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킬링 필드
캄보디아 킬링 필드
음악 : The Killing field OST Imagine https://www.youtube.com/watch?v=4_9p31CKA7E
버마에서는 종족 간의 갈등으로 리힝야족에 대한 인종 청소가 벌어지고, 타이는 종교 갈등으로 애먼 민중들이 제 명에 살지 못하고 고통받고 있다.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 루주라는 급진적인 좌익무장단체가 별 이유도 없이 자기 동포 수백만 명을 고문, 학살한 흑역사가 있다.
크메르 루주는 베트남 전쟁 때 캄보디아 농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캄보디아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에 점령당했다가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다시 프랑스가 지배하였다.
시아누크 국왕은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해 1953년 독립하고 중립 정책으로 나갔다.
시아누크는 월맹에 폭격하는 미국과 단교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어수선하였지만, 한국전쟁 때 우리나라에 원조해 줄 정도로 쌀이 남아돌아 먹고살 만했다.
하지만 캄보디아 동부지역은 사실상 북베트남이 지배하여 대규모 지하 터널을 파 호치민 루트라는 보급로를 만들었다.
미군은 눈엣가시 같은 호치민 루트를 공격하기 위해 국제법을 위반하는 비밀 작전을 했다.
미 공군이 동부 캄보디아 지역에 대규모 폭격을 하였으나 그 효과는 미미했다.
미군이 캄보디아에 쏟아부은 폭탄의 투하량은 50만 톤이 넘는다.
이차 대전 중 도쿄 공습 때 투하된 폭탄의 세 배나 된다.
고엽제를 비롯한 화학 무기는 별도이다.
하늘에서 호치민 루트 땅굴이 안 보이니 미군 폭격기는 결혼식 하는 민가에 폭탄을 떨구고 가기도 했단다.
그런 무차별 폭격으로 많은 캄보디아 사람이 죽고 경작지 대부분이 초토화되어 400만 톤에 달했던 쌀 생산량은 66만 톤으로 줄어 민생고에 반미 감정이 매우 컸다.
시아누크 국왕이 크메르 루주와 손을 잡으며 지지기반을 늘려 결국 1975년에 친미 정권인 론 놀을 쫓아내고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크메르 루주는 시아누크 국왕을 팽 시키고 국호를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농촌에서 프놈펜에 몰려든 난민들을 몽땅 농촌으로 쫓아내기로 했다.
시아누크를 밀어내고 각종 이상한 정책으로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고 반발이 생기자 크메르 루주는 킬링 필드라는 참혹한 대학살극을 벌인다.
집단 농장을 만들어 사회주의식 새 세상을 건설한다고 도시 주민들을 모조리 농장으로 내몰았다.
이와 함께 뚜올 슬랭 같은 수용소도 많이 생겼고, 반혁명 사상을 품고 있다고 의심되는 이들이나 외국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사람은 스파이로 몰아 고문하고 죽였다.
폴 포트 정권에서는 사소한 이유로 처형당하거나 노동 수용소로 연행돼 강제 노동하다가 기아와 질병으로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대도시 거주자들은 본질적으로 부르주아 또는 반동분자로 간주했고 프놈펜은 대부분 잡혀가거나 피난하여 주민이 만 명도 안 되는 유령 도시가 되었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을 비롯해 경찰, 군인, 공무원과 가족, 교사와 학생, 심지어는 나처럼 안경을 쓰고 있거나, 꼬미 언니처럼 손이 곱다고 붙잡아 가두고 매일 고문하고 처형했다.
승려, 신부, 목사, 이맘은 물론이고 예술가, 작가, 기자, 배우 역시 다 잡아다 죽였다.
그런데 처형 대상이 된 지식인들이 죽거나 사라지자 그 대상이 농민 중 비협조적인 자로 확대되었다.
나중에는 크메르 루주 간부들까지 인민재판으로 처형하는 내부투쟁으로까지 번졌다.
말 그대로 캄보디아 전국이 공사판, 아니 킬링 필드로 변했다.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은 기본이고 고문 침대에 눕혀 묶어놓고 주리를 틀거나 쇳덩어리로 머리를 짓누르기도 했단다.
반동으로 몰린 사람이 과거 정권에 협조했다고 불지 않을 때는 도끼로 손을 자르거나 여성의 가슴, 국부 등을 예리한 칼로 도려내기도 했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는 반동분자를 산속 나무에 발가벗겨 묶어놓아 개미가 살을 파먹게도 했다.
크메르 루주는 잡혀온 이를 고문하기 전 사진을 찍고, 어린 크메르 루주 선수들이 고문 센터뿐 아니라 구덩이에 처넣기 직전까지 때리고 고문했다고 한다.
가장 흔한 방법은 눈을 가린 뒤 팔을 뒤로 묶고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반동분자들의 후환을 없애기 위해 씨를 말린다면서 젖먹이들까지 살해했다.
죽이는 방법도 잔인하기 짝이 없어 갓난아이나 애들을 마치 개구리를 패대기쳐 죽이듯 팔이나 다리를 잡고 몸뚱이를 바위나 큰 나무에 내려쳐 죽였으며 공중에 던져 사격 연습도 했다고 한다.
총알을 아끼기 위해서 구덩이에 생매장하거나 우물에 처넣기도 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영화 '킬링 필드'의 실제 주인공은 자기 친척이 인민재판을 받고 크메르 루주가 죽인 뒤 간을 꺼내 먹었다고 폭로했다.
크메르 루주의 가장 악명 높은 수용소로는 뚜올 슬렝 감옥이 있는데 예전에 고등학교였으나 고문 수용소로 개조했다.
이만여 명이 이곳에 수용되었으며 살아남은 사람은 12명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외국인도 수십 명이 수용되었다가 모두 죽였다.
수용소에 시신 묻을 자리가 없자 프놈펜 남쪽의 쯔응 아익이라는 곳의 과수원과 화교 묘지에 수용자를 저녁에 옮겨 바로 죽인 후 묻었다.
주민들이 비명을 눈치채지 못하게 그 시간에는 사이렌을 울렸다고 한다.
그곳에서 만여 구의 유골이 나왔다.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크메르 루주가 도망가고 학살의 현장이었던 뚜올 슬렝 교도소와 쯔응아익 매장지는 박물관으로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크메르 루주 전사는 농촌 출신 젊은이와 청소년들이 많았다.
당시 캄보디아는 도농 간 격차가 컸던 데다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그들에게 도시 문명의 모든 것은 부의 상징이자 증오의 대상으로 보였다.
크메르 루주 정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죄 없이 죽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베트남에서는 300만 명으로 발표하였고, 중립국 조사단의 추산은 전쟁 중 사망자 60만, 크메르 루주 정권에서 1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당시 캄보디아 인구가 700만 명이었다는데 국민 반 가까이 애매하게 죽었다.
크메르 루주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했고 학살은 중국계와 베트남계에 집중되었다.
그래서 수십만 명의 베트남계 캄보디아인들이 학살당했고,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고 기세등등하던 호치민과 갈등이 컸다.
결국 1978년, 베트남군은 망명한 캄보디아 난민으로 군대를 만들어 크메르 루주 장교로서 베트남에 망명한 헹 삼린을 내세워 캄보디아에 침공했다.
훈 센은 친미 정권인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초급 장교로 열심히 싸워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가 깽판을 부리기 시작하자 정나미가 떨어져 있던 중에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지대 친베파 자국민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자 1977년 베트남으로 망명했다.
이후 베트남에서 게릴라 훈련을 하며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다.
이 군대를 바탕으로 베트남군이 이듬해 캄보디아를 침공할 때 크메르 루주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한 역할을 했고 베트남과 함께 괴뢰 정부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 정부에서 외교 장관 등 요직을 거친 후 1985년 33살에 총리가 되어 삼십 년 넘게 가족과 함께 캄보디아를 통치하고 있다.
훈 센은 정적 숙청과 인권 탄압 논란 등으로 야당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으며, 그는 외신과 인터뷰는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크메르 루주 지휘관으로 프놈펜을 공격할 때 눈 부상을 입어 의안을 끼고 있다.
크메르 루주 정권은 붕괴하였지만, 폴 포트와 잔류 세력은 국제사회로부터 합법 정권 지위를 잃지 않은 채 잔존하여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 시기 미국은 도미노 이론으로 캄보디아가 베트남처럼 공산화가 되지 않게 크메르 루주 세력을 지원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치욕을 잊지 않고 베트남을 엿먹이기 위해 제노사이드 정권을 돕는 기가 막힐 일이 생긴 것이다.
결국 베트남은 크메르 루주를 타이 국경 쪽으로 쫓아내고도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동시에, 미국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잔존 크메르 루주 세력과 게릴라전에 휘말리게 된다.
이 상황에서 베트남은 외교적 정당성을 위해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세계에 알렸다.
크메르 루주와 베트남 괴뢰정부는 서로 이기기 위해 경쟁하듯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닥치는 대로 민간인을 징집함과 동시에 소년병과 소녀 위안부 등을 동원하고, 전비 확보를 위해 마약을 팔아대고, 전국에 지뢰를 깔았다.
이전에 미군의 폭격에 남은 불발탄과 이때 전국에 묻은 지뢰에 아직도 희생자가 나온다.
당연히 이 개판인 상황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나오고, 엉망진창인 농업이 복구될 리가 없으니 기아와 전염병 역시 만연했다.
내전기에 죽은 자 역시 수십만 명으로 추산된다.
사실 80년대 초까지는 킬링필드 실상이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당장 크메르 루주는 외국인 기자들을 다 쫓아내 학살을 은폐하였고, 미국 정부는 베트남에 보복하기 위해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면서 크메르 루주의 학살 주장은 묻혀있었다.
킬링필드가 알려진 것은 베트남이 주권국가를 침공했다는 국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크메르 루주가 저지른 대학살을 외부에 알렸기 때문이다.
뚜올 슬랭 수용소에 박물관을 만들고 이것을 서방과 소련, 중국에도 공개했고, 프놈펜 외곽의 다른 킬링필드도 찾아내서 알렸다.
외국 기자들이 원하면 캄보디아 전역의 킬링필드를 돌아보고 취재할 수 있게 해서 크메르 루주의 만행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결국 베트남군은 1989년 캄보디아에서 철수했다.
파리에서 캄보디아 평화협정이 열려 무장해제와 내전 종결 등에 19개국이 승인해서 20년에 이르는 캄보디아 내전이 끝났다.
이후 총선거를 해 입헌군주제가 채택되고, 시아누크 국왕이 복위된 후 국민들도 점차 일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UN 중재로 내전은 끝나지만, 크메르 루주는 이 협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평화협상이 체결되면서 크메르 루주에 속했던 이들이 캄보디아에 귀순하게 되고, 1999년 공식적으로 크메르 루주가 해체되었다.
21세기에 들어 학살과 반인권 범죄 처벌에는 시효가 없다는 UN이 크메르 루주 전범재판소를 만들어 거의 30년 만에 책임자에 대한 재판을 열었다.
이미 주범 중 다수는 사망하였으나 학살에 가담한 크메르 루주 인사들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크메르 루주였다가 피해자들을 찾아가 사죄하고 용서받은 후 머리 깎고 승려가 된 크메르 루주 간부도 많다.
이들은 피해자들을 찾아가 발을 씻겨주면서 용서를 빌었다.
동남아에선 남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당신의 머슴이 되어 무조건 사죄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킬링필드는 1984년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만든 영화이다.
우리나라에선 반공 영화라고 초중고 학생 단체관람을 많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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