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알려지는데 운만 작용했을까?
나윤선은 CD보다 라이브가 훨씬 더 매력적인 가수다.
국내 재즈 보컬 중 그녀만큼 많은 인기를 누리는 가수도 없고, 그녀만큼 해외에 알려진 가수도 없다.
재즈보컬 나윤선은 유럽을 주 무대로 활동하며 최근에는 국내에서의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2001년 재즈 가수로 데뷔한 그녀는 2008년 독일의 프리미엄 재즈 레이블인 ACT에서 발매한 6집 ‘브와이아쥬(Voyage)’를 통해 유럽의 많은 매체와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독일,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19개국 50여개 도시 순회공연을 통해 세계적인 재즈보컬로 이름을 알렸다.
또한 앨범이 출시된 지 2주 만에 ACT음반 중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고 프랑스 매거진 재즈맨은 최고의 앨범에 주는 ‘CHOC’을 수여했으며 독일의 신문은 근래에 보기 드문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2009년 프랑스에서 예술문화 활동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에게 수여하는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훈장을 받아 재즈계를 놀라게 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제일 어색해요.”
무대에 선 지 10년째지만 그녀는 여전히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카메라'라는 그녀다.
대중과 만남을 전제로 한 그녀의 직업은 성격과 참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끼도 없고 춤도 못 추고 밤에 나가 놀지도 않는다.
“밤에 나가서 술 마시고 노래방 가고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텔레비전을 안 보니까 유행하는 것도 잘 모르고 다 느려요.”
그녀는 모범생.
외출하는 것보다 집안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말썽 한 번 부려본 적 없는 착한 딸이었다.
늦은 밤 아무도 없는 길을 운전해도 신호가 걸리면 서서 기다리는 사람.
주차할 때 주차선에 정확히 맞춰서 몇 번을 해서라도 정확히 집어넣는 피곤한 사람.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래요. 노래도 너무 정갈하게 한다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게 살면서 놓친 게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의 그녀를 보면 어려서부터 음악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불문학을 전공하고 의류회사에 입사했다.
직장생활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8개월 만에 그만 두었다.
그러니 어려서 음악공부를 정식으로 한 경험은 없었다.
그런 그녀의 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봐준 친구가 있었다.
그녀보다 음악을 먼저 시작한 친구였는데 '너는 노래해라.'며 곁에서 자꾸만 그녀를 자극한 것이다.
그녀는 친구의 권유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김민기 연출에게 데모 테이프를 보냈다가 발탁이 돼 뮤지컬배우가 됐다.
그 후로 두 편의 뮤지컬에 출연하고 음악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때 마침 친구는 클래식을 하기엔 너무 늦었으니 재즈를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조언을 해줬고 그렇게 27살이라는 어찌 보면 음악을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에 과감하게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무 것도 모르고 재즈를 시작한 그녀.
그녀가 재즈를 하면서 가장 괴로웠던 것이 자신의 틀을 깨는 작업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윤선이 프랑스에서 재즈를 시작한 건 행운이었다.
다른 삶의 방식과 문화를 인정해주는 프랑스 문화 덕분이다.
그녀는 유학 시절 매일이 놀라움이었다고 말한다.
한 교수님은 피그미 족과 살면서 피그미 족의 발성법을 배워와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브라질 뮤지션들을 학교에 초청해서 공연을 하는 등 모든 것이 나윤선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열심히 하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재즈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심과 학교 내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클래식, 재즈보컬, 보컬 앙상블 학교 등 한꺼번에 여러 학교를 다니며 공부했다.
처음 재즈를 하면서 자신의 목소리가 재즈를 하기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른 재즈 뮤지션들처럼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음색이 맑아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지도했던 교수는 웃으며 재즈는 '네 목소리 그대로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며 다양한 재즈보컬리스트들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만약 ‘유학 후에 교수가 돼야지, 유명한 재즈 가수가 될 거야.’ 등의 생각을 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일단 공부가 하고 싶어서 파리에 왔고, 또 막상 해보니 언제 끝이 날지 모를 정도로 암담했지만 조급증은 느끼지 않았어요. 돌이켜보면 그 당시엔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어느 정도 정착을 해야 해.’ 등 사회적인 잣대나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거 같아요. 덕분에 여러 시도를 할 수 있었고, 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죠.”
그녀는 재즈를 배우면서 누구를 흉내 내기보다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재즈라는 장르가 원래 섞인 음악이다.
아프리카의 흑인음악과 클래식, 유럽의 민속음악 등이 섞여 만들어진 음악이기에 그만큼 열려있는 음악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음악이 재즈였다는 것을 그녀는 알게 되었다.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음악이다 보니 오히려 자유로웠다.
그녀는 재즈스쿨에 다니면서 뮤지션들을 모아 팀을 만들었다.
그들과 2년쯤 공연을 했는데 그녀 스스로는 학생이라고만 생각했지만 보는 관객들은 그녀를 아티스트로 여겼고 그녀가 부르는 재즈를 즐겼다.
그러다보니 공연이 계속 이어졌다.
그녀의 공연이 계속되고 현지 언론에서 관심을 보였다.
유럽 재즈계에 동양인이 거의 없는데 그녀가 재즈를 부르니까 호기심을 갖고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고 나윤선은 말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실력이 없었다면 유럽의 언론들이 그렇게 꾸준히 관심을 갖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이런 그의 행보가 최초의 동양인 CIM 교수를 탄생시킬지 누가 알았으랴.
졸업 후 나윤선 씨는 CIM에서 교수 제의를 받는다.
재즈의 문외한이던 동양인이 남들이 하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간 데 큰 점수를 준 것.
덕분에 나윤선 씨는 귀국을 1년 정도 미룰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윤선 씨의 음악 인생이 처음부터 탄탄대로였던 건 아니었다.
자국민이 무대에 섰으면 좋겠다며 정중한(?) 거절을 받은 적도 있고, 월등히 뛰어난 음악가를 보며 좌절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녀는 상대를 부러워하기보다 자신의 ‘다름’을 소중히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실력이 미흡하다는 걸 느낄 때가 많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 지점 이상까지는 발전할 수 없다는, 저의 한계도 분명히 알고 있죠. 그런데 이를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한계인 거고, 좋게 생각하면 열심히 노력해서 거기까지라도 갈 수 있으면 행복한 겁니다. 처음부터 ‘어차피 최고가 되지 못하는데 할 필요가 없다.’며 좌절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재즈 뮤지션들은 이렇게 다른 뮤지션의 음악적 시도에 자극을 받고 또 다른 시도를 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그래서일까, 재즈 뮤지션들은 끊임없이 연습을 한다.
그녀는 악기 소리를 내기 위해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여러 소리를 흉내내가며 소리 찾기에 열중했다.
그녀와 듀엣으로 활동하는 유럽 최고의 기타리스트 울프 바케니우스는 차량으로 이동 중 자면서도 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기타를 튕기며 연습을 한다니 그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까지 활동할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저한텐 기적입니다. 제가 음악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부모님이 ‘노래는 할 줄 아니?’라고 물으셨죠. 두 분 다 음악인이시기 때문에 한 번도 부모님 앞에서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거든요. ‘프로 앞에서 어찌 감히 노래를 불러.’하며 창피하다고 생각했나 봐요.”
나윤선 씨의 어머니는 뮤지컬 1세대 배우인 김미정 씨, 아버지는 국립합창단 예술감독 나영수 씨다.
그들은 다소 느리게 흘러가는 나윤선 씨의 삶을 한 번도 채근한 적이 없다.
“부모님은 개방적인 분들이라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하셨어요. 늘 저의 선택을 믿어주셨죠. 오히려 자식들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하셨죠.”
절대적인 지지자의 존재.
그녀가 각박한 생활 속에서도 꿈을 향한 ‘여행’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던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평범한 모범생으로 살았고, 변화에 목마르지도 않았던 그녀의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팔자’가 있다고 믿어요. 대학 시설 프랑스문화원에서 주최하는 샹송대회에서 대상을 받을 때 친구에게 떠밀려 나갔고, ‘지하철 1호선’ 출연도 친구가 대신 나선 덕분이었어요. 프랑스에도 저는 3년만 공부하고 돌아올 생각이었거든요. 이렇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죠. 그저 운이 좋았고, 음악을 할 팔자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언제 음악을 그만두더라도 팔자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것 같아요.”
“뮤지션들이 가장 행복할 때는 무대 위에 있을 때입니다. 한국 관객은 뮤지션을 무대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게 합니다.”
유럽의 수많은 도시에서 공연을 통해 관객들과 소통하고 만났던 그녀는 한국 무대에서 느꼈던 감동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한국 팬들의 열정적인 호응에 미국의 한 뮤지션은 노래를 더 부르고 싶어 했고 한국 무대에 서고 싶어 하는 유럽의 뮤지션들이 많다고 뿌듯해 했다.
“저는 제 한계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동양인으로서 넘지 못하는 벽이 있어요. 외국인들이 국악을 하더라고 최고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죠. 참 고맙게도 재즈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고, 제가 한국인이라는 특이함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엘라피츠 제랄드나 빌리 할리데이, 사라 본이 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죠.”
‘오늘을 살자.’가 좌우명이고 계획을 세워서 인생을 살지 않는다는 그녀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고자 한다.
“‘인생은 나그네’라는 말이 제게 딱 맞는 것 같아요. 하도 비행기를 많이 타니까 ‘이게 떨어지기도 하겠지?’라는 생각도 해요. 이제는 ‘내가 있는 곳이 집이지.’ 해요. 늘 홀로 살다 보니 인생의 가지를 치는 일이 더 쉬웠던 것 같아요.”
지금도 젊은 여성들이 나윤선에게 자주 물어본다고 한다.
늦은 유학길에서 그녀는 ‘하면 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대답한다.
여자 나이 27살에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것에 대해 ‘늦은 감이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 보다는 ‘우연히 시작했으니 하는 데까지 열심히 해봐야지 뭐.’하는 식의 긍정적인 성격이 오늘의 성공에 한몫했다.
하지만 모든 27살 여자들에게 ‘일단 저지르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좀 더 일찍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고 한다.
학창시절과 짧은 회사생활 모두 있는 듯 없는 듯 했고, 평소 집안에 있는 것을 좋아했던 나윤선이 수많은 관객과 소통하며 공연을 하고, 세계를 돌아다니게 하는 자유로움.
그것이 인생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초우, 나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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