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배턴루지항의 돔회

부에노(조운엽) 2020. 6. 20. 08:14

 

배턴루지항의 돔회

 

 

음악 : When a man loves a woman https://www.youtube.com/watch?v=MUuNDb-nm5M

 

 

'HAPPY LATIN' 호는 미시시피강의 협수로를 따라 열 시간 넘게 거슬러 올라가니 루이지아나 주도 배턴루지의 곡물 사일로에 도착했다.

배를 붙이고 대리점과 수속관이 올라와 입항 수속을 했다.

도미니카 출항할 때 선원명부를 본사에 보내 미국 비자를 미리 받아 수속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바로 컨베이어가 선창에 붙고 밀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이삼일이면 삼만여 톤의 밀을 'HAPPY LATIN' 호에 가득 채워 출항할 것이다.

 

갑판 위 하얀 밀 먼지를 뚫고 혼자 육지 공기를 마시러 상륙을 나갔다.

배 붙이면 땅을 밟아야지 흔들리는 배 안에서 누워만 있을 건가.

허허벌판에 곡물 사일로가 있어 대부분 맨땅이다.

그래, 바로 이거야.

아스팔트 길보다 이런 비포장도로에서 흙을 밟는 것이 우리 선원들의 로망이다.

 

들판이 누렇게 변해 있다.

여기는 이모작이 가능한데 마침 추수 때인지 들판도 땅도 다 누렇게 보인다.

조금 걸으니 민가가 보였다.

그로서리 스토아가 어디 있는지 길 가던 효리 같은 아짐에 묻고 찾아갔다.

필요한 생필품과 안주 몇 가지를 사고 배로 돌아간다.

나올 땐 하늘이 맑았는데 이제 거무튀튀하게 변해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며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다.

어째 상륙 나가서 효리 닮은 아짐을 봐서 그런지 남희가 생각나며 이국의 흐린 날씨에 갑자기 김치전에 막걸리가 땡긴다.

 

선원이나 항공기 승무원은 어느 나라나 술, 담배는 면세이다.

버드와이저, 하이네켄 등 맥주 한 박스, 말보루, 켄트 담배 한 보루에 오륙 불 정도 했다.

약속한 시각에 선식이 와서 주부식과 면세품 주문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밀러 맥주 회사에서 나오는 밀워키 맥주를 좋아해 따로 시켰다.

그리고 다음 기항지 소련에서 필요한 접대용 위스키를 주문했다.

공산국가나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나라에선 수속관에게 반드시 술, 담배와 선물이 든 접대 봉투를 하나씩 내민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끝날 입항 수속이 꼬투리를 잡아 질질 끌게 된다.

그런다고 욕할 게 뭐 있겠나.

예전에 우리나라 세관원이나 수속관도 노골적으로 더 하면 더 했지 만만치 않았다.

오죽하면 교통경찰이나 세관원 몇 년 해서 집 못 사면 바보라는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국제 경쟁 사회에서 남의 불행이 이익이 되는 아이러니한 사건이 비일비재하다.

세계 조선업 수주량 1위가 오래전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와 십 년 넘게 아성을 유지하다가 다시 저가 공세로 밀고 오는 중국으로 넘어가며 엎치락뒤치락했다.

그런데 중국에서 만든 2년생 LNG선이 호주 인근에서 엔진 고장으로 퍼졌다.

급히 기술자들이 날아가 수리를 했지만 기름과 LNG 연료를 병행해 쓰는 하이브리드 엔진을 두어 달 동안 고치지 못해 결국 중국 조선소로 예인해갔다.

조사 결과 고치는 비용보다 새로 건조하는 게 더 싸게 치인다는 보고서가 나와 선박을 해체했다.

배 가격이 척당 수천억 원 하고 이십여 년 가까이 운행하는 LNG선을 단 2년 만에 폐선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다.

그리고 보통 몇 년 잘 굴리다가 배에 고장이 나기 시작할 때 얼른 팔아치우고 돈을 더 보태 새 배를 사는 게 부자 선주의 관행인데 이게 보기 좋게 깨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세계 선박 바이어가 중국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최근 카타르에서 고가의 LNG선을 한국에서 백여 척 수주한다는 보도가 나온 배경에는 그런 사건이 있었다.

또 최근 선박 결함으로 보험료를 청구하는 배의 7~80%가 중국에서 만든 배라나.

한 조선업 연구원이 말하길 중국은 빠르게 발전하는 LNG 연료 추진선 등 새로운 기술과 규제가 강화될수록 중국 조선업계는 더 빠르게 무너질 거라 진단했다.

이럴 때일수록 자나 깨나 산업 스파이를 조심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상륙 나갔던 기관장이 비를 맞고 돌아오면서 중국 마트에서 싱싱한 돔 횟거리를 사 왔다고 캡틴과 같이 먹자고 한다.

옛날 어른들은 여름철에 비가 내리면 회를 먹지 말라고 했다. 

비 오는 날에 회를 먹지 않는다는 말은 글쓴이도 젊었을 때 들었던 것 같다. 

도대체 왜 비가 오는 날 회를 먹는 것이 문제가 될까. 

아직도 비가 내리면 노래 가사에 나오는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으란 말인가.

예전에 비가 내리면 재래시장 안은 검은 진창이 되어 엉망이었다.

게다가 냉장, 냉동 시설도 별로 없었다.

냉장 시설이 재래시장에 나온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시장에선 길바닥에 생선을 진열해놓고 팔았고, 큰 식당이 아니면 아이스박스에 생선이나 고기를 넣어서 보관하곤 했다.

여름이라도 비가 오는 날이면 따뜻한 음식이 당기는 경우가 많았다. 

비가 계속 내리면 어선은 조업을 나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여름철에 폭풍주의보가 해상에 내려지면 며칠 동안 바다에 나가지 못했고 싱싱한 생선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는 비브리오 등으로 식중독이나 배탈이 염려되어 대부분 회를 먹는 건 꺼렸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생선을 수족관이나 냉장고에서 싱싱하게 보관할 수 있고, 예전 보다 식당의 위생 관념이 훨씬 나아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