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핼리팩스발 보스톤행 완행 화물선

부에노(조운엽) 2019. 12. 7. 10:31




푸른 바다와 아름답게 어울린 핼리팩스 

 

 

 

핼리팩스발 보스톤행 완행 화물선

 

 

배경 음악 : 대전 블루스, 조용필

https://www.youtube.com/watch?v=HRYZ_l_Di18 

 

 

핼리팩스항의 첫인상은 평온하고 조용한 느낌이다.

언덕이 많아 어디 서 있든지 바다와 푸른 하늘, 건물이 조화되어 아름답게 보인다.

하역 중에 혼자 산책하러 나갔다.

세컨드핸드 스토아가 보여 들어가 구경했다.

예쁜 그릇과 색이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살림용품이 많이 진열되어있다.

난 꼭 필요한 것 아니면 물건을 잘 사지 않는다.

외국에 오래 살면서 미니멀 라이프가 몸에 밴 탓인지 빨랫감 줄이고 갈아입을 옷만 있으면 되고 내일 아침까지 먹을 것만 있으면 굳이 사서 걱정하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넘치는 것은 과감히 남 주거나 버린다.

작은 핸드 캐리어 하나면 가뿐히 옮겨 다닐 수 있다.

 

코르덴 상의가 보여 골라봤다.

영화나 잡지에서 외국 젊은이들이 입는 팔꿈치에 천 조각을 붙인 코르덴 상의를 나도 입고 싶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들 거로 생각했는데 여기선 적당히 색깔도 바래고 마음에 들었다.

아주 싼 가격에 사서 걸치고 나오다 작은 오페라하우스가 보여 입구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오페라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학생 때 연극을 보던 작은 무대보다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큰 무대를 보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덴마크에 기항했을 때 우연히 오페라하우스에 갔는데 끝날 때가 다 되어 입장이 안 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대신 영화관에 가 킬링필드를 봤었다.

대항해시대 귀족의 부인이나 딸이 입던 우아한 복장에 멋진 모자를 쓴 여인들 포스터가 몇 장 붙어 있고 쓰여 있는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입장권을 끊고 들어갔다.

넓은 무대와 많은 객석이 있어 나름으로 만족하고 무대 쪽으로 가는데 손님은 많지 않았다.

앞쪽의 빈자리에 앉으니 정말 근대 유럽 귀부인 복장과 화장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음악에 맞춰 나비처럼 사뿐사뿐 춤을 추며 나왔다.

그리고 모자와 옷을 하나씩 벗어던졌다.

걸친 옷 반쯤 남기고 음악이 바뀌면서 조명도 어두워졌다.

토끼 같은 웨이트리스가 드래프트 맥주를 한잔 가지고 왔다.

그리고 선수가 발레리나처럼 춤을 추며 나머지 옷도 하나씩 벗어 던진다.

아, 뭐야? 스트립바와는 또 다른 진화된 극장무대식 스트립쇼네.

여인의 치장에서 떨어진 작은 깃털 하나가 내 앞에 하늘하늘 내려앉았다.

손으로 집어 코에 대보니 여인의 진한 향수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북대서양에서 거친 파도와 유빙에 시달렸던 스트레스가 단번에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핼리팩스 부두 역사지구는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때 설립된 무역회사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부두 중 하나이다.

영미 전쟁 때 미국 선박을 상대로 약탈전을 벌인 해적인 사나포선들이 정박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사 나포선은 정부에서 교전국의 선박을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준 민간 소유의 무장 선박으로 보수가 따로 없는 대신 나포한 화물, 돈을 가질 권리가 있던 해적선이나 마찬가지인데 20세기 들어 사라졌다.

건물 내부에는 각종 상점과 레스토랑이 있고 수공예품이나 노바스코샤주 전통복 등 기념품을 판매하며 레스토랑에선 직접 제조한 노바스코샤 맥주를 맛볼 수 있다.

마도로스가 많이 드나드는 항구는 돈이 움직이니 유흥 문화도 발달하기 마련이다.

해산물 레스토랑과 바, 스트립쇼 하는 곳이 몰려있다.

 

대서양을 건너온 백만 명이 넘는 이민자들이 핼리팩스 21번 부두 이미그레이션을 통해 입국했다.

그곳에 기념박물관을 만들어 이민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전시물과 당시 이민자들의 인터뷰, 영상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고 1층의 특별관에는 식민지 시절 원주민의 생활상을 재현해놓았다.

 

보통 자동차 전용선보다 겸용선이 하역이 더 오래 걸린다.

그래도 몇 시간이면 하역을 마치고, 입항해서 하루를 못 채우고 출항해야 했다.

또, 뱃고동을 길게 울리며 아름다운 스트립 댄서의 기억을 뒤로한 채 핼리팩스항을 떠나 330여 해리 떨어진 보스톤항을 향해 간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 화물선, 핼리팩스발 영시 오십 분.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우리 배만이 고동 울리며 갈 줄이야.

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보스톤행 완행 화물선.

 

우리가 가수처럼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고 댄서처럼 춤을 잘 추지 못해도 서러워하거나 노여워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우리가 잘하는 것을 그들에겐 젬병일 수 있다.

그러니 넓게 생각하면 세상은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지금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고, 내가 있는 이곳이 제일 좋은 곳이라 생각하고 살면 세상 부러울 게 뭐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