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한가운데의 수에즈 운하를 일렬로 통과하는 선박들
수에즈 운하 앞에서 방황하는 유령선
반갑게 맞이하는 기존 선원들.
전에 다른 배에서 같이 승선했던 선원들이 몇 명 보인다.
뭐, 배 타는 우리들은 어디서나 만나고 또 헤어지고 그렇지, 뭐.
같은 회사 소속의 선원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귀국할 전임 통신장과 인계인수를 한다.
그리고 세 명의 신사들은 손을 흔들며 떠난다.
내일 아침에 Pilot 승선해서 일단 외항으로 배를 뗀다고 한다.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1항사와 전에 다른 배에서 같이 탔던 1기사가 노크를 하고 들어온다.
반갑게 하이파이브를 짜악~ 소리 나게 하고 냉장고를 열어본다.
캔 맥주와 마른안주가 보여 꺼내서 같이 앉아 마신다.
‘HAPPY LATIN’ 호는 라틴 아메리카를 주로 간다기에 대화는 남미에 대한 이야기로 왔다 갔다 한다.
‘아르헨티나는 백 년 전에 지하철이 다녔는데 우리는 뭐 했느냐?’로 해서 ‘공기가 좋아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데 지금은 지명을 바꿔야겠다는 둥, 남미에 오래 산 사람은 아무리 심각해도 농담을 잃지 않는다는 버전에서 남미 세뇨리따들은 어렸을 땐 기가 막히게 예쁜데 나이 들면 왜 하마 비슷한 덩치가 되는냐는 둥’ 기승전녀 이야기를 하며 맥주 깡통을 비웠다.
1항사는 그래도 눈이 말똥말똥한데 나는 맥주만 마시고 있다가 드디어 하품을 시작한다.
1기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희의 환영과 함께 전에 수에즈 운하 앞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야! 오늘 저녁 반찬 뭐냐?"
선미에서 오징어 낚시를 하고 있던 갑판장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갑판부원에게 묻는다.
“에이, 오징어 국에 양배추밖에 없어요.”
갑판부원의 대답에 갑판장의 양미간이 찌푸려지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우이 씨! 그걸 먹고 어떻게 일을 하라고, 젠장. 이 노무 그리스 선주 놈들은 한국 선원 알기를 개똥보다 못하게 여기니...’
벌써 한 달째, 내가 타고 있는 화물선은 수에즈 운하 앞에서 톤당 3달러 정도 하는 운하 통행료와 대리점 비를 내지 못하는 선주 형편 때문에 지중해상의 이집트 ‘Portside’ 항에 볼모로 잡혀있었다.
운하 통행료는 선종, 톤수와 화물 적재 여부에 따라 다르다.
주부식도 바닥이 나고 배 바로 밑에서 낚시만 넣으면 잡히는 오징어를 낚아서 국 끓이고, 무치고, 회를 떠서 반찬 대신 먹는 등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김치 떨어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지나가는 이집트 상인의 작은 쪽배에서 양배추를 사다가 고춧가루 없이 소금에만 절인 하얀 양배추를 먹고 있었다.
그나마 안 굶는 게 다행이다.
기름도 다 떨어져 가고 있어 발전기를 끄고, 밥할 때만 돌린다.
급기야 빈 침실의 침대를 뜯어다가 나무 불을 펴 밥을 해 먹어야 할 판이 되었다.
야간에 선박 충돌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박등을 켜야 하는데 이것도 기름이 떨어져 발전기를 돌릴 형편이 안 되어서 호롱불을 켜 들고 선수와 선미에서 당직을 서고 있다.
유령선이 따로 없었다.
과거부터 선박왕 오나시스와 함께 주도적으로 중고선 거래를 하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박을 보유한 국가로 부동의 세계 선대 가치 1위를 차지하는 해운 왕국을 영위하던 그리스 선주들이 해운 불경기에 하나둘씩 유동성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다.
그 영향이 본선에도 미치는 모양이다.
세상에 대리점 비를 얼마나 안 주었으면 화물을 가득 싣고 운항하는 배가 해상 미아가 되어 수에즈 운하 앞에서 이렇게 거지같이 잡혀 있다니, 화주에게 지불해야 할 클레임도 만만치 않을 텐데.
선원들의 불만도 차츰 고조되어 통제가 잘 안 되고, 상급자의 말이 잘 안 먹힌다.
잘 먹으려고 배를 탄다는 선원도 있는데 주부식이 다 떨어져 가고 있으니 난감한 상황이다.
매일같이 그리스 ‘Athinai’ 무선국에서 선주의 전보가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기를 한 달째, 이윽고 전보 한 통이 온다.
대리점과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니 기름과 주부식을 싣고 운하를 통과하라는 간단한 전보이다.
공치사 받을 일도 없지만 미안하다는 이야기 한마디 없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그리스 선주 놈들.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유대인 ‘샤일록’도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기름과 주부식을 싣고 운하를 향해 출항하려는데 이번에는 한국의 송출회사에서 선주로부터 선원들 급료를 석 달째 못 받고 있다고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항해하지 말고, ITF에 이 상황을 고발하라는 긴급 텔렉스가 온다.
국제 운수 노조 연맹에서는 임금체불을 최우선 처리한다.
애고, 돈 벌려고 배를 타서 이역만리 낯선 곳에서 파도와 외로움과 싸우고 먹는 거 부실한 거야 참겠는데 월급이 안 나온다니!
이를 알게 된 선원들의 분위기도 살벌해진다.
지금 당장 하선하겠다는 선원들도 나오고, 당연히 일은 안 하고 이쪽저쪽에서 모여서 웅성대고 있다.
잘못하면 폭동이라도 일어날 판이다.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부서장과 직장급 이상의 긴급회의가 열리고 대책을 논의했으나 선주가 돈으로 해결할 일에 무슨 대책이 있겠는가.
일단 동요하는 선원들을 달래기 위해 캡틴이 전 선원들을 집합시켰다.
‘이렇게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본선 책임자인 선장 본인도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을 시작하는데 평소 불평불만을 잘 내뱉던 기관부 선원 한 명이 욕설과 고함을 치며 집에 보내 달라고 소동을 피웠다.
군기반장 격인 1항사와 몇몇 간부 선원들이 간신히 말려서 제지했다.
전체회의에서 별다른 소득이 있을 수 없었고 이런 상황을 송출선사에 타전하였더니 부산에 소재하고 있는 선원 맨닝 회사에서 선주로부터 임금을 받지 못해도 선원 가족에게는 회사에서 월급을 지불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회사 지시에 따르라는 회신에 선원들이 안도하고 잠잠해진다.
선원들은 승선 중에 하루 8시간씩 일을 해서 월급 값을 해야 하는데 통제가 안 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을 시키고, 또 일할 형편이 안 되어 삼삼오오 낚시한다.
그런데 본선이 닻을 내린 곳은 다른 고기는 하나도 안 물고 오징어만 낚인다.
질리도록 먹고, 남은 것은 배를 따서 철사에 끼워 배 난간에 차곡차곡 걸어 놓았다.
일 주일여 만에 선원들 급료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부산 회사에서 출항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동안 27명의 선원이 일은 안 하고 매일 낚아서 말린 오징어는 선미 난간을 다 덮고도 남아 선실 복도에도 빈틈없이 걸려있어서 처치 곤란할 정도였다.
그래서 항해 중에 두고두고 오징어를 먹고도 남아, 귀국하는 선원들에게 어머니가 아들 딸에게 보따리를 바리바리 챙겨주듯이 오징어를 몇 축씩 싸주었다.
그때 마른오징어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나는 요즘 이도 부실하고 오징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1기사가 졸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운다.
“어이, 국장님! 피곤한 모양인데 우린 갈 테니까 침대에서 애인 꿈 꾸면서 편히 주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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