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선수가 선미 보다 높아야 잘 나간다.
머리 처박은 화물선과 미국 역사의 민낯
음악 : We shall overcome, Joan Baez https://www.youtube.com/watch?v=nM39QUiAsoM
"1항사님, 밸러스트가 안 나갑니다."
3항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1층 화물 당직실에 있는 1항사에게 보고한다.
"쓰발, 기관실에선 뭐라카노?"
"네, 화물이 순식간에 쏟아지니 배가 빨리 가라앉아 수압 때문에 안 빠진답니다."
잠시 생각하던 1항사가 알았다고 말하고 급히 캡틴에게 보고하러 뛰어 올라갔다.
밸러스트는 빈 배나 중량이 많이 나가는 화물을 실을 때 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선저 탱크에 싣는 바닷물을 말한다.
옛날 목선 시절에는 배 바닥에 돌을 실었다고 한다.
"선장님, 밸러스트가 안 빠진답니다."
노련한 캡틴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떡인다.
"그럼, 1항사! 청수 받는 것 멈추고 도로 빼 버려요. 내가 기관장에게 선수 기름을 다 선미 쪽으로 이송하라 할 테니... 그리고 기름을 지브롤터 갈 수 있는 만큼만 실어야겠네. 그러면 화물을 얼마나 실을 수 있나 계산해봐요. 5% more or less 감안하고..."
배에서 먹는 물은 육상에서 받는 수돗물과 바닷물로 엔진을 식힐 때 나오는 증류수 두 가지가 있다.
그런 조수기에서 만든 물은 미네랄이 없는 순수 증류수이다.
중동에서 기름보다 비싸다는 육상 물을 받기 힘든 대형 유조선을 오래 타면서 이 증류수를 계속 마시면 머리가 빠지고 이가 흔들거리며 맹구 비슷하게 된다.
찔끔찔끔 나오는 밸러스트 물을 계속 빼면서 청수를 안 받고 최소 기름만 실은 우리의 'HAPPY LATIN' 호는 배턴루지항을 출항하여 소련을 향해 선수를 돌렸다.
화물은 근근이 계약량을 실었다.
선주에게 배가 다운 바이 더 헤드가 됐다고 보고했다.
배 선수가 처박히면 배가 잘 안 나가고 기름이 많이 들어간다.
항해하면서 선수 선창에 남은 밸러스트를 빼고, 선수의 남은 물과 기름을 먼저 쓰면 선수가 조금씩 올라올 것이다.
중간에 지브롤터에서 급유하기 위해 몇 시간 정박해야 한다.
선장의 빠른 판단이 아니었으면 화물도 제대로 못 싣고 배가 제 속력을 못 내 기름만 많이 들고 도착은 더 늦어질 뻔했다.
보통 이런 경제 운항이 안 되는 사고가 나고 재수 없으면 국적선에서는 책임자들이 문책당할 수도 있다.
'HAPPY LATIN' 호는 미국을 빠져나와 푸른 대서양 망망대해에 들어섰다.
앞으로 이십여 일은 더 항해해야 구소련에 도착할 수 있다.
하역항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지브랄타 도착하기 전에 북해로 가든지 아니면 지중해를 통과하여 흑해로 갈지 결정될 것이다.
또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반복된다.
그러나 또 하루 세끼 밥은 묵어야지.
모처럼 싸롱 사관이 같이 식사하는 일요일 점심시간.
금방 출항한 미국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보통 미국 여자에 대한 이야깃거리는 별로 없었다.
고작 메릴린 먼로가 이쁘니 동양미인 효리가 더 이쁘니 정도였다.
쭉쭉 빵빵 잘 웃는 중남미 아가씨들이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말이지 미국이 이렇게 천조국이 된 건 말이지..."
캡틴과 기관장이 적당히 뻥을 섞어가며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배 엔진은 쉼 없이 돌아가고 세월은 가는데...
북미에는 오래전부터 원주민이 오대호와 미시시피강 주변에 살면서 그들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었다.
이들 원주민 부족들이 때로는 전쟁을 하다가 평화로운 이웃사촌으로 살며 연합부족의 형태였는데 상당히 민주적이었다고 한다.
이는 후에 벤저민 프랭클린과 조지 워싱턴이 배워 연구하였고 미국 헌법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원주민의 전설에 모든 부족이 무기를 모두 한 나무 밑에 묻었는데, 흰머리수리가 날아와 나무 위에 앉아 울었고, 이를 본 한 원로 추장이 '수리가 우리들을 항상 지켜 보고 위험한 상황은 우리에게 알릴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 미국의 상징이 흰머리수리가 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콜럼버스가 북미에 발을 디디고 원주민의 대부분은 남부에 상륙한 스페인군과 동부에 들어온 영국군에 의해 학살되거나 살던 곳에서 쫓겨난다.
이후 미국과 인디언의 생존 전쟁으로 이어졌다.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플리머스에 도착한 춥고 배고픈 청교도들이 건설한 식민지가 불어나 미국 동부 13개 주의 식민지들이 이루어졌을 때 본국과 불화가 생긴다.
재정 문제가 나빠진 영국이 치안 유지비를 식민지에 부담 시켜 인지세를 내라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엔 관계 개선을 원하였을 뿐 독립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급진파가 여론을 장악하면서 렉싱턴 전투를 기점으로 미국 독립전쟁이 터진다.
영국은 독립을 막기 위해 많은 군대를 파견한다.
이에 맞서서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독립군을 결성, 자발적으로 참여한 민병대와 함께 독립전쟁이 벌어졌다.
독립군은 프랑스와 연합하여 당시 세계최강이던 영국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거둔다.
이 와중에 프랑스는 너무 많은 전비를 써 훗날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한다.
독립 전쟁 직전에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 미국인들은 홍차 대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영국 상인이 인도와 중국에서 가지고 오는 차 보다 중남미에서 생산된 커피를 미국 상인들이 직접 들여오는 것이 훨씬 쌌기 때문이었다.
결국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여 1787년 미국 헌법이 제정된다.
미국의 국기에 13개의 줄이 그려진 게 바로 이 시대에 연방에 가입한 주가 13개였기 때문이다.
이후 독립국 미국은 1803년 거대한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헐값에 샀다.
당시 유럽에서 전쟁하며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나폴레옹에게 루이지애나 매각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 후 멕시코와 전쟁을 치러 멕시코 북부를 모두 날름했다.
1867년에는 러시아 제국과 협상으로 알래스카를, 1898년에는 하와이 공화국 합병 등으로 영토를 더 넓히게 된다.
19세기 내내 미국은 먼로 독트린으로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불간섭과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 식민지화 대신 통상 위주의 외교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러 서부 개척이 끝나고 북미 대륙에서 더 땅 따먹을 게 없자 태도를 바꾸어 미국, 스페인 전쟁으로 1898년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를 짭짭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과 밀약으로 조선을 일본에 넘기는 데 일조했다.
그사이 북미 원주민들과 전쟁이 계속되어 원주민들은 거의 죽고, 살아남은 일부 후손들은 보호구역에 갇혀 지내게 된다.
어느 나라나 흑역사가 있지만,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라는 곳에서 벌어진 이런 사태는 현재 미국인들 중에도 반성하는 사람이 꽤 있다고 한다.
'인디언'이라는 명칭이 좀 더 이들을 존중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대체된 것도 좋은 현상이다.
지금도 원주민 보호구역은 유지되고 있고, 정부는 그들에게 세금을 걷지 않고 지역에 따라 지원금을 주기도 한다.
사회 불만 해소 차원에서 식량과 술, 카지노를 지원해주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 문제가 되어 알코올, 약물 중독 문제, 빈곤, 낮은 교육 수준, 미국 사회와 교류가 거의 없는 고립성 등 원주민의 삶은 대체로 형편없다.
또한 원주민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선거권을 주지 않는다.
미국 정부는 여러 주가 연방정부를 구성한다.
한편으로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힘 싸움이 항상 있었다.
각 주는 연방정부에 동등한 권한을 요구하였으나 참혹한 남북전쟁을 겪은 후 바뀌었다.
노예제에 대한 갈등으로 인한 경제정책 갈등은 결국 남부가 남부 연합으로 독립하고 전쟁이 터진다.
초기에는 리 장군이 지휘하는 남군이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계속 승리를 거둬 독립을 쟁취할 것처럼 보였지만, 그랜트 장군 등이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진하는 남부군을 물리치면서 전세는 역전되어 승리는 북부로 돌아갔다.
영토는 늘어났고,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였기에 이민자들에게 관대해 유럽에서 많은 이민자를 들어와 인구도 날로 증가했다.
이렇게 꾸준하게 발전한 19세기 즈음에는 경제적으로 유럽 전체와 맞먹을 정도로 발전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에 우리 선조는 짚신 신고 초가집에 살 때 100층이 넘는 초고층 빌딩이 들어섰다.
이때부터 미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식민지였던 미국이 갓 독립한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고, 청나라와 일본에 군함을 몰고 가서 개국시켜버린다.
미국의 대외 장악이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이루어진 원인은 미국의 막강한 해군력과 영국 해군의 대서양 철수에 있다.
영국은 신생 독일 제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 대서양 해군 전력으로 독일에 위협을 주려고 이동했고 라틴아메리카는 그때부터 완전히 미국판이 되었다.
1920년대 미국의 경제 규모는 유럽 전체를 추월하여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세계의 중심이 스페인,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간다.
제1차 세계 대전 특수로 천문학적으로 늘어난 생산력을 내수에 돌리며 중산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미국은 1901년에 이미 보스턴에 지하철이 다녔고 1920년대에 중산층들의 마이 카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악성 재고가 늘어나다가 결국 1929년에 주식시장의 거품이 붕괴하면서 세계 대공황을 맞게 된다.
그 후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으로 대공황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한편 1930년대 후반에 경제는 상당히 회복되었는데, 이후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미국 경제에는 다시 호경기가 찾아오게 된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이 제국주의 야망과 영토 확장을 위해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이에 열 받은 미국은 석유 수출을 끊겠다고 협박하였으나 오히려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 미 태평양 함대를 공습하여 미국인들은 격분케 했다.
펄 하버 공습 이후 미국은 전국적으로 전시체제에 들어가 유럽과 태평양 양쪽에서 전쟁을 치르며 더 많은 양의 물자와 무기를 만들어 동맹국에 제공했다.
결국 전쟁은 대승했으며, 이때 유럽 열강들이 전쟁의 피해로 초토화되어 미국이 세계의 맹주가 된다.
그러나 소련이 주변국들을 공산주의 정권으로 만들며 미국과 힘겨루기를 했다.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은 민주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국가로, 소련은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국가로 양분됐고, 냉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에서는 공산 세력이 득세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UN에서 적극적으로 UN군 파병을 건의한다.
때마침 소련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을 거부한 상태라 소련을 제외한 전 상임이사국들이 찬성하여 UN군 파병이 이뤄졌다.
참전 초기에는 고전했지만 인천 상륙작전으로 결국 전세를 역전시키고 승전했다.
미국은 마셜 플랜이라는 막대한 경제 원조로 서유럽 경제를 살리고 아시아권 반공 국가들 필리핀, 대만, 일본, 한국 등을 지원하여 부흥하게 된다.
당시 영국 국채의 대부분이 미국 것이었다고 한다.
이 시기가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이다.
1950년대 미국 중산층의 삶의 질 수준은 대단히 높은 편으로 고등학생들도 자가용을 끌고 다닐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사정은 1960년대에 들어가서 달라지는데, 밖으로는 소련이 인공위성을 띄우고 흐루쇼프가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니 마니 하면서 복잡하게 된다.
이에 미국은 아폴로 계획을 세우고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등 공세적으로 나섰으나 도리어 점차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히피를 비롯한 뉴웨이브 운동이 일어났고, 미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 등의 소식이 본토에 알려지면서 반전주의가 확산하여 여론은 최악으로 갔다.
닉슨 대통령 때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미국은 소련과 티격태격하던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데탕트와 핑퐁 외교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간다.
우연인지, 군비경쟁의 폐해인지 아빠 부시 대통령 때 구소련의 붕괴와 미국에 도전하던 일본 경제의 몰락으로 미국은 이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미국의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민권 운동이다.
50년대 경제 호황부터 90년대 이전까지 중산층 이상에는 90% 이상이 백인이었으며, 유색인종은 10%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 인권 또한 형편없어 낙태는 합법화되지 않았으며 1959년까지 미국에서는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이 불법이었다.
그 때문에 자유에 대한 욕망이 커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즉 미국 흑인들의 민권운동은 지금의 미국 민주주의의 기틀을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현대적인 개념의 시민 불복종 운동의 형태, 즉 정의롭지 못한 법에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마틴 루터 킹의 흑인 민권 운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들이 해방된 19세기에 수많은 흑인이 자유의 몸이 되자 노예들이 일하던 남부의 경제는 노동력 부족으로 난리가 났는데, 수정 헌법은 노예들을 해방했지만, '범죄자들의 강제 노역은 예외로 한다'라는 조항이 있어 사소한 것으로도 흑인들을 체포해서 노예나 다름없이 강제 노동을 시켰다.
또한 KKK가 기승을 부려 애먼 흑인들을 패고 죽이기도 했다.
곧 남부 외의 주들의 손가락질과 세계적인 비난이 미국에 가해지자, 이러한 흑인에 대한 폭력은 조금씩 줄었고, 대신 '합법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흑백 분리의 시작이었다.
식당, 극장, 학교, 심지어는 화장실까지도 백인용과 유색인용으로 나누고 투표권, 집회권 등을 주지 않았다.
이를 어기거나 반발하는 흑인에게는 백인들의 보복이 가해졌고, 그렇게 미국의 흑인들은 피눈물 나는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955년, 한 흑인 여성이 퇴근길에 버스에 탔다가 기사가 백인 뒤편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이를 거부했고 버스 기사는 경찰을 불러 흑백 분리에 관한 몽고메리시 조례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녀는 차별에 분노하여 버스를 보이콧하자고 시위했고 많은 흑인이 동참했다.
앨라배마주는 버스 보이콧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을 탄압하고 체포하는 등 강경하게 나왔다.
그러나 흑인들은 보이콧 운동을 이어나갔고, 결국 1956년, 연방대법원은 '버스에서의 흑백 분리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흑인민권 운동의 시발이었고, 이후 흑인민권 운동은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버스 보이콧 운동을 시작으로 민권 운동가들은 흑인 아이도 백인 어린이들과 함께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시위했고, 백인 폭도들의 협박과 폭력에 저항했다.
또한 백인 전용 식당, 영화관에 앉아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앉아있는 연좌 농성인 '싯인(Sit-in)'이 시작되었다.
흑인민권 운동이 절정에 이른 것은 1963년 워싱턴 행진으로 무려 25만 명이 참가하였고 킹 목사의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이 미국 전역에 생중계되었다.
그 후 1965년에 존슨 대통령은 그 어떤 이유로든 투표권을 제한하는 것을 금지하는 연방 투표권법에 서명했다.
흑인민권 운동은 흑인들의 투표권을 보장하였고 인종차별을 완화하는 계기로 되었다.
물론 완전히 인종 갈등이 가라앉지는 않아서 이후에도 LA 폭동 등 인종 갈등이 계속 생겼고, 현재까지도 미국 경찰의 흑인에 대한 과잉진압을 규탄하는 'Black lives matter(흑인들의 목숨도 소중하다)' 등의 인권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1991년에 이라크 후세인이 벌린 걸프 전쟁에 미국이 참전하였고,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아빠 부시는 엄청나게 지지도가 오르지만 경제 문제 등에 빌 클린턴에게 정권을 넘기게 된다.
그리고 아들 부시 때 시작된 미국,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전 세계적인 반미감정을 초래했으며, 이슬람 극단주의에 9.11테러가 터지게 된다.
그러다가 미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 대빵이 나왔다.
미국 역사가 이삼백 년밖에 안 됐다고 우습게 볼 것은 아니다.
수천 년 역사를 이어오는 우리 조상님은 백 년, 이백 년 전에 뭘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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