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ther of mine, Jimmy Osmond y 이젠 엄마 사랑해요!

부에노(조운엽) 2016. 9. 10. 14:29

 

 

 

 

 

이젠 엄마 사랑해요!

 

 

“아줌마, 많이 드릴게 사 가세요!” 

동네 시장 골목의 한 모퉁이에 자리 잡은 울 엄마 반찬가게. 

어제는 사 가라는 소리가 입안에서만 맴돌다 말더니 오늘은 옆자리에 앉았던 생선 파는 아줌마가 외쳐대는 소리를 듣고 용기를 얻어 목청을 가다듬어 눈길을 주고 지나가는 아줌마들을 부르기에 온 힘을 쏟았다. 

겨울에도 눈을 구경하기 힘든 부산 날씨지만, 매서움을 몰고 오는 자갈치 바닷바람은 구석진 내 자리까지 갈기갈기 파고 들어 몸을 더 움츠리게 했다. 

작고 낡은 석유 난로가 옆에 놓여 있긴 했지만 나는 일부러 켜지 않고 웅크린 채로 앉아 있었다. 

왜냐하면 엄마가 준비해 놓은 갖가지 김치와 장아찌 등을 무침해 놓은 반찬들이 난롯불에 빨리 익어버리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엊그제 맹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하셨기에 앞으로 1주일 간은 반찬을 만들 수 없다. 

이제야 나는 김치 하나 제대로 담글 수 없는 못난 딸임을 깨닫고서 후회하고 있다. 

 

사실 우리 엄마는 나를 비롯한 3남매를 낳으신 진짜 어머니는 아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되던 해 봄, 지병을 앓고 계시던 엄마는 개나리가 갓 꽃을 피울 무렵 그만 눈을 감으셨다. 

그리고 내가 고2가 되던 해 지금의 엄마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셨다. 

흔히 남들도 그렇듯이 새어머니와 우리들 사이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원인 제공은 항상 우리들 쪽에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엄마가 들어오시고서 겨울을 나던 그 때, 나는 학교에서 공부한다는 핑계로 매일 늦게 돌아왔고 또 집에서 머무르는 것도 잠시, 독서실로 들어가 새벽을 지새우곤 했다. 

 

고3이라 공부도 공부였지만 되도록 새어머니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학교에서 먹으라고 점심 도시락과 함께 과일이랑 우유랑 어쩔 땐 쓰디쓴 보약까지 되는대로 많이 싸서 작은 나의 도시락 가방은 가득 부풀어 있었지만 나는 애서 본체만체 그냥 대문을 휭하니 나가버리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 엄마는 도시락을 들고 뛰어 나오셨지만 나는 눈에 띄지 않으려고 얼른 이웃집 담 뒤로 숨어버리곤 했다. 

그리고는 서럽게 울었던 기억도 난다. 

 

동생들은 새엄마를 거리낌 없이 아줌마라 불러댔다. 

나는 그렇게까지 부르지 않았지만 동생들의 언동에 동참이나 하듯 잠자코만 있었다.

 어쩌다 아버지께서 들으시면 그날 동생들은 혼쭐이 났다. 

그러나 동생들은 더 악을 섰다. 

아줌마를 아줌마라 부르는데 뭐가 잘못됐냐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호칭도 붙이지 않은 '저기요~'라고 말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새엄마 눈치 보느라 책상 옆에 붙여 두었던 돌아가신 엄마 사진을 떼어 일기장 속에 고이 감춰버렸고, 새엄마를 볼 때마다 몰래 훔쳐보는 사진 속의 엄마 얼굴이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린 동생들처럼 새엄마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의 무언의 반항과 심적인 방황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고3, 나는 또 하나의 갈림길에서 인생의 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속으로는 대학의 푸른 잔디와 축제, 캠퍼스 생활이 좋아 보이기도 했지만, 빨리 돈을 벌어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진학을 포기하려 들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아버지보다 더 열성적으로 반대하셨다. 

나는 못이기는 척 진학을 선택했고, 엄마는 내가 시험에 붙음과 동시에 조그마한 반찬가게 차릴 준비를 서두르셨다. 

비싼 등록금 마련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한 방책이었던 것이다. 

 

당신은 낡은 스웨터만을 걸치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검소하게 사시면서 내가 학교에서 카니발이나 축제가 있다고 말하면 옷이며 용돈까지 빠짐없이 챙겨 주셨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감사하단 소리 한 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얼마 전 엄마가 배를 부둥켜 안고 아픔을 호소하실 때, 나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면서 눈물까지 왈칵 쏟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가슴에 맺혔던 엄마라는 소리를 크게 외치면서 이웃집 아저씨 등에 업혀 나가는 엄마를 지켜 보았다. 

다행히 엄마는 맹장염으로 1주일 간의 입원이면 완쾌되신다 한다. 

 

엄마의 갑작스런 입원으로 집안에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아픔은 사라져 버린 듯 전에 없던 고요함까지 느껴진다. 

돌아가신 엄마 사진은 앨범 속에 끼우고 손이 닿지 않는 책장 위로 진열해 두었다. 

이젠 울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엄마가 퇴원하면 당장 김치 담그는 법부터 배울 생각이다. 

새벽녘부터 일어나 언제나 혼자서 모든 반찬을 담그시고 조리하시던 엄마의 일손을 엄마의 하나 뿐인 딸인 내가 도와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지면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흔하지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남기고 싶다. 

“엄마, 사랑해요. 이젠 당신의 착한 딸이 되겠어요!”


출처 : 인터넷 좋은생각 사람들 김희영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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