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라스팔마스 항구
나이지리아 해적과 라스팔마스 전설
음악 : La Bamba https://www.youtube.com/watch?v=jSKJQ18ZoIA
테마항에서 밀을 다 풀어준 해피 라틴호는 빈 배로 희망봉을 향해 간다.
5년마다 있는 정기검사를 받기 위해 드라이 독을 수배하는 동안 한 항차를 더 할 거라고 본사에서 전문이 왔다.
화물이 많은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가려나.
독은 어느 나라로 갈까?
선수를 정남으로 돌려 나이지리아에서 먼 공해로 항해한다.
나이지리아는 소말리아, 말래카해협과 마찬가지로 묵고살기 힘든 백성들이 해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중화기와 로켓포로 무장하고 난폭한 나이지리아 해적들은 스피드보트로 잽싸게 이동하여 민간 선박을 제압하고, 선원들을 육상으로 납치해간다.
소말리아 해적들은 총을 쏘며 납치할 배에 올라가서 선원을 제압하고 몸값을 받을 때까지 배를 장악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돈이기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도 크게 겁먹을 필요는 없다.
심지어 나올 돈이 없다고 판단되면, 인질을 마냥 먹여 살리기 힘드니까 몇 대 조 패고 그냥 풀어준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글쓴이 말 믿고 만용을 부리면 곤란하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오만 근해에서 납치한 요트의 미국인 인질 4명이 미 해군 구축함이 추적하자 무참히 살해된 경우도 있다.
그들이 해적들에 의해 살해당한 첫 번째 인질이라 한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대 독립 당시에 많은 인구와 풍부한 자원으로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성장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내전과 갈등 속에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으로 남았다.
지금 인구는 2억이 넘고 아이를 많이 낳으니 조만간 미국 인구를 추월할 거라고 한다.
나이지리아에서는 부패와 빈곤, 석유 이권, 기독교 이슬람 간 종교 갈등 등 문제가 많다.
툭 하면 폭탄 터지고 조용 할라치면 총소리가 나 애먼 민초만 죽어난다.
나이지리아는 무역 사기가 심하다.
나이지리아로 수출했는데 물건만 받고 결재를 안 해주고 튀거나, 나이지리아에서 수입하는 기업의 경우 돈을 보내고 나면 연락이 안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전반적으로 치안이 매우 안 좋으며, 빈부 차와 인신매매 등 인권의 사각지대이다.
아예 아기 공장을 만들어 애를 사고팔고, 인신매매 조직이 10대 소녀를 유인, 성폭행하여 애를 만들어 팔아먹는다.
이태원에 사는 나이지리아인들은 대포폰 판매와 삥 물건 중개상으로 유명하고, 미국에서는 신분 세탁이나 도용, 신용카드 사기단이 많다고 한다.
이메일 피싱 사기도 빈번하다.
수법은 영문 스팸 메일을 대량 발송하여 '나는 돈 많은 정치인 내지는 부자의 유산상속자이다. 현금을 만들어야 하는데 당신이 도와주면 우리가 받을 거액에서 몇 퍼센트의 수수료를 주겠다.'고 꼬신다.
어쩌다 걸린 호구에 더 많은 돈을 보내면 더 많은 보상이 있을 거라는 메일로 꾀어 돈만 받고 사라진다.
잘 아는 재미 교포도 눈에 콩깍지가 끼었는지 바짝 달았다가 돈만 뜯기고 벙 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게 잘되면 몇만 불 준다고 자랑하더니만, 세상에 거저가 어디 있냐 말이지.
그런 사기를 나이지리아인들만 치는 건 아니다.
아프리카 많은 나라로 퍼져서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서도 영어나 불어가 되는데 취직이 안 되는 젊은이들이 PC방에 죽치고 앉아 일확천금을 노리고 이런 사기를 친다.
아예 다국적 사기단도 있다고 한다.
메일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 글쓴이도 그런 메일을 여러 번 받았다.
나이지리아 해적을 피해 기니만 바깥쪽으로 항해하니 가끔 조업하는 큰 어선들이 보인다.
태극기를 단 어선을 보고 반가워서 항해사끼리 VHF 무선전화를 한다.
그 배는 조업한 지 일 년이 넘었고 얼추 만선하여 라스팔마스 독으로 배를 수리하러 간다고 즐거워했다.
한바다에서 중간에 만선이 되면 냉동운반선이 와 실어 가고 기름, 주부식 그리고 가족 편지를 주고 간단다.
그럼 근 일 년 동안 고기만 잡고 땅을 못 밟아 봤다는 이야기니 같은 선원 입장에서 짠한 생각이 들었다.
모로코 해안에서 150km 정도 떨어진 대서양의 스페인령 라스팔마스에 한국 수산개발공사의 원양어업 전진기지가 세워진 건 60년대 말이었다.
북태평양 어장에서 명태잡이로 재미를 본 우리 정부는 라스팔마스에 진출했다.
당시 어선 한 척 사기 바빴던 정부는 한일 청구권 자금과 차관을 얻어 배를 샀다.
라스팔마스엔 이미 일본 선단들이 진출해 있었는데 선원 임금 상승으로 철수를 시작할 때였다.
한국 선사들은 일본이 남긴 낡은 배를 사 조업했다.
우리나라 선원들은 어디에 무슨 고기가 있는지 귀신같이 알아냈고 밥 먹듯 밤샘 조업을 해 어획량이 다른 나라 어선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원양어선을 타면 돈 번다는 소문이 나자 너도나도 없는 백이라도 써 배를 타려고 했다.
당시 원양어선 선원들은 3년 계약이었는데 귀국할 때면 부산에 집 한두 채 마련할 목돈을 벌었다고 한다.
라스팔마스 전진기지는 전성기 때 원양어선 이백여 척에 선원 만여 명과 교민 오천 명 등 만오천여 명이 좁은 라스팔마스에서 북적댔다.
라스팔마스 선단들은 88올림픽 전까지 이십여 년간 무려 1조 원 이상을 벌어 한국에 보냈다.
지금이야 한국 경제 규모가 커져서 그렇지만, 그 당시야 일억 불 수출했다고 나라님 이하 모두 경사 났다고 시민회관에 모여서 상 주고 난리 칠 때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들이 번 달러는 목숨을 담보한 대가였다.
라스팔마스 산 라자로 묘지 한쪽에 한인 위령탑이 있다.
대서양에서 조업하다 숨진 선원 이백여 명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다.
위령탑엔 '거친 오대양을 누비던 꽃다운 젊은이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망망대해 푸른 파도 속에 자취 없이 사라졌지만, 우리는 당신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쓰여있단다.
한번 조업 나가면 바다 위에서 몇 달을 떠 있는데 식수가 부족해 세수는 바닷물로 했고 비가 오면 빨랫비누로 몸을 씻었다.
적도 부근에서 조업하지만, 선실엔 에어컨, 선풍기도 없고 발도 펴지 못하는 작은 공간에서 웅크려 새우잠을 잤다.
고기 떼를 따라 남의 나라 영해에 들어갔다가 경비정에 잡히면 졸나게 터지고 거액의 벌금을 물고 풀려나기도 했다.
라스팔마스 한인들은 현지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라스팔마스주 공보관은 '꼬레아노들의 근면함과 도전 정신은 큰 감명을 주었다. 이들은 라스팔마스 경제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한인회장은 '밖에서 살면 누구나 애국자가 되는 것 아니냐?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모국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서부 사하라에 파견된 국군 의료지원단 장병들에게 때마다 김치와 고추장, 된장을 챙겨준 이들도 라스팔마스 한인들이었다.
라스팔마스 어머니회는 사고로 돌아가신 선원들의 자식을 돌봤고, 한인 2세와 현지인을 위해 장학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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