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이야기

살생의 추억 y 찻잔, 노고지리

부에노(조운엽) 2017. 1. 1. 06:07

 

 


훈련 중인 여군 부사관 후보생

 

 

 

살생의 추억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 살생의 추억이 있는데 사람 죽인 이야기는 아니고, 파리 한 마리 못 죽이던 글쓴이가 이국에서 연말연시를 지내면서 군대 추억이 기억나 자판을 두드려 본다.

 

글쓴이는 여름은 덥고, 겨울에는 몹시 추우면서 눈도 많이 오는 분지 도시인 T 시에서 군대생활을 했다.

주간에 초병 근무를 서면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수시로 변하는 멋진 구름을 보고 감동했고, 겨울에는 온 천지를 하얗게 만든 순백의 눈을 보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살아있는 것에 감사했었다.

 

그런데 영내에 있는 이백 고지에서 보초를 설 때 산토끼가 종종 눈앞에 지나다니는 게 아닌가.

당시 한창 먹을 나이에 군대에서 주는 것만으로는 항상 허기를 느낄 때라 저것을 어떻게 일용할 양식으로 만들까 궁리를 했다.

 

그때 점호 끝나고 심심한 선임들이 종종 반합에 라면을 끓여 됫병에 담긴 소주를 마시곤 했다.

야간에 불을 피운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숟가락 두 개에 전기를 연결해 라면 수프를 전해질로 삼아 몇 분 만에 라면을 끓였다.

젓가락은 싸리 빗자루에서 가는 놈 몇 개 꺾어다가 군복 바지에 쓱 문대고 먹는 거였는데 하여튼 맛이 기막히게 좋았다.

하긴 돌도 소화할 때였는데 말이다.


추운 겨울에 보초 서고 꽁꽁 얼어서 내무반에 돌아오면 선임들이 술 마시다가 고생했다고 반합 뚜껑에 막소주를 가득 따라주었다.

그리고 안주는 라면 한 가닥.

만약 두세 가닥을 집었다가는 중고참이 눈에 힘을 주고 째려보면서 요즘 졸병 놈들이 군기가 빠져서 어쩌고저쩌고......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당시 일요일 점심마다 주는 라면은, 사리는 스팀에 찌고 수프는 따로 멀겋게 데워서 줬으니 뭔 맛이 있었겠는가.

나중에는 사리와 수프를 같이 넣었는데 수백 개의 라면을 한 번에 끓이면서 어떻게 안 퍼질 수가 있겠나.

그래서 어쩌다 사제 라면을 한 번 끓여 먹으면 얼마나 맛이 좋았던지 정말 감동이었다.

 

글쓴이가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살 때 그 라면이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몇 달을 끙끙 앓다가 유효기간을 한참 넘긴 라면을 중국교포에게 얻어서 끓여 먹고 감격했다는 거 아닌가.

그때 올렸던 단돈 오백 원의 행복이란 글을 DAUM 세계엔n에서 메인에 올려주어 한 팔만여 명이 보고 갔나.

그 글을 읽고 어떤 네티즌은 눈물 젖은 라면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까지 댓글에 썼다.

 

각설하고 그래서 군대 전화선인 낡은 삐삐 선을 주어다가 올가미를 만들어 초소 근처의 토끼가 다닐만한 철조망 밑에 여러 개를 놓았다.

새벽에 점호가 끝나면 밥도 안 먹고 올가미 놓은 곳에 부리나케 뛰어 올라갔는데 과연 밤새 토끼가 몇 마리씩 걸려있는 게 아닌가.

오매, 오매~ 신나는 거!

 

그런데 그걸 일용할 양식으로 만들려는데 연장이나 양념이 변변한 게 있나.

연필 깎는 작은 칼로 껍질을 벗기고 살점을 대충 발라 주전자에 소금과 고추장만 넣고 푹푹 끓였다.

군대 고추장이란 게 빨간 것이 아니고 노란 색깔에 매운 끼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그런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배고파 부대원들은 글쓴이를 잘 만난 덕에 맛있는 토끼고기로 춥고 긴 겨울을 아주 행복하게 지냈는데…….

 

좋은 일도 다 일장춘몽이라고 군대에서 매주 있는 내무사열 때 기어코 사달이 벌어지게 되었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내무사열이라는 게 개인 몸과 복장 청결뿐 아니라 부대 모든 곳을 정리 정돈하고 지휘관의 검사를 받는 건데 산토끼를 해체하던 발전기 창고 구석에서 중대 인사계 선임하사에 문제의 토끼털이 몇 가닥 발견된 것이었다.

그 선임하사는 그곳에서만 이십여 년 넘게 근무한 부대의 산증인이었던 것이다.

자기들도 예전에 그 이백 고지에서 노루며 토끼를 잡아먹었다고 종종 무용담을 늘어놓았던 사람인데 추억의 토끼털이 맛도 못 본채 눈앞에 보였으니…….

 

이 자식들 봐라라며 내무사열 준비 불량이라는 명목으로 전 중대원을 완전군장 시켜서 연병장 뺑뺑이를 돌리는 것이었다.

~ 내일모레 제대할 선임까지 같이 뺑뺑이를 도니 열 받은 성질 고약한 선임 입에서 상소리가 터져 나오고 중고참들은 안절부절못하고 뛰고 있었다.

결자해지라고 원인 제공한 조 일병이 사태를 수습해야 할 상황이었다.

젠장, 드실 때는 좋다고 처자시더니 이깟 체력 단련하는 걸 고깝게 생각하다니…….

숨을 헉헉대며 뺑뺑이를 돌다가 내무반장에게 인사계를 만나서 해결하고 오겠다고 말하니 고개를 끄떡했다.

 

대열에서 빠져나와 대대장 관사 부근의 초소에서 사람이 잘 안 다니는 후미진 곳 나무 높이 숨겨놓은 토끼 몇 마리 중 세 마리를 갖고 나오다가 지나가는 대대장 차와 딱 마주쳤다.

상상해보라.

철모 쓰고 완전 군장에 소총을 메고 게다가 어깨 위에 죽은 토끼를 몇 마리 걸고 땀에 범벅된 군인 아저씨의 얼빠진 듯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영락없는 맹구 포수 아닌가?

그 상태에서 또 다른 이 위기를 벗어 날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얼른 포기하고 대대장 차에 상납해야지.


다시 돌아가서 나머지 토끼를 갖다가 중대 인사계에 바쳤다.

당근, 선임하사 입이 좍 벌어지고 얼차려 뺑뺑이는 끝났는데…….

 

잠시 후 인사계에서 다시 호출이 있었다.

조 일병. 너 뭘 잘했다고 대대장 부관한테서 전화가 와서 널 모범사병으로 포상휴가를 보내라고 한다니?

 

무서울 땐 팔공산 멧돼지처럼 사납고, 인자할 땐 엄마같이 한없이 부드러웠던 그 인사계 이종묵 상사님, 지금 살아계신다면 칠레 안드레스 어르신 또래나 되셨으려나…….

 

 



 

 찻잔, 노고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