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 위에서 달리기

부에노(조운엽) 2019. 8. 2. 06:17

 



 

뛰어서 우리의 마음을 울렸던 영웅들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 위에서 달리기



갑판 위에서 어제도 뛰었고 오늘도 뛴다.

뭍에 닿으면 항구에서 뛴다.

물론 출항하면 내일도 갑판 위에서 뛰겠지.

비가 오거나 파도치면 선내에서 줄넘기한다.

중독인 모양이다.

 

선체 길이가 200m가 넘으니 여섯 바퀴만 돌면 3km 정도 된다.

가슴엔 태극 마크를, 등에는 선명한 청색 글자 ‘KOREA’라고 새겨진 추리닝에 반바지를 입고 영화 로키의 주인공처럼 뛰고, 이봉주가 되어 한 주먹으로 하늘을 찌르며 갑판 위를 뛴다.

때로는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에서 황영조가 되어 양팔을 올리고 뛰기도 했고, 독일에선 손기정이 되어서 이를 앙다물고 뛰기도 했다.

때로는 관중이 되어 환호하며 감정을 억제 못 해 목이 메어 뛰기도 했다.


‘HAPPY NINA’ 호가 로테르담을 향해 경제속력으로 가는 길에 우현 쪽으로 아스라이 스페인의 등대가 보인다.

정열의 나라, 스페인!

빨간색을 좋아하고 현란한 복장으로 소와 겨뤄 창과 칼에 찔려 검붉은 피 흘리는 것에 열광하고 빨간 토마토를 던지고 난리굿을 치며 삶을 즐기는 사람들.

라틴아메리카와 필리핀 등을 수백 년간 통치한 저력.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패하기 전까지 유럽 최강국으로 화려한 영화를 누렸던 작지만 큰 나라.

시애스터 때는 온 국민이 낮잠 자고, 밤에는 식사를 서너 시간씩 하는 문화를 가진 여유로운 국민.

지금도 그들의 문화권 안에서 살 수밖에 없이 만들어진 세 번째로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스페인어.


우린 흔히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콜럼버스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인도로 가려다 삼천포로 빠져 엉뚱한 데를 인도로 착각한 것이다. 

어쨌든 이탈리아 사람인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것은 정확한 말이 아니고 기록상 유럽인으로서 아메리카에 처음 갔다는 말이다. 


좌우지간 15세기 말경엔 후추가 유럽인들에겐 대단히 귀한 양념이었는데, 왜 그런가 하면 유럽인들은 고기를 구워서 그냥 맹탕으로 뜯어 먹었다는데 후추라는 양념을 얻어서 뿌려 먹으니까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그래서 유럽에서 돈 많은 귀족은 너나 할 것 없이 후추를 구하려고 혈안이 되었고, 그 후추를 대량으로 구하면 떼부자가 될 수 있었는데 그러러면 인도까지 가야 했다.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길은 당시에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다가 희망봉을 돌아서 가는 길이 유일했다.

스페인과 견원지간인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서해안을 장악하고 있어서 스페인 상인과 선원들은 그쪽으로 가길 꺼렸다.

그래서 콜럼버스란 사람이 지구는 동그랗게 생겼으니까 그쪽으로 가지 말고 서쪽으로 돌아가도 인도에 갈 수 있다고 스페인 국왕을 꼬드겨서 배와 선원을 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양반이 지금의 중남미 대륙에 도착해서 거기가 인도인 줄 알았다.


스페인은 그곳에 살고 있던 잉카, 아즈텍, 마야인들을 몰아내고 자기네 식민지로 삼았다.

정말 역사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거와 같이 웃기는 짬뽕이다.

이건 양심 바르지 않은 넘이 어딜 가다가 길을 잃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 하룻밤 재워줍쇼 하고는 마누라와 딸을 빼앗고 주인과 아들은 내쫓거나 죽이는 것과 같은 날강도 짓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스페인 사람들이 지금의 멕시코부터 남미까지 몽땅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식민지로 삼았다.

하지만 그 당시 스페인과 맞잡이였던 포르투갈이 배가 아파 가만있지 않았고 ‘야, 우리가 남이가, 그만 처무그라’ 하고 숟가락 들고 달라들어 브라질 땅을 자기네 식민지로 삼았다.

그뿐인가, 영국도 사촌이 땅 사니 배가 아프다고 지들도 배 타고 가서 여긴 우리 땅이라고 말뚝을 박은 게 지금의 미국과 캐나다이다.

우리는 힘 있는 자들이 왜곡한 역사를 진실인 양 일괄되게 가르치고 배우는 황당한 현실에서 살고 있다.

그러게 힘 있는 자들의 말과 행동은 진실하지 않다고 역사가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건 아닌지...


그 당시 요강에 밤새 본 대소변을 사람이 지나가든 말든 2층에서 길거리에 쏟아버리는 등 우리만큼이나 덜 문화인이었던 유럽인들이 전 세계에서 땅따먹기할 때 우리네 조상들은 뭐 했나 모르겠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발을 디디기 전, 서양인들은 일일이 펜으로 적어서 책을 만들 때 우리 조상님은 한글을 만들고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팍팍 찍어 냈었다. 

그런데 좁은 한반도에서 당파를 나눠 동포끼리 싸우느라 힘 빼지 말고 장보고 형님이나 우리같이 배타던 사람을 좀 더 멀리 나가 해적질이라도 해서 배불리 묵고살아라 했으면 하다못해 보르네오나 베트남, 뉴질랜드, 호주에 이 땅은 나의 땅이라고 하고 깃발 꽂고 만세 불렀을 거늘...

그랬다면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한국어를 공용어로 쓰기 전에 호주나 뉴질랜드가 영연방 국가가 아닌 한국말을 모국어로 하는 ‘The United States of Korea’가 되어 우리가 더 이뻐하고 잘 먹여 살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우리도 좋아하는 망고나 키위를 싸게 자주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찌 알겠는가?

 

얼마 전 바르셀로나에 입항했을 때 조리장 영감님과 부식 사러 시내로 나간 적이 있었다.

도로뿐 아니라 보도에도 박아놓은 수백 년 된 직사각형 돌.

그 돌을 밟으며 짓기 시작한 지 백 년이 넘었다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바라봤다.

기부금으로 짓고 언제 완공될지 모르는 엄청난 규모에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이는 가우디의 작품.

지금 짓고 있는데 내가 살아생전 완공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해졌다.

우리는 짓기 바쁘게 입주하고 이삼십 년 되면 부슬부슬 낡아서 헐어 재건축하는 빨리빨리 문화인데 스페인이나 남미에 가보면 백 년 이상 된 고옥이 널려 있다.

적은 인구로 세계를 다스렸던 경험이 있는 나라 사람은 마인드가 달라도 보통 다른 게 아닌 모양이다.

우리나라가 오천 년 역사를 지닌 여유로운 민족이 맞나 의심스럽다.


작은 배낭 하나 메고 조리장과 같이 보께라 시장으로 갔다.

싱싱한 채소와 부족한 주부식을 사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항구에서는 배에 납품하는 선식업자에게 일괄주문을 하지만, 많지 않은 주부식을 살 경우는 이렇게 나가서 사기도 한다.

뭐, 스페인어를 잘못해도 영서 포켓 사전 있겠다, 물건을 눈으로 보고 거기 적혀 있는 가격을 환율 계산해서 사면되니까 어려운 것도 없다.

 

나는 준비한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머리띠를 한 채 스트레칭을 조금 하고 뛰기 시작했다.

갈아입은 옷과 구두는 작은 배낭에 담아 조리장이 부식을 싣고 가는 차편으로 보냈다.

몬주익을 돌아서 ‘HAPPY NINA’ 호까지 뛰어 갈 계획이다. 

여긴 바르셀로나니까 환상의 조영조가 되어서...

 

유빈 누나가 공부하던 동숭동에서 중학생 때부터 새벽에 신문 돌리며 뛰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매일의 소중한 일과 중 하나가 됐다.

파도가 치면 치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뛴다.

바람과 파도에 도저히 뛸 수 없으면 선내에서 줄넘기라도 한다.

컨디션에 따라 오천 번도 넘고, 만 번도 넘고...

안 뛰면 뭔가 허전해서 몸과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몬주익 언덕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뛰어 내려가며 기분 좋은 피로감에 젖어 마음속으로 남희에게 외친다.

‘나미, 널 볼 때도 좋지만, 이렇게 널 생각할 때도 아주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