일이라면 즉시 현장에서 해결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 12년 3월, 조정회의에 올렸지만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되었느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니까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해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오 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 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8,657표, 반대 7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올렸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구천팔백, 반대가 칠만사천 표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4,149표라고 하는 반대표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비슷해집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 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시행을 합시다.’라고 말했어요.
시범시행을 삼 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시행을 해 봐야 합니다.”
제기랄,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올렸습니다.
또 부결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일어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 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 시대에 정치를 그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시행을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 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으므로 조선이 오백 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 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 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라고 합니다.
조선 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는 고등법원 격인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 관찰사는 사법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 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으로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래서 조선이 오백 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인연, 이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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