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onian sea
미다스의 손
지중해의 따가운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HAPPY NINA’ 호는 점점이 수놓은 듯한 많은 섬 사이를 뚫고 이오니아해의 코발트 빛 바다를 미끄러지듯이 순항하고 있다.
아테네의 관문인 피레우스의 드라이 독까지 배를 갖다 놓으면 우리 승조원의 임무는 끝나게 된다.
그동안 정들었던 ‘HAPPY NINA’ 호와 작별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스 Pilot의 도선으로 피레우스 외항에서 독 앞에까지 무사히 안착하고 입거 대기를 위해 닻을 내린다.
입항 수속을 마치고 ‘HAPPY NINA’ 호를 인수할 그리스 인수팀과 독일 본사 해무 감독이 승선한다.
발전기 소리만 나고 조용했던 선내가 시장터같이 소란하다.
시끄러운 그리스 아저씨들.
그리스에서 온 새로운 통신장에게 인계인수한다.
역시 선박왕이라 불리는 오나시스의 나라 선원답게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배가 오래되었어도 독일 배라 송수신기 출력이 훌륭하다며 좋아하는 그리스 통신장.
서로 프로답게 긴말 필요 없이 장비 작동하는 법을 알려주고 인벤토리에 사인받고 인계인수 끝.
본사에 보낼 서류만 챙기고 나머지 서류는 파기한다.
본사 해무 감독이 갖고 올라온 매선 수당을 캡틴으로부터 수령하여 선원들에게 지급하고 사인을 받아 본사에 보낼 서류에 첨부한다.
캡틴과 1항사, 나는 전선 수당으로 1개월분 급료의 본봉에 해당하는 달러를 지급받고 내일 아테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날아가란다.
캡틴과 나는 해무 감독에게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스케줄을 물어본다.
남희 씨가 있는 독일로 갈 시간적 여유가 있는 가해서.
돌아오는 답변은...
어휴, 우리 셋만 교대하면 출항이란다.
좋다 말았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심정을 억누르고 우리가 승선할 ‘HAPPY LATIN’ 호의 주 항로에 관해 물어본다.
해무 감독은 느리면서도 또박또박한 영국식 영어로 차분히 답해준다.
독일을 모항으로 하는 중남미 부정기선이란다.
독일은 2, 3개월이면 한 번씩 들어온다고.
휴, 그나마 다행인가?
비행기 티켓을 받고 짐을 챙겨 정들었던 ‘HAPPY NINA’ 호의 갱웨이를 밟고 내려 통선을 타고 피레우스 부두로 향한다.
배에 남아 있는 선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거대한 그녀에게서 멀어진다.
그들은 며칠 본선에서 자고 교대 선원이 다 오면 비행기를 타고 취리히를 거쳐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비록 대부분의 선원이 계약 기간을 못 채우고 귀국하지만, 두 달 분의 급료에 해당하는 매선 수당을 챙겨가니 그나마 다행이다.
두 달 안에 다시 승선하게 되면 똔똔 내지는 공돈 버는 거지.
멀어져가는 ‘HAPPY NINA’ 호를 바라보는 내 목에는 로테르담에서 남희가 골라준 보라색 스트라이프 무늬 넥타이가 이오니아해의 상큼한 코발트 빛 바다에 어울리게 흩날리고 있다.
점점 가까워지는 피레우스와 아테네.
그리스 땅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나무숲이 조성될 수가 없어 멀리서 보면 은빛 도시 같다.
아르헨티나가 은의 나라라고 하던가.
그리스는 유럽 문화의 원류인 헬레니즘의 발상지로 그리스 신화로 대변되는 화려했던 영광을 뒤로하고 다시는 회생의 길을 걷지 못하고, 로마와 터키 그리고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온, 이빨 빠진 호랑이 축에도 못 들게 쇠락한 안타까운 나라이다.
작열하는 태양과 지중해성 기후는 그나마 올리브와 비루먹은 포도라도 자란다고 하는데 비옥한 토지가 부족하여 주민들은 일찍부터 해상무역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 국력이지만 그래도 6.25 전쟁 당시 불쌍한 동양의 작은 나라에 도움을 준 참전 16개국 중 한 나라이다.
잊지는 말아야지.
대리점이 수배해 놓은 승합차를 타고 우리가 하루 묵을 호텔로 향한다.
짐을 내려놓고 셋이서 가까운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는다.
오늘 하루는 일에 대한 아무런 부담이 없는 완전 자유의 날이다.
그리스 전통술인 오우조를 시켜서 양고기 케밥과 사딘으로 안주 겸 요기를 한다.
테이블 위에 놓인 오렌지 속이 핏빛처럼 빨간데 무척 달다.
한국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것을 이렇게 싸고 편안하게 먹을 수 있으니 이 맛에 배를 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앉은 자리 앞뒤로 보이는 창신동이나 경리단 골목같이 아기자기하고 좁은 골목들 사이로 분주히 보금자리로 드나드는 그리스 서민 군상들.
거미줄처럼 불규칙하게 이어진 골목에는 대대로 운영되는 상점과 기념품 가게, 오래된 레스토랑이 오밀조밀 모여 있고 길개나 길고양이가 사람을 피하지 않고 더불어 산다.
남희도 일 마칠 시간이 된 거 같아 혼자 담배를 물고 국제전화 부스로 들어간다.
오늘은 재수가 좋은 날인가 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다스의 나라에 와서 그럴까?
전화가 바로 연결된다.
“자기! 나 여기서 완전 스타 됐다.”
남희가 들떠서 신나게 말하는 환한 모습이 보인다.
“와! 어떻게?”
“응. 우리 촬영할 때 쓰는 메인 카메라 화면에 사람이 길게 보이는 거야. 그래서 촬영기사가 긴급 수리를 맡기려는 것을 내가 한번 보자고 했지. 자기 듣고 있는 거야?”
“응. 잘 들려.”
“그거 우리 배울 때 가변 저항기에 이상이 있는 거잖아. 그래서 뜯어봤지, 뭐. 어느 게 가변 저항기일까 하고 보니까 동그란 게 보이더라고. 그래서 스페어 부품을 찾아보니까 똑같은 게 있잖아. 납땜이야 간단한 거고. 어머머, 그래서 짠~ 하고 정상으로 돌아온 거 있지?”
“와우, 나미. 너 대단하다!”
“후훗, 뭐 보통이지. 요 기계치 아저씨들이 나보고 미다스의 손이래. 호호호.”
“그래에? 나도 조금 전에 미다스 손을 생각했는데...”
“응?”
서로 필이 통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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