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바다 그리고 배
항해일지 중 고래 잡으러
“야, 은여바! 과대 어디 있냐?”
쉬는 시간에 강단에 올라 온 남희가 동기들을 쳐다보며 묻는다.
“몰라. 아까 식품영양학과 과대 소미 누나 왔다 간 거 같은데.”
“아니, 과대 얘는 누가 애늙은이 아니랄까 봐 복학생 언니들하고만 논대.”
투덜거리며 계속 말한다.
“얘들아. 이번 방학에 우리 구름과 별 보러 설악산으로 해서 동해 바다 가는 게 어떻겠니?”
제 할 일 하던 동기들이 멈추고 조용해지며 모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희를 쳐다본다.
“뭐, 무파마 라면하고 먹을 거 다 싸 들고, 텐트 몇 개 갖고, 기차 타고 동해로 가자. 설악산과 경포대, 좋지?”
동기들이 함성을 지르며 웅성댄다.
“그럼, 갈 사람?”
“저요~, 저요~!”
모두 손을 든다, 나만 빼고.
남희가 고함을 빽 지른다.
“야!~ 짜샤! 넌 왜 손 안 드는데?”
먼 산을 쳐다보고 딴청 하는 나.
“저것이 또 염장 지르네. 백 년 묵은 구렁이가 들어간 영감 모양. 야, 짜샤! 갈 거야, 안 갈 거야?”
“응, 갈 거야. 식품영양학과 애들하고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동해 바다 가기로 약속했어.”
“뭐라고라? 저것이 맛이 갔네. 너 무슨 관데?”
“내비도. 놀러 가는 데 뭔 과를 따지고 난리냐? 내 맘이지.”
잠자코 있던 복학생 세부 형님이 검은 안경을 잡수고 천천히 꼿꼿하게 일어서며 말한다.
보디 가드 격인 다른 복학생 벤허 행님도 같이 일어서서 문신한 팔로 팔짱을 낀 채 주위를 훑어본다.
마치 혁명 당시 종규 형이나 지하철 형같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아그들아, 그럼 식영과랑 걍 같이 뭉치자. 그럼 남녀 쪽수도 비슷하고 더 재미있겠다. 그리고 나미와 안경쟁이 꼬맹아. 느그들은 이 좋은 세상에 뻑하면 싸우냐. 전생에 뭔 웬수라도 졌냐?”
공포 분위기에 쫄아서 찍소리도 못하는 남희와 나.
수업 종이 울리자 여행한 사람이나 배 타는 사람은 배워야 할 ‘세계 교통 지리’ 빈자무적 교수님이 조명을 받으며 무대 아니 강단에 올라오신다.
애고, 결국 그렇게 같이 갈 건데 그땐 왜 그렇게 평행선을 달렸는지...
아침 7시에 알렉산드리아 Pilot이 ‘HAPPY LATIN’ 호에 오른다.
닻을 올리고 아름다운 알렉산드리아 항을 뒤로한 채 뱃고동을 힘차게 울리며 출항한다.
떠나는 배는 마도로스와 함께 항구에 늘 사랑과 그리움을 남기고 사라진다.
선주로부터 이탈리아 나폴리와 사보나항으로 향하라는 지시를 받고 선수를 300도로 바꾼다.
한창 화물 수배가 되는 모양이지.
모두 어지러운 선 내외를 정리하다가 식사 시간이 되어 하나둘씩 식당으로 모인다.
나도 출항 전보를 본사에 날리고 식당으로 향한다.
오늘 메뉴는 소고기뭇국에 오징어무침이다.
안 선장님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린다.
“어이, 1기사! Cinnamon과 Sweet basil 들어간 따뜻한 레드와인 한 잔 할런가?”
“끓여 먹는 비노도 있어요? 전 그렇게 살균한 포도주는 안 마셔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1기사를 보고 1항사와 나는 웃음을 터뜨린다.
캡틴이 말을 이어간다.
“어이, 이탈리아에서 남미로 가는 수출 화물이 많지 않단 말이야. 우리 배가 자동차 겸용선이니 차와 중장비 싣고 뻬루 가는 거 아닐까? 지금 뻬루는 후지모리가 들어서고 전국이 공사판이라던데... 아이스크림 파는 차도 람보르기니라니까.”
오징어를 짭짭 씹던 1항사가 갑자기 캑캑거린다.
“네? 캑캑... 선장님, 뻬루라고라? 흐미야...”
갑자기 잉카 모드로 바뀌는 1항사.
“햐~ 뻬루 가면 노란 잉카 콜라는 원 없이 먹을 건데...”
캡틴이 혼자 중얼거리는 1항사를 힐끗 쳐다보고 웃으며 나에게 묻는다.
“쯧쯧~ 1항사도 이제 누굴 닮아가는구먼, 국장은 남미 어딜 가면 좋겠소?”
“독일이요!”
오징어 다리를 입에 넣으면서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허공을 쳐다보며 혼자 미소짓고 야무지게 말하는 나.
돈키호테 형님은 미쳐서 살다가 제정신이 드니 돌아가셨다는데...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삼등 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간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 아침에 일어나면 잊히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우리들 사랑이 깨진다 해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는다고 해도
모두 가슴 속에는 뚜렷이 있다 한 마리 예쁜 고래 하나가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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