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살아남은 사람들의 나라 캄보디아

부에노(조운엽) 2016. 10. 31. 16:06

 

 

폴 폿 정권은 농업 현대화와 자급자족, 산업의 기술개발을 기치로 내걸고,

대다수 국민에게 도시를 떠나 대규모 농업협동조합이나 산업체에 종사하도록 강요했다.

그 와중에 당시 인구의 1/4인 이백만 명의 국민을 처형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나라 캄보디아

 

 

프랑스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한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왕은 월남 전쟁 당시 중국 공산당과 가깝게 지내 북베트남 공산당과 싸우고 있던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친미 세력인 론놀 장군이 왕을 쫓아내고 정권을 잡자 미국은 베트콩을 몰아내려는 목적으로 캄보디아의 농촌에 폭격했다.

이에 농민들은 반군을 일으켜 저항했다.

이 반군을 크메르루주라 불렀고, 이 군대의 지도자는 폴 폿이었다.

 

폴 폿은 서방세력에 억압받는 현실에 분노, 농촌 지역에서 대대적인 세력 확장을 하여 1975년 마침내 론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다.

캄보디아의 내전을 끝내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민중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폴 폿 군은 수도 프놈펜에 입성했다. 

그러나 불과 수 시간 후, 악몽은 시작됐다.

폴 폿은 ‘노동자들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공포정치를 감행했다.

 

수도 프놈펜의 주민 약 이백오십만 명은 이주 통보를 받은 지 사흘 만에 모두 쫓겨나 시골의 집단농장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화폐 사용은 금지되고 은행 문을 모두 닫았다. 

심지어 자동차들도 모두 프놈펜 공항에 폐기 처분, 모든 자본주의의 상징은 철저하게 금지됐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나 안경 쓴 사람, 손이 부드러운 사람까지 모두 ‘교육받은 사람’이나 ‘부르주아’로 간주, 잔혹한 고문 끝에 처형했다.

1975~1979년까지 이 대학살로 이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굶주림과 고통에 겨워 캄보디아를 탈출했다.

 

이것을 다룬 영화가 킬링필드이다.

1978년 성탄절에 베트콩이 쳐들어와 이듬해 크메르루주 정권은 몰락하고 폴 폿은 도망쳐서 밀림에 몸을 숨긴 채 이십여 년간 저항하다 1998년 사망했다.

피로 물든 정권에서 살아남은 캄보디아인들에게는 시련이 더 남아 있었다.

1979년과 1980년 사이에 심각한 기근으로 63만 명 이상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뚜올슬랭 박물관

현지인은 무료입장이고 외국인은 3불

 

 

프놈펜에 있는 뚜올슬랭 박물관은 고등학교 건물을 고쳐 혁명 정권의 악명 높은 숙청의 산실로 이용된 곳 중 하나이며 집행관들은 대체로 교육을 받지 않은 어린 농부 출신 전투 요원으로 맹위를 떨쳤던 혁명군의 첨병들이었다.

이들의 나이는 12세~16세로 사람들을 죽인다는 행위 자체를 나쁜 것인지도 모르고, 오히려 잔악한 행위를 하는 것이 지도부에 충성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이들의 일부 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며, 여자 대원도 있다.

 

 

 

캄보디아 여성들은 대부분 머리를 길게 기르는데 여기에 갇히면서 모두 단발머리로 잘렸다.

 


수감자의 가슴에 번호표를 단 사진을 찍는 등 기록을 남긴 다음 살해했는데, 그 가족과 친척까지 전부 학살했기 때문에 아기와 어린아이의 모습도 많이 보인다.
끝없는 사진들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얼굴들. 

 

캄보디아인뿐만 아니라 미처 탈출하지 못한 서방 기자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도 예외 없이 학살당했다.

 

고문실과 수감실로 바뀐 교실은 고통을 주고, 죽이기 위한 다양한 기구들이 가득 차게 됐고, 지금도 그 고문 기구들이 여전히 남아있으며 희생자들이 누워서 죽어가는 모습들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희생자들이 갇혔을 때 사진이 걸려 있는 고문실과 복도를 지나갈 때는 섬뜩하여 더운 곳인데도 한기가 들어 으스스함을 느낀다.

캄보디아에서 가장 큰 수용소였던 이곳에서 하루에 백여 명 이상이 죽어 나갔다고 한다.

 

캄보디아는 살아남은 자의 나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빈곤하고 피곤한 삶이지만 순박하게 늘 웃으며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하게 보인다. 

 

  

 

베트남군이 프놈펜에 쳐들어와 뚜올슬랭 고문수용소를 찾았을 때

수감자는 도망가는 크메르루주 군에 의해 모두 사살된 상태였다.

그중 몇 명이 숨을 거두지 않아 베트남군이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모두 죽어 베트남식으로 14개의 를 만들어주었다.

 

 

베트남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크메르루주가 고문하던 사람들을

사살한 모습을 수용소에 처음 도착한 베트남군이 촬영한 사진

죽어도 도망 못 가게 쇠사슬에 묶어 놓았고 바닥에 말라붙은 피가 그대로 있다.

 

 

물 고문 기구로 사용된 링 체조 기구

 

 

이곳에는 지식층이었던 승려, 교수, 의사, 학생, 정치범 등이 많이 갇혔다.

아이를 안은 462번 여인의 눈동자에는 깊은 고뇌와 슬픔이 보인다.

 

 

'캄보디아의 눈물'이라 불리는 이 사진은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의 옆모습을

확대해서 자세히 보면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

외교부 장관의 부인이라고 알려졌다.

 

 

 

공포에 질린 어린 학생

 

 

 

교실을 막아 독방을 만들었다

 

 

세월이 지나 분주히 움직이는 뚜올슬랭 부근

 

 

킬링필드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그들의 후예

 

 

 

 

Imagine, John Lennon (영화 Killing Fields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