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쾌적한 핼리팩스항
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중 캐나다 핼리팩스항
배경음악 : My heart will go on, Titanic OST, Celine Dion
https://www.youtube.com/watch?v=Mesw9H9NQ08
사십여 년간 배를 탄 어느 노 선장이 자기 평생 북대서양 항해가 제일 고약했다고 쓴 글을 본적이 있다.
거친 파도뿐만 아니라 곳곳에 빙산이 떠다니고 있어 파도에 두들겨 맞고 수면 위 10%만 보이는 유빙을 피해 항해해야 한다.
지금 'HAPPY LATIN' 호가 그 바다 위에서 핼리팩스항을 향해 독일산 자동차와 중장비를 싣고 피곤한 항해를 하고 있다.
타이태닉호가 침몰한 지점은 핼리팩스 북동쪽 해역이다.
타이태닉호의 시신 약 300여 구를 수습해 이 중 무연고자, 신원 미확인자와 수습된 선원들의 시신도 함께 영국 근해에서 수장했고 나머지 시신들은 이 핼리팩스 인근에 매장했던 역사가 있다.
사고 위령비가 핼리팩스에 있고 또한 해양박물관에 타이태닉 침몰 사고의 유품과 자료를 전시했다.
배가 침몰할 때까지 승객들을 위해 연주했다던 악단장 윌리스 하틀리는 고향인 잉글랜드 콜른에 묻혔다고 한다.
INMARSAT 인공위성 통신이 나오기 전에는 배에서 통신수단이 모스부호로 보내는 무선통신이 대부분이었다.
타이태닉호 역시 승객과 선원들의 전보 수천 통을 통신사 혼자 쉬지도 못하면서 보냈다고 한다.
타이태닉호와 가까운 곳에 화물선 캘리포니안호가 항해하다가 빙산이 너무 많아 야간 항해는 무리라 판단하여 투묘하고 엔진을 껐다.
그 배에서 빙산 경고를 타이태닉호에 보냈으나 하루 12시간씩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수많은 전보를 보내고 있던 통신사는 통신에 방해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단다.
타이태닉호가 빙산 충돌 후 가라앉으며 긴급 구조 요청을 보냈으나 20km 거리에 있던 캘리포니안 통신사는 장시간 근무 후 자는 한밤중이라 조난통신을 받지 못했다.
조난통신을 보내고 약 10분 후 사고 현장에서 약 90km 떨어져 있던 여객선 'CARPATHIA' 호가 응답하고 전속력으로 구조하러 왔다.
만약 가까이 있던 캘리포니안호가 조난통신을 받고 구조하러 왔다면 빨리 도착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으리라.
이후 대형 여객선은 조난 주파수를 상시 켜놓고 세 명의 통신사가 교대로 근무해야 한다는 국제조약이 생겼다.
핼리포니아라고도 불리는 핼리팩스는 위도에 비해 따뜻한 기후에 대서양의 파도로 서핑을 할 수 있고 와인 산지도 있다.
북미와 유럽을 잇는 교역항에 군사적 요충지이고 영국 식민지 때 적군의 침입에 대비해 지은 시타델 언덕의 성채는 핼리팩스의 랜드마크이고 아직도 매일 정오에 캐나다 군인이 예포를 쏜다.
아름다운 밴쿠버와 함께 캐나다에서 여름에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큰 도시 중 하나이다.
겨울에 추위는 혹독하여 눈 폭풍이 몰아치면 맥도널드 다리 일대가 통행이 마비되어 차는 세워두고 눈보라를 헤치며 걸어서 귀가하는 행렬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최근에 중국 자본 유입이 부쩍 늘어 여기에서 독일 3사 자동차를 타는 20대는 예외 없이 중국인이라고 한다.
한 편의 글에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항해일지를 읽던 한 해군 장교 출신의 글이다.
조 국장님의 항해일지를 처음 볼 때부터 글 속에 푹 빠졌었습니다.
물론 사실적으로 쓰신 원래 버전의 글이었죠.
군함이든 상선이든 배를 탔던 사람이면 공감할 수 있고 상상되는 글을 보고 그 속에 묘사된 상황을 떠올리며 저 역시 예전 기억을 많이 끄집어내기도 했고요.
예를 들면 '아, 맞아. 상선 공동 통신망이란 게 있었지. 그게 채널 몇 번이었더라? 가물가물... 16번 맞지?' 같이요.
배를 탄다는 게 현실에선 힘들고 때론 위험하고 대체로 지루한 일상의 반복인데 항해일지를 보다 보면 예전의 힘들었던 기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글 읽는 동안만큼은 나도 모르게 조 국장님과 항상 같이 승선해서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6년이 조금 넘는 군 생활 중에 외국 항구에 가 본 적은 없습니다.
태풍 피한다고 제주항에 들어갔을 때가 제일 설렜던 거 같습니다.
제주도 처음 가 본다고요.
평상시는 주야장천 대한민국 영해와 공해상에서 경비만 뛰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배를 타는 같은 승조원 입장에서 조 국장님의 세상 경험을 부러워하고 동경하며 'HAPPY LATIN' 호에 같이 승선하게 되었나 봐요.
저 역시 온 세상 구경을 다 하고 싶은 사람인지라...
항해일지 따라 세상 구경하는 것도 즐거웠고 때론 가슴 아픈 이야기에 숙연해지기도 했었고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 살아난 갑판장님은 훗날 중신을 섰는지도 궁금했고요.
조 국장님과 안 선장님의 글을 보면서 마도로스가 참 멋진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세상 두루두루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어서이고요.
두 번째 이유로는, 이게 더 큰 이유입니다만, 물류의 흐름을 직접 두 눈으로 생생하게 봄으로써 경제 흐름의 한 부분을 파악할 수 있고 이런 것들이 쌓여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는 현실적이면서 거시적인 안목이 생기는 것 같아서요.
제가 요즘 읽는 책도 경제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에서 입니다.
저는 독문학 전공입니다.
오늘 비가 주룩주룩 와 짬뽕 국물도 먹고 싶고 조 국장님이 생각나서 두서없이 주절주절했습니다.
조 국장님은 먼 길을 찾아서라고 꼭 뵙고 싶은 분입니다.
전부터 항해일지를 읽으며 항상 재미있고 좋은 글 감사하다고 이메일이라도 보내려다가 뻘쭘할 거 같아서 마음에 담아놓기만 했는데 그 맘 오늘 이렇게 보냅니다.
그는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우물을 벗어나 군함 승선 경력으로 해기사 면허를 따 홍콩 월드와이드사 대형 탱커에 항해사로 승선하여 바다로 나와 인생이 바뀌었다.
글쓴이는 항해일지를 보고 따라서 배를 타라는 말이 아니고 해상 물류 돌아가는 엄청난 시장을 배울 수 있으면 대단한 메리트가 있기에 그런 것을 배워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캐나다 땅은 나무가 많고 좀 추우면서 원주민이 드문드문 살아 인적이 별로 없는 땅이었고 11세기경 바이킹이 들른 흔적이 있으나 유럽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492년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다녀간 후 상인들 사이에 대서양에서 서쪽으로만 가면 동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캐나다 남부는 미국 쪽에서 식민지 개척을 하던 스페인 사람들이 지배했고 프랑스는 퀘벡과 몬트리올에 식민지를 세웠다.
영국이 뉴펀들랜드, 허드슨 등지를 지배했으나 영불 7년 전쟁 후 프랑스 식민지가 영국으로 넘어갔다.
영국은 캐나다 지역이 미국의 독립전쟁에 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퀘벡의 프랑스계 주민들이 신앙을 유지하고 프랑스어를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캐나다는 이주자와 원주민의 생존을 건 정면충돌이 잦던 미국과는 달리 정부 주도의 학살은 적은 편이었다.
영국계 개척자들과 원주민이 땅을 공유한다는 계약을 하고 그 대가로 연금을 몇백 년간 주기로 했다.
연금을 받는 대가로 원주민들은 땅을 내주고 보호구역에서 살았는데 좋은 땅은 백인들이 다 차지하고 보호구역은 황무지인 경우가 많았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대개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수렵과 채집하던 생활을 해왔는데 연금을 받으니 원주민 공동체는 농사를 짓거나 직업을 가질 이유도 의무감도 없어지게 되었다.
계약서 종이쪽지 하나에 원주민들을 영국과 캐나다가 발행하는 화폐와 시장이 없으면 모조리 죽어야 하는 사람들로 만든 것이다.
또한 원주민 보호구역은 캐나다의 인프라 사업에서 소외되어 비포장도로, 부실한 전기사정, 19세기에 지어진 공동주택에서 아직도 사는 형편이다.
인프라가 부족하니 생필품도 몇 배 비싸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순간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
영국령 캐나다 정부와 전쟁을 할 생각이 아니면 그냥 잠자코 연금이나 받아먹고 살아야 한다.
캐나다 정부는 자립 능력을 잃고 정부에 의존하게 된 원주민들에 강압적 동화 정책을 시행하며 학교를 만들었다.
학교에서는 영어만 사용했고 이름도 영국식으로 바꾸었고 강제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옷도 백인처럼 입혔다.
학교라는 말이 무색하게 교육 과정은 고작 3~4학년 수준으로 매우 낮은 편이었으며 학교를 졸업한 후의 원주민들은 더 원주민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주변 백인 사회에서 동등한 캐나다인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아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일부 원주민은 자신의 문화와 관련된 행동을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느끼기도 했고, 이로 인해 원주민 문화가 이어지지 못했다가 요즈음에 들어서야 학자들에 의해 겨우 재생되고 있다.
원주민 언어 사용자들의 수는 급감했고 원주민이라는 정체성이 희석됨에 따라 원주민 사회의 협동력이 떨어졌다.
2008년 정부가 처음으로 이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했다.
실제 캐나다에서는 중고등학교에서 원주민 탄압의 역사를 가르치며 선조들이 벌인 잘못을 잊지 말자고 강조한다.
그러나 여전히 원주민 보호구역의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최근에는 생명줄인 연금이 고갈되고 계약상 만기에 달해 아예 끊길 예정이다.
19세기 들어 미국이 발전하면서 영국은 캐나다 지역이 미국에 합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식민지 주변 정리를 했다.
이에 따라 퀘벡, 온타리오,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의 4개 주로 이루어진 캐나다 자치령이 1867년 형성되었다.
이후 캐나다는 서부 개척을 하여 영토와 인구를 늘리면서 독자적인 발전을 시도했고 연방 구성주도 늘어났다.
1982년에는 캐나다 법이 영국과 캐나다 의회에서 통과되어 영국과의 종속 관계는 끝나고 명실상부한 독립국이 되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땅에 자원 또한 무궁무진한데 인구는 고작 사천만 명이 안 되니 캐나다 국민은 복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 집행이 엄격해서 사소한 불법 행위도 용납되지 않는 나라이니 우리 한국인은 어영부영하다가 큰코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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