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 마르소
책받침 공주와 나폴레옹 황제
음악 : La Maritza, Sylvie Vartan https://www.youtube.com/watch?v=xhstAjPjdJM
우리가 어렸을 때 프랑스 백작 달타냥과 삼총사, 잔 다르크 위인전, 영웅 나폴레옹 황제 등을 보면서 가보지 않은 세계와 위인을 동경하며 자랐다.
프랑스 작가 뒤마가 쓴 삼총사의 명대사 중 하나는 삼총사가 칼을 하늘로 모으고 외치는 '모두는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모두를 위하여(Tous pour un, un pour tous.)'이다.
한국에는 프랑스어 대사보다는 영어 버전인 'All for one, one for all.'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HAPPY LATIN' 호는 지중해의 마르세유항 남쪽을 항해하고 있다.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 혁명 때 마르세유 의용군들이 '마르세유 군단의 노래'를 부르며 파리로 진군했다는데 그게 애국가가 됐다.
캄캄한 바다에 아스라이 먼 육지 불빛을 보다가 방에 들어와 부식 실을 때 선식에서 준 헤네시 나폴레옹 꼬냑의 깊은 향을 온더록으로 한입에 털어 넣었다.
지브롤터에서 상륙 나갔다가 사 온 설 말린 지중해 가자미를 살짝 구워 마요네즈 간장에 찍어 먹는다.
비린내가 없고 고소하니 나막스같은 감칠맛이 난다.
카세트에서 실비 바르땅의 '라 마리짜'가 흘러나온다.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그녀만의 독특한 음색이 경쾌하게 흐른다.
파리에 센강이 흐르듯 실비 바르땅의 마음에는 고향 불가리아의 마리짜 강이 자유를 찾아 흐른다고...
포도주를 증류한 후 오크통에서 숙성한 브랜디 중 꼬냑을 최고로 쳐준다.
브랜디의 시초라 할 수 있는 것은 14세기 초, 스페인의 연금술사가 실험 도중 우연히 포도주를 증류시키면서 만들어졌다.
과일을 재배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브랜디를 생산한다.
프랑스인들은 지역마다 나는 브랜디를 숙성 연도에 따라 VS, VSOP, NAPOLEON, XO 급으로 나누었다.
꼬냑과 알마냑 지방에서 나는 브랜디를 으뜸으로 쳐주고 오크통에서 10년 넘게 숙성한 나폴레옹 급 이상은 향도 좋고 가격이 비싸다.
포도주는 병에 저장하는데, 브랜디는 오크통 속에서 맛이 들게 되고 숙성 기간이 길수록 품질이 좋아진다.
병에 담은 후에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맛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은 성질이 급해 10년 이상 숙성하고 보관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낯선 지중해 바다에서 한잔하며 프랑스 아래를 지나니 어렸을 때 뿅 갔던 책받침 공주 소피 마르소가 떠오른다.
청순가련한 미모로 대한민국 책받침 청소년을 사로잡았던 하이틴 스타.
저 바다 너머 어딘가에 그녀가 산다.
헤엄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또, 맛이 가기 시작하지...
이민족의 침입으로 분열되어 있던 프랑스는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왕이 된 후부터 프랑스 왕국의 시작으로 본다.
루이 카페 왕조의 프랑스 왕국은 각 지방 영주들의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잉글랜드와 영토 분쟁으로 백 년 동안 지지부진한 전쟁이 벌어졌다.
민중의 딸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전세는 역전되고 잉글랜드는 쫓겨나게 된다.
16세기에 인구 천오백만 명이 넘게 된 프랑스는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큰 영토와 인구를 보유하게 됐다.
1789년 대혁명 이전까지 프랑스 왕실은 사치와 계속된 전쟁으로 재정난에 시달렸고 귀족에게까지 세금을 부담시키자 반발하여 삼부회를 소집했는데 투표 방식에 이견이 있어 평민 대표들이 투표하지 못하도록 막자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루이 16세가 이를 해산시키려 하자 분노한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고 파리를 점령했다.
루이 카페 16세와 황후 마리 앙투아네트 등 기요틴에서 목이 잘린 사람이 4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이 시기가 프랑스가 가장 위세가 있던 시절로 짜리몽땅의 대명사 나폴레옹 황제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 이탈리아 등과의 전쟁에서 연승하며 황제에 오르나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했다.
결국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프랑스는 왕정으로 돌아간다.
몇 차례의 체제 변화 끝에 나폴레옹 3세가 다시 황제에 오른다.
나폴레옹 3세는 적극적으로 아프리카, 인도차이나 등지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제국주의 정책을 밀고 갔다.
하지만 프로이센 전쟁에서 패배해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고, 파리가 포위되어 파리 시민들이 쥐까지 잡아먹는 처절한 상황이 벌어졌다.
1870년 제3공화국 성립 후 프랑스는 산업의 발전으로 풍족해지고 만국 박람회를 개최하면서 번영했다.
그러나 주로 자본가, 지주 등만 이런 혜택을 누렸고 노동자들과 식민지 국민들은 계속 착취를 당하는 상황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프랑스가 독일에 승리했지만 젊은 세대가 거의 죽고 다치는 참혹한 일을 겪어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마지노선을 파고 방어하는 전략을 썼지만, 독일은 벨기에의 아르덴 숲을 건너 우회해서 프랑스를 점령했다.
이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으로 주권을 되찾았다.
그렇지만 전쟁으로 얻은 피해와 강대국이 된 미국, 소련의 영향력에 대부분의 식민지를 모두 독립시키고 본토만 남게 된다.
알제리, 베트남 등의 식민지를 놓치지 않으려고 전쟁까지 벌였지만 패배하고, 샤를 드골이 정권을 장악하여 프랑스 제5공화국이 생긴다.
미소 냉전 기간에 프랑스는 NATO를 탈퇴하고 미국과 영국 중심의 유럽 질서에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NATO에서 탈퇴한 원인 중 하나는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을 미국과 영국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국방비의 상당 부분을 핵 개발에 쓰는 강경책을 써 핵을 만들고 독자 노선으로 갔다.
근대 유럽은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해서 나폴레옹 전쟁으로 끝난 정치 혁명 그리고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경제구조의 대변혁이 어우러져 완성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 그는 누구인가?
학생 때 '내 사전에 실패는 없다.'라는 명언과 전쟁터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는 것으로 어린 우리를 3당4락의 굴레에 잠 못 자게 했던 인물.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 카이사르 장군 뒤를 잇는 불세출의 정복자이자 전쟁의 신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황제는 세계사에 우뚝 선 인물이었다.
한국에서도 그의 유명세 덕에, 설령 프랑스를 잘 모르는 사람도 잔 다르크와 나폴레옹의 이름은 알고 있다.
히틀러와 나폴레옹이 비교되는데 히틀러는 12년간 독재 권력을 휘두른 후 독일에 해골과 쓰레기만 남겼지만, 나폴레옹이 프랑스에 남긴 행정체제와 시민개혁만으로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하나로 평가된다고 한다.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만든 나폴레옹 법전은 현재도 유럽 법체계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전까지 프랑스 법률 체계는 아주 복잡하여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이걸 나폴레옹 법전이 한 방에 해결했다.
또한 이 법전의 편찬으로 절대왕정의 유럽에 시민 평등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나폴레옹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 로마 대법전과 함께 세계 3대 법전으로 불리며, 나폴레옹 본인도 전 유럽을 제패한 것보다 나폴레옹 법전 편찬을 더욱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법의 대부분이 나폴레옹 법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폴레옹에 대해 '영웅이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간다.'는 명언이 나왔다.
1814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고 프랑스에 돌아왔을 때 그가 20년 동안 아끼던 부하들과 측근 대부분이 그를 떠났다.
외무대신은 그를 독살하려 했고, 참모총장은 항복문서에 조인하도록 협박했으며, 그의 첫 아내였던 조세핀은 전 남편의 몰락을 바라보며 러시아 황제를 맞이했고, 황후 마리 루이즈는 멀리 도망가고 말았다.
친인척들은 황제의 후광만 누리려고 했지 도움이 안 됐다.
그는 평복으로 신분을 숨긴 채 프랑스를 벗어났다.
나폴레옹 황제가 엘바섬에 유배됐다가 세상 떠날 때까지를 보면 인생의 무상함과 권력의 덧없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것을 보면 인간의 노후를 평안하게 해주는 것은 가족, 친지 그리고 이웃 간에 따뜻한 사랑이지 권력과 돈이 전부가 아닌 모양이다.
'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그리고 비너스 여신 (0) | 2020.07.15 |
---|---|
십자군 전쟁과 정조대 (0) | 2020.07.12 |
지중해 참치와 미녀 (0) | 2020.07.07 |
대영제국의 지브롤터 억지 (0) | 2020.07.02 |
심해 생물과 북회귀선 (0) | 2020.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