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칠레나
칠레에서 전설 같이 사는 영감님
참 희한한 일도 있었다. 글쓴이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쳐주고 품앗이로 한글을 배우고 있는 칠레나 여대생 Belen 양이 연말시험을 마치고 방학을 하게 되어 시내에서 만나 점심을 같이 먹고 산타루시아 성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그녀와 같이 공부하러 숙소로 돌아가려고 택시를 잡았다. 봄베로 누녜스 이 도미니까로 가자고 말했는데 대답하는 스페인어가 한국 사람 같았다. 캡을 쓰고 선글라스를 낀 모습에도 동양인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니, 이 먼 나라에서 택시 운전하는 한국인 영감님이라니......
뭔가 재미있는 사연이 있을 거 같아서 말을 걸어봤다. 스페인어로 대답하는 거로 봐서 아직 나를 경계하는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별수 있나,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게 상책이지.
'영감님, 한국 분 같은데, 저 여기 사는 교포 아니거든요. 글 쓰고 사진 찍어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아직은 춥고 배고프지만요.'라고 배시시 웃으며 이야기하자 핸들을 잡고 있던 한 손을 얼굴로 가져가 선글라스를 올리며 백미러로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베쟈비스따 거리의 한적한 곳에 택시를 정차시켰다.
그는 말로만 듣던 팔레 교민이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칠레에 이민 와서 한인사회와는 전혀 교류하지 않고 현지인들만 상대하고 사는 한인들을 이곳에서는 칠레 교민이 아니고 팔레 교민이라고 한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세상에는 외국에서 홀로 참 재미있게 사는 분들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반백도 넘은 나이에 홀로 남미에 여행 왔단다. 몇 나라를 거쳐서 이곳에 도착했을 때 길에서 우연히 만난 다른 팔레 교민과 술 한 잔을 하다가 이곳에 눌러앉았는데 그 사연도 참 재미있었다.
이 나라 자연환경이나 사람들이 맘에 들어서 그 팔레 교민의 도움을 얻어 엘 메르꾸리오 신문에 한 줄 광고를 냈단다. "조건 없이 동양인과 결혼하고 싶은 여인을 구합니다."
장난삼아 낸 이 광고를 보고 이십여 명의 세뇨리따, 세뇨라가 연락했다나. 그 팔레 교민과 같이 면담을 하고 서너 명과 데이트를 하면서 즐겁게 지냈다 한다. 그중의 한 이십 대 여성과 서로 마음이 맞아 신혼여행을 다녀 오고 시내 변두리에서 살림을 차렸는데......
매일 얼굴만 보고 사는 것도 좋지만 갖고 있던 돈도 곶감 빼먹듯이 줄어들어 먹고사니즘을 해결하기 위해 끼오스꼬(구멍가게)를 차렸단다. 말도 배우면서 먹고 살고 한 달 한 일이백 불 정도 남았다나. 그 돈 갖고 그 팔레 교민과 한 달에 한두 번 만나서 술 마시고 노는 걸 낙으로 삼고 살았는데 남녀가 살을 섞고 살다 보면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예쁜 딸이 하나 생기고 나니 아비로서 뭘 하나 남길까 생각하고는 물건 구색도 더 갖추고 부지런히 가게를 운영해서 그 딸내미 앞으로 변두리에 넓으면서 싼 집을 하나 장만해주었다나.
그러고 나서 또 둘째가 태어났단다. 큰딸 앞으로 집을 사주었으니 마나님과 둘이 더 열심히 벌어서 둘째 딸 앞으로도 당연히 집을 한 채 사두었단다. 첫 딸 앞으로 사준 집과 땅도 도시개발이 변두리로 차츰 옮겨가면서 조금씩 값이 올라 흐뭇해하기도 하고......
애고, 그런데 이 노익장, 칠십 가까운 나이에 또 아이가 생겼다네. 한국과는 달리 스트레스받을 일도 별로 없고, 적은 돈 벌어도 때 안 거르고 잘 먹고 잘살다 보니 힘이 났던 모양이다. 나도 글을 쓰면서 느끼는 거지만 부정적인 스트레스는 힘을 빠지게 만들어 글 쓰는 데 별 도움이 안 되지만, 긍정적인 것들은 필을 받아 좋은 글을 쓸 수가 있다. 그렇게 예쁜 딸만 셋을 낳아 젊은 마나님과 오순도순 재미있게 살고 있지만, 자기 죽을 때를 생각하면 요 막둥이에게도 집을 하나 장만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구멍가게는 부인에게 맡기고 낮에 이렇게 핸들을 잡고 다니신다나.
한국에서는 푼돈밖에 안 되는 벌이지만 그 돈을 벌어서 집에 가면 사랑하는 젊은 아내가 가게 문 앞에까지 뛰어나와 고생했다고 어깨를 주물러주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세 딸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팔과 다리를 주물러주면서 넷이서 자기를 '빠빠~ 아모, 아모!(아빠~ 사랑해요!)' 하는데 이런 행복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고 너털웃음을 웃으며 행복해하신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이 공부를 잘해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엄마, 아빠 나라말을 다 잘하게 되면 하다못해 스페인어나 한국어 선생을 해도 자기 앞가림은 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한인 학교에 보낼 생각이란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닐 터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에는 뭔가를 해보겠다고 흐르는 시간을 임의로 재단해서 구분 짓는 것도 좋지만,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지난 일을 후회하고 새로운 결심을 할 필요가 굳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먼 이국에서 참 대단한 한국인 영감님을 보고 생각이 많았던 하루였다. 나도 이참에 Belen 양과 연애나 한번 해 볼까나...... 후후후.
Si tú eres mi hombre y yo tu mujer (Power of love), Angela Carra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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