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면 생각 나는 것
내 머리에 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강렬한 포스는 어느 시월에 구 소련 노보로시스크 항에 갈 때이다.
중국 어느 항구에서 곡물을 싣고 독도를 지나 구 소련을 향해 갈 때였다.
한국은 아직 가을이 무르익을 때였는데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앞이 안 보였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눈보라가 배 앞을 가로 막았다.
앞이 안 보이니 레이더만 보고 항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노보로시스크 항에 도착했을 땐 항구가,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다 하얗게 꽁꽁 얼어있었다.
남미에서 사는 이 년 동안 참 눈이 많이 보고 싶었다.
산티아고 데 칠레에서는 안데스의 만년설이 늘 보였지만 내 손에 만져지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해발 삼천여 미터에 있는 뽀르띠죠 스키장에서 봤던 내 키 보다 더 높이 쌓인 눈도 어딘가 예전의 그런 눈이 아닌 것 같았다.
최근 캐나다에서 눈을 봤다.
정말 징그럽게 눈이 많이 왔다.
한 이틀 오면 온 천지가 순백이었다.
그리고 누군가 눈을 치웠다.
차가 겨우 다닐 만하면 또 눈이 왔다.
그러길 두 달 동안 했다.
내 평생 본 눈 보다 더 많았던 것 같다.
이건 정말 낭만이고 뭐고 재해였다.
TV를 보면 비행기가 결항 되고 차가 눈길에 사고가 나고 사람이 다치거나 죽었다.
며칠 전 캐나다에서 홍콩으로 갈 때 싸이베리아를 거쳐 왔다.
비행기 아래 보이는 싸이베리아는 그저 하얬다.
산이고 강이고 윤곽만 보였고 그저 하얬다.
사람 사는 곳은 보기 힘들었다.
방금 내가 있는 한국에 눈이 왔다.
아마 올해 마지막 눈이 아닐까 생각 든다.
친구 준우를 바래다주면서 보는 눈.
그래, 바로 이거였어.
내가 보고 싶은 눈은...
발자국도 생기고,
눈싸움도 하면서,
눈사람도 만들고,
눈과 함께 우리가 같이 공존하는...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눈...
눈으로 인해 모든 것이 내 눈 앞에서 사라지고,
눈이 우리를 지배하는 그런 것이 아니야...
2009. 2.19
Tombe la neige(눈이 내리네), Claude Ci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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