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듣던 라디오
라디오는 내 친구
지금 생각해봐도 참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어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고모, 삼촌, 형들은 명문 중고교에 대학까지 한 번에 턱하니 붙어서 잘 다니고, 공부가 조금 안 따라주면 연대장에 학생회장에 잘들 나가더만, 나는 그것도 고교 입시에 줄줄이 떨어져 재수를 해야 할 형편이었다.
제일 친한 친구 준우도 하얀 복(福)자가 선명한 배지를 달고 막내 삼촌 후배가 됐고, 숙이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생각해서 막내고모가 나온 배꽃고녀를 가려다가 수재들이 들어가는 S여상에 들어가고, 안이도 숙명고녀에 합격했다.
이거 기가 막혀서 자다가도 깨, 봉창 두드릴 일이었다.
부모님이고 다른 가족들도 상처 받고 고개 숙이고 있는 막내에게 아무 말도 안 했다.
할머니가 공장에라도 다니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아무도 대꾸가 없었다.
헉~ 내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야만 하다니...
엄청 변한 안양역
그렇게 해서 할아버지가 안양 비산동에 집을 짓고 있는 곳에 유배 아닌 유배를 갔다.
할아버지는 참으로 기술이 좋으셨다.
일꾼도 별로 쓰는 것 같지 않은데 며칠 자고나면 새 방이 뚝딱 생기고, 땅 좀 파면 조금 후에 지하실이 자리 잡고, 또 연못이 나왔다.
정말 마법의 손이셨다.
나는 학원 등록을 하고 재수를 했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그때 재수할 것이 아니고, 할아버지께 목수 기술을 배웠으면 내 인생 참 재미있게 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
아직 전철이 생기기 전이라 광화문 가는 유진 여객 104번 버스나 통근열차를 타고 종로 2가에 있던 대일학원에 학원비만 면제 받는 장학생으로 다녔다.
버스가 늘 만원이라 미어터져서 완행열차를 타면 이건 너무 살벌했다.
모자에 설탕물 먹여 삐딱하게 쓰고 나팔바지 입고 다니는 고등학생들이 많이 설치고 다녔다.
이에 부응하게 교복 치마 단을 올려 무릎이 보이게 하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째려보는 여고생들도 여럿 있었다.
사복 입고 머리 기른 나는 어정쩡했다.
대학생 같기도 하고 얼굴은 어리고... ^^
어디 가나 숨 막히는 그때, 안양 집에 돌아오면 밤에 하는 라디오 음악 프로 '별이 빛나는 밤에'라든지 김세원 씨가 진행하던 '밤의 플랫폼' 등은 어린 나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전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보내온 엽서를 읽어주고 신청곡을 틀어주며 진행하던 음악 프로들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가요는 잘 안 틀어주었지만 어쩌다 양희은 선배나 포크송은 가끔 나왔다.
그때 임아영의 '미련'을 처음 들었다.
한양대 다니던 학생 가수의 청아한 목소리는 불쌍한 고입 재수생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당시 신중현 사단에서 엄청 잘 나가던 김추자 테러 사건이 나고 얼마 후에 그녀가 잠적하고, 김정미와 임아영을 그 자리에 메우려고 키우고 있었다나.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리 빛을 보질 못한 거 같다.
나중에 장현 씨가 리바이벌한 '미련'이 대중에게 더 알려졌다.
그리고 그때 라디오를 틀어놓고 그냥 잔다고 할아버지께 가끔 꾸중을 들었는데, 신군부 등장하고 사람들 많이 사라졌을 때, 내 할아버지도 소식이 끊긴 아픔이 있다. ㅜㅠ
2009년 12월 20일
추억의 비산동 개울
임아영의 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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