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레

난 정말 몰랐었네, 최병걸 y 당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부에노(조운엽) 2016. 9. 18. 05:05

 

 

브라이언, 셰릴 갠스너 부부

 

 

국가 미래의 원동력 

 

 

"브라이언이 다쳤다는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군인과 결혼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셰릴 갠스너는 6년 전 이라크전에서 부상한 미군 중사 브라이언 갠스너의 아내다.

브라이언은 당시 장갑차를 운전하다 조수석 하단에서 폭발물이 터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발목을 크게 다쳤고, 오른쪽 다리와 왼쪽 허벅지, 오른쪽 손목에 파편이 박혔다.

그때부터 셰릴은 블로그에 남편 간병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 블로그에는 국가와 지역 주민, 각종 민간단체가 얼마나 일사불란한 시스템으로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서 부상한 갠스너 부부의 희생을 보상하고 있는지가 담겨 있다.

셰릴은 '가족과 친구, 국가와 지역사회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줬다.'고 말했다.

2006년 7월 28일 오전 3시.

자고 있던 셰릴에게 국방부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남편이 부상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고 공포에 떨고 있던 셰릴에게 남편을 치료하던 의사가 곧이어 이메일을 보냈다.

'방금 브라이언 몸에 있던 파편을 다 제거했다. 이 정도면 양호하다.'고 쓰여 있었다.

3일 뒤 브라이언에게 '사랑한다.'는 전화가 왔다.

그 사이 국방부 관계자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와 남편의 상황을 알려주며 안심시켰다.

동네에 사는 다른 군인 부인들도 찾아와 셰릴에게 각종 선물이 담긴 보따리를 주면서 위로했다.

며칠 뒤 브라이언은 귀국해 워싱턴 D.C.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셰릴은 며칠간 브라이언을 병원에서 간호했다.

이후 셰릴과 브라이언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켄터키주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비행기에서 기장은 마이크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 비행기에 영웅이 한 분 타셨습니다. 브라이언입니다. 승객 여러분, 우리의 영웅과 그의 부인을 잊지 마세요. 군인의 부인들은 미군 중에서도 가장 힘든 역할일 것입니다."

모든 승객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셰릴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썼다.

 

 

 

 


집에 도착하자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집 내부도 전역자처우협회(VA)에서 브라이언이 휠체어를 타고 생활할 수 있도록 싹 수리해 줘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셰릴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집도 고쳐져 있었고, 플래카드도 붙어 있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배려였다.'고 말했다.

나라 위해 몸 바친 이들을 위한 사회의 시스템은 이렇게 소리없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해 9월 28일 브라이언은 부대 최고 훈장인 '퍼플 하트'를 받았다.

3개월 뒤 셰릴도 국가로부터 '몰리 피처 어워드'라는 상을 받았다.

미 포병과 방공협회에서 미군에게 헌신한 여성에게 주는 상이다.

브라이언은 2008년 3월 정부 지원으로 방위산업체에 취직했다.

지난 10월 초 셰릴은 워싱턴 D.C.의 한 행사에 초청받았다.

엘리자베스 돌 전(前) 상원의원이 운영하는 재단에서 '참전 용사를 기리기 위한 행사에 꼭 참석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셰릴은 '나는 이들 중 한 명이 된 것이 영광스럽다.'고 적었다.

6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가는 그들을 잊지 않은 것이다.

 

 

 

 


"어쩌다가 안 좋은 일에,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린 것 같아요. 차라리 6·25나 월남전에 참여했으면 명예롭잖아요."

연평도 포격 도발 2년, 부상 장병들은 '당시의 일을 명예롭게 생각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포격 직후는 '빨리 복귀해서 김정일을 밀어버리자.'라고 전우끼리 다짐했다고 한다.

지금은 다르다.

'왠지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는 생각에 밖에 돌아다니기가 꺼려졌다고 했다.

김명철 씨는 지난 2009년 '남자가 되겠다.'면서 해병대를 자원했다.

하지만 1년 뒤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을 경험한 후, 김 일병에게 눈물과 악몽은 일상이 돼 버렸다.

입대 전과 달리 이젠 사람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

"더 나약하게 돌아온 것 같습니다…."

김 일병이 말했다.

김진권 씨는 부상 당한 지 1년 4개월 만인 지난 2월 경기도 국군수도병원에서 상병으로 퇴원했다.

가족을 빼고는 병원에서도, 집이 있는 대구에서도 그를 배웅하거나 마중한 사람은 없었다.

부상 후유증으로 오른쪽 발에 주먹만 한 혹이 생긴 그는 바깥도 편하게 돌아다닐 수 없었다.

'왜 다쳤느냐?'고 사람들이 물어보면, '어찌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둘러댔다.

"사람들이 연평도 포격 사건과 천안함 사태를 구분 못 해요. 그렇게 계속 되풀이되다 보니 제가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 싶더라고요."

 

오른쪽 팔에 상처를 입은 김명철 씨는 지난해 악몽과 불면증을 견디다 못해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 진단을 받으러 군의관을 찾아갔다가 '장애 급수 높이려고 찾아왔느냐?'는 말을 들었다.

김 씨는 '근본적인 치료를 받으려고 찾아간 것인데…'라고 말했다.

김진권 씨는 지난 8일 군으로부터 전화 한 통 없이 '연평도 포격 2주기 행사 참여 여부를 알려달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난 정말 몰랐었네, 최병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