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 산 수 치 여사
콰이강의 다리와 아웅 산 수 치 여사
음악 : Bridge on the river Kwai https://www.youtube.com/watch?v=6rjMyAkF828
2차대전 당시 구만여 명의 대영제국 육군이 삼만여 명의 대일본제국 육군에 항복하여 포로로 잡힌 정신 나간 전쟁으로 대영제국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수 세기 동안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영광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일제가 승승장구하며 대동아공영을 위해 버마와 인도를 또 먹으려고 영국군 포로를 동원해 만든 버마 철도가 있다.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로 알려진 이 철도를 만드는 중 많은 연합군 포로와 민간인 부역자들이 죽어 죽음의 철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1942년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은 버마로 병력과 보급품을 나르기 위해 철도를 만들려고 영국군 포로들을 강제 동원했다.
하지만 일본군 포로 수용소장이 장교까지 노동을 시키려 하자 영국 육군 중령 니콜슨이 제네바 협약 위반이라고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니콜슨을 뜨거운 열대 정글의 양철 독방에 가둔다.
니콜슨은 엄청 덥고 발 뻗고 누울 수도 없는 케이지에 갇혀서도 굽히지 않고 원칙대로 장교가 노역하는 것에 저항했다.
한 달 후 풀려난 니콜슨 중령은 인명 피해를 줄이고 군기 유지를 위해 다리 건설을 돕는다.
한편, 포로로 붙잡힐 때 중령이라고 계급을 속인 해군 수병 쉬어즈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지만, 계급을 속였던 사실이 들통나고 군사 재판에 갈래, 콰이강 다리 폭파에 나갈래?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특공대와 함께 작전에 나간다.
전쟁 중 일본군 장교와 영국군 포로와의 갈등을 그린 코믹한 영화이다.
콰이강의 다리 OST는 영국군 포로들이 행진하며 경쾌한 휘파람을 부는 멜로디가 많은 이의 귀에 익숙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과 독일이 전쟁 중에 상대국의 군인과 민간인들에게 막심한 피해를 줬다.
승전국들은 전쟁 중에 반인간적인 행동을 한 사람들을 전쟁 범죄자로 규정하고 포츠담에서 그에 대해 재판한다고 선언하였다.
A급 전범은 국제조약을 위반하여 침략전쟁을 기획, 수행한 사람들, B급 전범은 전쟁 관련 법을 위반하고 살인, 포로 학대, 약탈 등을 저지른 사람들, C급 전범은 명령에 따라 고문과 살인을 한 하급 병사들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A급 전범은 독일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재판받았고 B, C급 전범은 그들이 수용된 나라에서 재판하였다.
이렇게 처벌받은 B, C급 전범 중 조선인과 대만인 수백 명이 포함되었다.
조선인 150여 명 가운데 130여 명이 포로 감시원이었다.
그들은 식민지 백성으로 일본인이 아니었으나, 일본에 군무원으로 강제 동원되어 포로 감시원으로 일했다.
태평양전쟁 초기 일본이 동남아시아에서의 잇단 승리로 수십만 명의 연합군 포로들이 생겼다.
그래서 동원된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의 신분은 이등병보다 계급이 아래인 군무원이었다.
포로 학대 혐의로 호주 군사 법정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김종연 씨는 법정 진술에서 자신은 포로를 감시하는 일개 군속으로 일본군 사병의 지시를 받아 포로를 호송, 감시하는 일을 했으며, 자신이 포로와 강제 노역을 지휘 감독하는 재량권은 전혀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포로 감시원의 임무가 포로의 수용소 출입, 작업장까지 인솔, 탈주 감시 등이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포로 감시원들은 일제가 항복한 뒤 일본에 대한 연합군의 복수심으로 그리고 연합국의 옛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 주민의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려고 희생양이 되었다.
일본은 포로의 인도적 대우와 권리 등을 규정한 제네바조약에 조인했으나 비준하지 않았고, 지킬 생각도 전혀 없었다.
포로 감시원은 전부 조선인과 대만인을 시켰다.
일제는 포로 감시원에게 제네바조약이 있다는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포로 학대 혐의로 사형당한 조문상 씨는 포로 감시원들이 받은 교육은 덩치가 큰 서양인 포로를 다루려면 두들겨 패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 육군성은 연합군 포로를 강제 노동시킬 것을 지시했고, 전후 A급 전범으로 교수형 당한 도조 히데키 장군은 포로들을 놀리지 말고 무조건 일을 시키라고 명령했다.
그 와중에 조선 출신 포로 감시원들이 전후 전쟁범죄자로서 처벌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로 알려진 타이와 버마를 잇는 죽음의 철도 건설 현장이었다.
이곳에는 강제 노역에 동원된 연합국 포로와 천여 명의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이 있었다.
포로 감시 과정에서 먹을 게 부족했고, 과도한 노역과 학대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
이때 죽은 만 명이 넘는 연합군 포로에 대한 책임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조선인 포로 감시원에게도 돌아갔다.
월남전쟁 때 밀라이 학살 사건 같은 국제 전범재판에서도 상관의 명령에 따라 민간인을 죽인 사병은 처벌하지 않았는데 조선인 포로 감시원은 일본군 이등병보다도 못한 신분이었다.
죽지 않으려면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식민지 출신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이 수많은 포로 희생의 책임을 지고 감방에 가거나 사형당했다.
그들은 전범이자 대일 부역자라는 오명을 쓰고 고통받았고, 주변에서 무시당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일본 사회에서도 철저히 모르쇠로 일관해 궁핍 속에서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아무 힘없는 그들을 과연 누가 전범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영국이 식민 통치하던 버마는 군부가 집권하면서 국호를 미얀마로 바꾸며 수도 랑군을 양곤으로 개명하고 나중에 행정수도를 네피도로 옮겼다.
그래서 사마귀의 다른 이름인 버마재비가 미얀마재비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 망명 온 미얀마 민주화 운동권 인사나 일하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버마로 불러주길 원한단다.
버마에서 불교의 영향력이 워낙 커서 불교를 존중하지 않는 행위는 범죄행위로 처벌받는다.
불교 사찰에서 신발을 벗지 않고 들어갔다가 경찰서에 잡혀간 관광객도 있고, 불상 문신을 한 외국인이 불교 모독죄로 추방당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아열대우림 지역이라 오가기가 힘들어 지금도 많은 소수민족이 조상 대대로 자기 영역에서 살아왔다.
영국이 식민지 시절 자기 편의대로 버마에 묶어놓은 소수민족들은 독립하기 위해 수십 년간 버마 정부에 저항해왔다.
버마 독립 영웅 아웅 산 장군은 독립을 위해 소수민족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지지와 합류를 위해 노력하였던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소수민족들을 평등하게 대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아웅 산 장군 사망 후 군부 독재를 거치면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소수민족들은 독립운동을 재개했다.
아웅 산 장군의 딸 아웅 산 수 치는 소수민족과 버마족 통합의 대변자가 되었다.
버마 군부 독재에 저항한 수 치 여사가 이끄는 버마 민주 정부는 버마족의 지지도 우세했지만, 카렌, 카친, 아라칸 등 버마 내 소수민족들의 몰표에 정권을 바꿀 수 있었다.
의외로 이 소수민족들이 수 치 여사의 가장 큰 지지층이고 그들이 제일 증오하는 로힝야족을 옹호하는 것은 바로 실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 정부가 로힝야족에게 우호적으로 대한다면 민주 정부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군부가 재집권할지도 모른다.
버마에서는 로힝야족에 대한 온정적인 발언 한마디면 누구라도 소수민족들의 공적이 됨과 동시에 테러당할 수 있다.
로힝야족을 버마 정부가 보호한다면 아라칸, 카미족은 평화협정을 파기하고 다시 무장투쟁에 나설 것이다.
소수민족의 봉기는 연쇄반응을 일으키기에 또다시 전국적 내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버마의 모든 민족이 로힝야족을 증오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웅 산 수 치는 로힝야족을 옹호하는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버마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국부로 모시는 아웅 산의 딸 수 치 여사는 옥스퍼드대학교를 나와 영국인 남편을 만나 아들 둘을 낳고 교수인 남편을 내조하며 전업주부로 살았었다.
1988년에 어머니가 위독하여 버마로 귀국한 후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집회에 나와 뛰어난 연설로 대중을 감동하게 하면서 갑자기 버마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여사는 버마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야당 세력을 통합한 민주 국민동맹(NLD)을 창설하고 의장이 되었다.
수치가 주도한 민주화 운동은 네윈 장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으나 결국 군사정부에 의한 대량학살의 비극으로 끝났으며 수치는 가택 연금을 당했다.
1990년 버마 군사 정부는 서방의 압력으로 총선을 실시하였는데 수 치가 이끄는 NLD가 집권당을 누르고 압승했다.
그러나 군사 정부는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오히려 지도부 등 당원 수백 명을 잡아넣고 2010년에 이르기까지 정권 이양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독재를 해왔다.
1991년 수 치는 버마 민주화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노벨상 수상식 때 그녀는 여전히 연금 상태에 있어, 두 아들과 남편이 그녀의 사진을 들고 대신 참석했다.
2000년부터 유엔특사의 중재 아래 수 치는 군사정부와 정국 타개를 위한 비밀 협상을 벌여왔다.
2010년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은 버마 군정은 수 치의 가택 연금을 풀었다.
그녀가 잡혀가지 않고 가택 연금 조치에 그친 것은 국제 여론을 껄끄럽게 생각한 것도 있겠지만, 버마의 국부라고 할 수 있는 아웅 산 장군의 딸이라는 점도 컸을 것이다.
만일 여사를 잡아 가두면 버마 군부는 그날로 국부인 아웅 산 장군을 부정해버린 거나 다름없기에 오히려 내부의 동요로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 치 여사가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을 방관하고 있어 비판받고 있으며, 노벨재단이 버마 실권자 수 치 국가자문역 겸 외무장관에게 유감을 표했다.
로힝야족 문제는 영국의 버마에 대한 식민 시대부터 이어지는 것이라 수 치 여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영국인들은 버마를 식민통치하며 농장을 경영했다.
그들은 이주시킨 인도인들에게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소유권도 넘겨주었다.
땅의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는 건 벵골의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이었고 반면에 로힝야족은 버마족과 모든 소수 민족의 적이 되었다.
이들이 영국으로부터 불하받은 농장은 버마인에서 빼앗은 땅이었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미얀마인들은 영국으로부터 해방을 기대하고 일본에 협조적으로 대했다.
영국에 의해 땅을 빼앗기고 벵골인에도 차별받던 처지가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미권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이루겠다는 일본군은 점령지 내 벵골인들의 농장을 다시 버마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이에 이미 그 지역에서 자리 잡고 살아온 로힝야족도 자연히 일본과 버마인들에게 적대적이었다.
영국은 이런 분노를 대일 전에 써먹을 수 있겠다고 판단하여 로힝야족을 무장시켰다.
하지만 이런 영국의 의도와는 달리 로힝야족은 일본군과 싸우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고, 농토를 돌려받은 버마인을 공격하여 1942년 아라칸인들을 무려 2만 명이나 죽였다.
이에 분노한 아라칸인들이 일본군에 지원을 요청하자 일본군 역시 아라칸인에게 무기를 지원하였고 아라칸인과 카렌족은 로힝야족 5천 명을 죽였다.
로힝야족은 전 세계에 220만 명이 사는데 버마에 130만 명이 살고 방글라데시, 인도, 파키스탄에도 있다.
버마 정부는 일부 소수 민족에 대해서 아직도 매우 적대적인데, 대표적으로 무슬림인 로힝야족에 대한 제노사이드가 국제 문제가 되고 있다.
버마는 로힝야족을 아예 인도, 방글라데시로 추방해 자국 내에서 완전히 쫓아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결국 로힝야족은 시민권을 잃게 되었으며, 거주지에서 쫓겨나 방글라데시와 인접한 라카인주 일대에 강제 이주되었다.
그래서 IS 등 과격 이슬람 세력이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면서 로힝야 무장단체들이 결성되어 테러가 벌어졌다.
로힝야 반군들이 보복으로 불교도 버마족들을 공격, 남자와 어린이를 마구 죽이고 여자를 집단 성폭행한 후 산 채로 태워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서로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이런 전후 사정도 모르고 그녀를 비난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사람은 아무리 잘해도 모두의 찬사를 얻을 수 없기에 정치인이 된 아웅 산 수 치에게 불만을 느끼는 국민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저항운동가 시절의 개혁 성향이 사라지고 기성 정치판에 물든 노회한 정치꾼이 된 거 아니냐는 말이 많다.
버마는 아웅 산 장군의 묘지에 참배하였다가 북한 공작원의 폭탄 테러에 우리 정부 요인이 여러분 돌아가신 안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버마의 작은 항구에 배를 타고 몇 번 들어간 적은 있는데 큰 인상이 남아있지 않은 걸 보면 아직 해운 쪽에서도 변방인 나라인 모양이다.
'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캄보디아 킬링 필드 (0) | 2020.10.08 |
---|---|
미소의 나라 타일랜드 (0) | 2020.10.06 |
싱가포르 회상 (0) | 2020.09.21 |
인도와 파키스탄 (0) | 2020.09.18 |
두바이와 우리 순이 (0) | 2020.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