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코트에 서면 가슴이 뛴다
2m 3cm 장신이 내리꽂는 시속 120km의 속사포.
1995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득점왕을 거머쥔 한국의 왼손잡이 공격수에 전 세계 이목이 쏠렸다.
그 후 세계 최고 핸드볼리그인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최초의 동양인으로 그가 이룬 기록은 실로 대단하다.
득점왕만 여덟 차례, 2,908골로 최다 득점 기록까지 갈아 치운 것.
독일 빌트 지는 'Korea'가 아닌 'Torea(tor는 독일어로 골이라는 뜻)'에서 왔다고 소개할 정도였다.
유럽에서는 핸드볼이 굉장히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독일에만 삼천여 개의 팀이 있을 정도로 활성화되었고, 만 오천 석 규모의 홈 경기장엔 매 경기 관중이 가득 찬다.
"정말 뛸 맛 나요. 관중의 열광적인 응원에 가슴이 뛰어, 점프 요만큼 뛸 것도 이~만큼 뛰게 돼요. 그러니 하위팀의 홈경기에서 1등 팀을 이기는 일이 비일비재하죠. 독일에서 선수 생활하는 동안 우승과 거리가 멀었는데, 함부르크에서 뛰며 2007년 유럽컵에서 우승했어요. 보람이 컸습니다. 우승도 우승이지만 수많은 시민이 시청 광장에 모여 축하하는 문화가 부러웠어요."
독일 분데스리가의 살아있는 전설 윤경신 선수
공을 잡아 보니 희한했다.
농구나 축구공처럼 크지도 않고, 야구나 탁구공처럼 작지도 않은 게 참 어중간했다.
한데 그게 맘에 쏙 들었다.
그 생소하고 특이한 크기에 묘한 호기심이 일었고, 손으로 하는 운동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서울 숭인초등학교 4학년에 특활반 편성 때 낯선 핸드볼을 택한 이유다.
일반인들이야 놀이로도 하지 않는 방치된 종목이었지만, 이런저런 조건들이 마음을 흡족하게 하니 천생 핸드볼 선수 하라는 팔자였나 보다.
숭인에는 핸드볼 팀이 없었다.
특활반 활동이 전부였다.
그래도 선생님께서 재밌게 가르친 덕분에 매주 한 번 있는 특활시간을 아주 즐겁게 보냈다.
그해 늦가을 어느 날 선생님께서 불러 숭덕초등학교 핸드볼 팀 창단 소식을 전하면서 '제대로 한번 해 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왠지 모를 의욕에 선뜻 대답하고 전학을 감행했다.
마지못해 허락해 놓고도 어머니의 걱정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숭덕을 다니자면 20분씩 버스를 타야 했고, 그나마 집에서 바로 가는 게 없어 갈아타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매일 네 번씩 버스를 타야 하니 불안한 건 당연지사.
게다가 몸이 약해 늘 안쓰럽던 녀석 아니던가.
학창시절 핸드볼 선수로 뛰었던 어머니는 하필 비인기 종목을 선택한 아들의 속내도 맘에 안 들어 했다.
어쩌면 아들이 핸드볼 얘기 꺼냈을 때 '참 별걸 다 닮는다.' 싶어 뜨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5학년 초 전학할 때 키가 1m 60으로 또래보다는 큰 편이었죠. 그런데 다른 데서 스카우트돼 온 한 친구는 1m 73이었어요. 그래도 운동 느는 속도는 제가 가장 빨랐죠. 특활시간에 기본기 배우며 손 감각 익혀 둔 게 큰 도움이 됐어요."
사실 운동신경은 타고났다.
육상 선수였던 아버지와 핸드볼 선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났으니 그 DNA가 어디 가겠는가.
하도 마르고 약해 태권도장에 보냈더니 오래잖아 3품을 따왔고, 집 근처 숭곡초등학교에 놀러 가 축구 한판 하고는 그 학교 코치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취미활동인 특활하고 선수의 훈련은 그 차이가 하늘과 땅이었다.
여전히 재미는 있어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오전 수업 마치고 입은 유니폼은 저녁 6시가 돼야 벗었다.
일요일 빼고는 늘 그렇게 땀을 쏟아야 했다.
그러니 기운이 달려 집에 들어가면 쓰러져 자기 바빴다.
팀 내에서는 큰 키도 아니었고, 체력이나 체격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운동할 때마다 고달팠다.
힘들고 버거웠다.
특히나 시종 상대와 부딪치며 하는 운동이라 더했다.
그래도 재밌어 시작했고, 전학까지 한 터라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4월 초에 모여 석 달 훈련하고 7월부터 대회에 나갔다.
유망 선수 스카우트에 이은 집중 조련은 곧바로 전국대회 우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이어졌다.
"팀에서 가장 큰 친구가 주포였고, 저는 어시스트 중심으로 움직였어요. 두드러질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왼손잡이라 베스트로는 뛰었습니다."
핸드볼이나 배구에서는 오른쪽 공격이 쉬운 왼손잡이가 환대받는다.
어릴 때 부모님의 유도로 오른손을 쓰면서 한때 양손잡이가 됐지만, 결국 왼손으로 굳어졌다.
어른들이 꺼리던 그 왼손을 그렇게 요긴하게 써먹을 줄은 미처 몰랐다.
강팀의 베스트 멤버였지만, 사실 광운중 2학년 때까지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저 '괜찮은 선수' 정도였다.
키가 1m 88까지 자란 3학년이 되어서야 핸드볼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저런 유망주는 정책적으로 키워야 한다.'면서.
장신에, 왼손잡이에, 전국 4강권 팀 주전이면 하늘이 내린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중학생으로는 유일하게 '88 꿈나무'로 선발되면서 신문에 얼굴까지 실렸다.
한데 올림픽 무대에 서지는 못했다.
체격 조건은 훌륭하지만, 아직 어려 성인들하고 몸싸움하기에는 무리라는 게 핸드볼협회 측 판단이었다.
그래도 꿈나무 선발이 자신감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광운중 2학년 여름방학 때 삼척으로 합숙훈련을 떠났다.
가기 전에 늘 하던 대로 팀에서 키를 쟀더니 1m 73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1m 63이었던 키가 중1 때 1m 72까지 자라더니 그 후 1년간 겨우 1㎝ 는 게 전부였다.
삼척에서 지내는 동안 유별나게 꿈을 많이 꿨다.
눈만 감았다 하면 어딘가에서 떨어졌고, 수시로 가위에 눌렸다.
그냥 허약해서 그러려니 했다.
한데 훈련 마치고 상경해 집에 들어섰더니 부모님께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며칠 사이에 불쑥 자란 아들이 낯설었던 모양이다.
'무슨 병에 걸린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순식간에 팀의 최장신으로 변신하자 선후배들도 기막혀했다.
학교에 가서 다시 키를 쟀더니 1m 83이었다.
열나흘 동안 10㎝가 큰 것이다.
고려고 2학년 때 2m에 달하자 덜컥 겁이 났다.
주위에서도 '얼마나 더 클 건지 병원 가서 검사받아 보라.'고 했다.
한데 딱 그 시점에서 성장이 둔화했다.
사실 어려서부터 남들보다는 클 거라고 짐작은 했다.
아버지가 1m 81이고, 외가 어른들이 다 큰 데다 어머니도 50~60년대 여성치고는 큰 1m 68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술처럼 키가 자라자 온 가족이 긴장한 건 사실이다.
"누나가 1m 75, 동생이 1m 93이에요. 제가 2m 3으로 집안에서 가장 크죠. 온 가족이 밥 먹으러 식당에 들어서면 정말 구경거립니다. 근데 제 아내는 1m 65밖에 안 됩니다."
고려고 1학년 때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주니어대표로 뽑혀 독일 전지훈련에 갔고, 곧바로 이탈리아 코파컵에 출전해 맹활약했다.
물오른 재주는 하루가 달랐다.
말이 고등학생이지 실력은 이미 성인 무대에 풀어놔도 정상급으로 활약할 수준이었다.
이따금 경희대로 연습경기하러 가면 보통 팀에서 넣는 열댓 골 중 혼자 열서너 골은 넣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 셈이다.
한껏 날카로워진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일층 기량이 여문 2학년 때 그리스에서 열린 90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 나가 마침내 사고 하나 크게 쳤다.
득점왕 등극!
대학 2학년생이 주축인 대표팀에 고교생으로는 유일하게 합류한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전 세계의 날고 기는 선수 다 제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당시 한국 성적이 24개국 중 12위였다는 사실이 득점왕의 값어치를 더욱 끌어올렸다.
한두 게임 치르자 현지 언론들이 앞다퉈 카메라를 갖다 대기 시작했고, 독일, 프랑스, 헝가리 등의 프로팀이 감독을 통해 수시로 접촉해 왔다.
이제 겨우 17세였으니 어느 팀이건 데려가기만 하면 횡재였다.
그때 키는 이미 2m에 달해 있었다.
"유럽 팀들이 저를 데려다가 공부와 훈련을 하며 키우려고 했던 거죠. 하지만, 당시는 조기유학이 쉽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놔 줄 리도 만무했고요. 저한테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는 얘기도 대회 끝나고 귀국한 후에야 감독님한테 들었어요."
두 명이 잡으면 반칙이지...
귀국하고 얼마 안 있어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북경아시안게임에 가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주니어팀에서조차 막내인 애송이가 주전으로 나설 자리는 없었지만, 그게 한국 핸드볼 간판스타로 가는 첫걸음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경희대에 갓 입학한 92년에는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절반 정도 뛰었고, 93년 스웨덴 세계선수권대회를 기점으로 베스트7의 라이트백 자리를 꿰찼다.
그 사이에도 유럽과 일본에서의 입단 제의는 꼬리를 물었다.
일단 움직였다 하면 돈과 명예가 한꺼번에 굴러들어오게 돼 있었으니 어디든 사인만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말렸다.
운동 못잖게 학교도 중요하다는 게 공통된 얘기였다.
그 충고를 받아들여 모든 걸 졸업 후로 미뤘다.
그러면서 교직 과목을 이수해 중등 체육교사 자격증까지 땄다.
4학년 때인 95년 아이슬란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득점왕에 오르며 다시 한 번 유럽 지도자들의 시선을 자극했다.
이번엔 독일의 클럽 관계자가 한국으로 들어와 교수와 마주앉은 끝에 기어이 계약을 성사시켰다.
세계 최고의 핸드볼리그 분데스리가의 중하위권 팀 VfL굼머스바흐였다.
굼머스바흐는 쾰른과 뒤셀도르프 근처에 있는 소도시다.
애초 예정은 졸업식과 함께 독일로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팀에서 연방 독촉 전화가 들어와 결국 졸업식도 못한 채 12월에 출국했다.
분데스리가는 9월에 시작해 이듬해 5월에 끝나는 일정인데 팀 사정이 여간 급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독일에 동행해 석 달간 밥이며 빨래며 집안일을 봐준 어머니 덕분에 적응은 무난하게 했다.
한데 팀에만 가면 문제가 생겼다.
너무나 큰 문화적 차이가 번번이 스트레스가 되어 마음과 생각을 오그라들게 했다.
구단 관계자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더니 깜짝 놀라며 '왜 절을 하느냐, 지금 신에게 절하는 거냐?'며 무안을 줬다.
악수나 포옹이 인사인 그들에게 목례는 얄궂은 행위일 수밖에 없었다.
감독 앞에서 예의 지키다 낯뜨거워진 일도 있다.
회식 때마다 술을 입에도 안 댔더니 선수들이 '술 못 하느냐?'고 물었다.
감독 앞이라 그렇다고 하자 다들 의아해했다.
한국에서는 굉장히 중요했던 그 문제가 거기서는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었다.
말 걸까 두려워 감독을 피해 다니다가 오해도 샀다.
매사 조심스러워 맘 놓고 행동을 못할 지경이었다.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 초기에 말 때문에 당연히 애 많이 먹었다.
영어도 잘 안 되는 판국에 발음 어렵기로 첫손에 꼽히는 독일어를 들으려니 골이 다 아팠다.
처음엔 통역이 따라붙어 급한 불들은 껐다.
하지만, 핸드볼을 잘 몰라 뜻이 매끄럽게 전달이 안 되는 데다 통역에게 의지하면 말을 못 배운다는 바람에 혼자 눈치로 버텨야 했다.
그러니 코트에 들어가면 번번이 작전에 구멍이 생겼다.
감독 지시는 대충 알아듣겠는데 하고 싶은 얘기를 전달하지 못하니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분데스리가의 첫 동양인이기도 했지만, 언어 장벽이 높아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감독이 말을 내뱉을 때마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한국에서야 '알겠다.'는 표현인데 유럽 사람들은 그걸 되게 재밌게 여겼다.
그래서 감독이 붙인 별명이 '닉(Nick)'이다.
고개를 끄덕인다는 뜻의 'Nicken'에서 따왔다.
"'윤'이나 '경신'을 발음하기 어려워 그렇게 부른 것 같아요. 처음엔 우스웠는데 나중엔 그 별명에 애착이 가더라고요. 유럽 사람들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겐 함부로 별명을 붙이지 않는다는 얘기도 맘에 들었고요. 말 때문에 고생 많이 했는데 한 2년 정도 지나니 의사 전달이 되더라고요. 특히 저는 내성적이라 입이 늦게 열렸어요. 처음 2년간은 거의 말을 안 했으니까요."
독일 진출 초기였다.
마리오라는 이탈리아계 팬이 느닷없이 집으로 찾아와서는 '공짜로 독일어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러잖아도 말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터였다.
초반 석 달간 개인교사를 들여 배워도 봤고, 쾰른에 나가 6개월간 어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매일 집으로 찾아와 말을 가르쳐 주겠다니 그보다 더 반가운 일은 없었다.
한데 그 소식을 접한 구단 측에서 마리오를 굉장히 안 좋게 생각했다.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문화라 '네가 뭔데 선수 집에 함부로 드나드느냐?'며 대놓고 나무랐다.
하지만, 나쁜 뜻은 없는 것 같아 '마리오한테 독일어를 배우고 싶다.'고 하자 그제야 구단주도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날부터 마리오는 매일 집에 왔다.
은행원인 그는 마침 동갑내기라 여러모로 잘 맞았다.
쇼핑도 같이 다니고, 나이트클럽도 같이 가며 절친한 친구로 발전했다.
은행 업무가 끝나기 무섭게 달려와 저녁 늦게까지 말벗을 해주고 귀가했다.
문제는 집이 굼머스바흐에서 100㎞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힘든 내색 한 번 안 하고 동양인 친구를 위해 자기의 저녁 시간을 몽땅 털었고, 친분이 두터워지자 아예 굼머스바흐로 이사까지 왔다.
"마리오는 굼머스바흐의 골수팬인데 처음엔 덴마크 선수의 열혈 팬이었다가 그가 그만두자 저한테 온 거에요. 그동안 한국에도 다섯 번 정도 왔어요. 제 결혼식에도 왔고, 생일 때도 왔고, 심지어 우리 애가 태어나던 날도 왔어요. 지금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참 좋은 친구입니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로는 먹고 사는 문제가 큰 짐이 됐다.
점심이야 주변 식당에서 대충 때워도 저녁은 꼭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하루는 운동 끝나고 8시쯤 귀가해 밥해서 먹고 나니 11시였다.
처량했다.
운동보다 밥해 먹는 게 더 힘들었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가져간 여러 권의 요리책을 뒤지며 반찬 만들고 찌개도 끓이다 보니 나중엔 김치까지 담그는 수준이 됐다.
놀러 좀 오라고 성화를 대는 쾰른 한인회장 집에 가면 식사는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지만 끝내 가지 않았다.
'한국인과 어울리면 말을 못 배운다.'는 누군가의 귀띔을 법처럼 지켰다.
세 명이 잡으면 어쩌라고... ^^
부엌에서는 약해도 코트에서는 정말 강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40여 년 전통의 분데스리가에서 13년 동안 8차례나 득점왕에 오른 사실이 모든 걸 설명해 준다.
특히 96~97시즌부터 시작된 6시즌 연속 득점왕 등극은 분데스리가의 전설이 됐다.
종전 연속 득점왕 기록은 80년대 중반 예지 크렘벨의 3시즌이었다.
00~01시즌에 달성한 324골도 기념비적인 기록으로, 분데스리가 단일 시즌 최다득점이자 사상 첫 300점대 득점이다.
사실은 7시즌 연속 득점왕도 가능했으나 우승팀 테하베킬이 동양인의 독주를 막겠다고 모든 패널티스로를 덴마크 용병 프렌스 버그에 몰아주는 바람에 처음 2위로 내려앉았다.
당시 독일 신문들은 '매너 없는 행위'라며 테하베킬을 비난했다.
패널티스로는 경기 당일 컨디션이 가장 좋은 선수가 쏘는 게 일반적이다.
득점왕 얘기하면 혹자는 2m 3에 이르는 키 덕을 크게 봤을 거로 생각한다.
어림없는 소리다.
분데스리가에는 2m짜리가 수두룩하다.
같은 시기에 뛴 선수 중에는 2m 10도 있었고, 2m 20도 있었다.
"그쪽 선수들은 팔이 긴데다 체격도 비슷하니 그만큼 경기하기 어려워요. 그나마 어릴 때부터 훈련을 많이 해 순발력과 스피드가 좋았기 때문에 많은 득점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세계 최고의 스타로 군림한 13년간의 분데스리가 생활에 딱 두 가지 아쉬움이 남아 있다.
소속팀을 한 번도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지 못한 아쉬움, 그리고 향수병 때문에 3,000점을 채우지 못하고 귀국한 아쉬움이다.
그의 결혼 이야기를 들어보자.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를 1년 앞두고 태릉선수촌에서 만났어요. 아내는 당시 선수촌 내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했죠. 사실 이건 비밀인데 당시 제가 대학교 3학년이었고 선배들과 카페에서 커피를 자주 마시다가 어느 날 맥주를 마시고 싶은 거에요. 카페 사장님께 부탁했죠. 대학생이라서 돈이 없는데 사 주시면 안 되느냐고, 꼭 갚겠다고 말하고 사장님이 사 주셨어요. 그 카페에 오래 있으면서 아내가 저와 동갑인 걸 알게 됐고, 사장님도 잘해 보라고 하셨죠. 선배들과 '누가 저 예쁜 아르바이트생과 먼저 사귈까?' 하고 내기를 했었어요."
그의 이야기가 계속됐다.
"선수촌에서 문경은, 우지원 등 인기 농구 선수들과 같이 훈련했거든요. 아내가 농구 선수들은 아는데 핸드볼은 모른다는 거에요. 그때부터 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결국 내가 승자가 됐지만. 몇 번 만나면서 제가 '진심으로 좋아하는데 사귀고 싶다.'고 했죠. 처음에는 제가 키도 크니까 부담스러워 했어요. 또 핸드볼이 유명한 종목도 아니라 부모님도 반대하셨을 것 같고요. 어쨌든 저를 믿고 마음을 받아줬죠. 독일 가기 전에 집으로 초대했어요. 프러포즈했죠. 주변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처음에는 아내가 튕기더라고요. 지금도 말하지만 '그때 자기가 너무 순진했었다고'. 별로 안 순진한 것 같은데. 결국 결혼까지 해서 독일로 건너가 어려운 여건에서도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그는 아주 똑똑하고 예의가 바른 사람이다. 경기장 안에서는 완벽한 팀 플레이어로 그를 중심으로 우리 팀이 완전한 하나가 된다. 역사상 아주 위대한 선수다."
윤경신의 독일 무대 마지막을 지휘했던 함부르크 마틴 슈발브 감독의 인터뷰 내용이다.
한국에서 비인기 종목인 핸드볼계에서 스포츠 팬들이 윤경신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아는 것은 실력뿐 아니라 그의 남다른 인격과 자세에서 비롯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 윤경신.
그의 찬란한 꿈은 현재 진행형이다.
2012 런던 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1위로 통과해 한국 선수로는 역대 다섯 번째로 올림픽 5회 출전의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는 지금 박사 과정까지 준비할 정도로 최고의 선수에서 공부하는 지도자로 변신하기 위한 준비 과정을 밟고 있다.
A mi manera (My way), Gipsy Kings
Yo se que no vendras
Por eso dia
Tanto la oblido
Dejar un nuevo amor
Tanto mejor
Ay como el mio
Dejar y la vive
En este mundo de tristessa
Dejar y la vive
A mi manera
Yo quiero se
Y nada mas
Prefierare
Y recordar
Un nuevo amor
Tanto mejor
Qui siera olvidar
Tanto la dejar
Qui siera vivir
Ay nada mas
O si my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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