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 휴양 도시 비냐 델 마르, 멀리 보이는 꼰꼰 외에도 칠레의 긴 해안선을 따라 별장들이 늘어서 있다.
전설 같이 사라진 사람
K 형의 첫인상은 무척 차가웠다. 항상 말없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 우수에 차 있었고 웃는 낯을 보기가 힘들었다. 얼굴은 어렸을 때 수두를 앓아서 얽었고 젊었을 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 마저 절었다. 그나마 키까지 난쟁이 똥자루만큼이나 작았다.
내가 그 배에 올라갔을 때 그는 이 년 가까이 그 배에 타고 있었다. 그 당시 외항선의 승선계약은 일 년인데 연장한 것이다. 보통 배를 일 년 정도 타면 지겹기도 하고 고국이 그리워 귀국하고 싶어 안달하는데 말이다.
일단 업무파악을 하고 나서 좀 한가해졌을 때 그 선원을 내 방으로 불렀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서 직책이 낮은 선원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술이나 한잔 받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인데, 술이 몇 순배 돌고 나니 자기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놓았다.
고향이 부산 기장 하고도 그 위의 월래인데 그런 몸으로 사람 구실도 못하고 장가도 못 갈 거 같아 어렵게 배를 타고 나와 남미에 괜찮은 나라 있으면 그곳에 내려서 빠삐용 같이 살고 싶다나. 당시 남미는 선원들에게 파라다이스로 생각되는 곳이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 싼 물가에 널려있는 아름다운 세뇨리따들.
뭐 다 좋은데 나하고 타고 있을 때는 무단 하선하지 말라고 했다. 선원들이 외국에서 도망가면 뒷감당이 무척 고달프다. 우선 기항한 나라 관할 이미그레이션에 실종 신고를 해야 하는데 사람을 죽여 놓고 실종신고를 할 수도 있으니 이를 입증할 때까지 배는 묶이고 책임자들은 조사받으러 관계관청을 드나들어야 한다. 물론 대사관에도 신고해서 안기부나 군에서 나온 무관에게 가혹 행위는 없었는지 모든 것이 이해가 갈 때까지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배가 묶이니 선주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고.
배 속력만큼이나 느리게 가는 시간 속에 그 이야기는 까맣게 잊고 이 항구 저 항구를 화물 따라 움직이다가 남미의 어느 항구에 들어갔다.
거기서도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바에서 아름다운 아가씨들과 맥주도 마시는 등 마도로스의 낭만을 만끽하고, 하역이 끝나 출항을 하려는데 아뿔싸 그 K 형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무단 하선한 것으로 생각했다. 에이전트 차를 타고 한국 선원들이 잘 가던 술집을 찾아다녔지만 아무 데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신속하게 선주에게 보고하고 대리점과 협의하여 선주 개런티로 일단 배는 출항하게 되었다. 혹시 나중에라도 돌아오면 다음 항구로 보내 달라 하고. 그렇게 K 형은 사라지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멀어졌다. 어디가 됐든 행복하게 살기를 빌면서…….
몇 년 후 다른 배를 타고 K 형이 무단 하선한 그 항구에 들어갔을 때 그를 수소문해봤다. 그랬더니 인근 다른 항구에서 작달막한 동양인을 보았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아~ 죽지는 않고 살아 있나 보다’라는 짐작만 하고 그 나라를 떠났다. 인근의 항구라는 곳이 그리 가깝지도 않았기에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또 몇 년이 흘러 이번에는 다른 회사 유조선을 타고 K 형이 살고 있다는 항구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만날 수 있으려나 하는 기대를 하고 입항해서 수소문해봤다. 그랬더니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혼자 해산물 양식을 하다가 은퇴하고 근처 바닷가 별장에서 두문불출하고 현지인 아내와 살고 있다는 소식이 내 레이더망에 걸렸다. 대리점 직원에게 위스키를 한 병 선물로 주고 그 동양인에게 연락할 방법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그다음 날 대리점 직원이 희색이 만연해서 그 사람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왔다고 했다. 고맙다는 인사치레를 하고 한가할 때 그 집으로 전화를 해보았다. 전화를 받는 세뇨라가 외국인에게 전화가 오니 경계하는 게 역력하게 느껴졌다. 짧은 스페인어로 K 형과 몇 년 전에 같이 배를 타던 아미고(친구) 통신장이라 하면서 통화할 수 없냐고 물었으나 말도 잘 안 통하고 바꾸어주질 않았다.
그날 밤, 머플러를 하고 선글라스를 쓴 멋진 현지 여인이 귀여운 소녀 손을 잡고 나를 찾아왔다고 해서 현문으로 나가봤더니 ‘세뇰 조’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하니 자기와 같이 갈 수 있냐고 했다. 내 성을 아는 걸 보고 그 K 형이 보낸 사람으로 알아차리고 입고 있는 옷차림으로 따라 나갔다. 두 모녀가 주위를 조금은 경계하며 그녀의 차를 타고 라이트를 켜고 한 이십여 분 갔더니 바닷가 숲이 울창한 곳에 별장같이 보이는 외딴집의 불빛이 보였다. 약간의 긴장과 설렘 속에 정원이 넓고 풀장까지 있는 그 집 안으로 들어가니 현관에 아주 작은 몸집의 초로의 사내가 휠체어에 앉아 파이프를 문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누구였겠는가? 다 살아있으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 거지. 반가운 포옹을 한 후에 그 K 형과 밤새 비노(포도주)를 마시며 그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선 그때 그 항구에서 내리기로 하고 한 레스토랑의 주인 여자와 의도적으로 친해지려고 노력했다나. 출항하는 날 새벽에 그동안 모아놓았던 돈과 옷가지 몇 개만 챙겨서 몰래 그 레스토랑에 찾아가 자기를 도와달라고 했단다. 미리 비상금만 따로 챙겨놓고 나머지 돈을 주면서 일단 자기를 숨겨주고 이 나라에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세뇨라는 K 형의 눈을 지긋이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떡이고, 바로 차를 타고 인근의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생을 하는 딸에게 그 돈을 주면서 도와주라고 말하고 갔다.
짬 나는 대로 그 세뇨리따에게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바닷가에 나가 낚시를 하고 물질을 하면서 고기와 어패류를 잡아 시장에 싼값에 팔아서 입에 풀칠하고 허름한 움막 같은 곳에서 살았단다. 몇 년 숨어 살 듯이 하면서 스페인어로 어지간한 의사 표현을 할 정도가 되자 그 여선생에게 그 항구에 들어오는 한국 배에 한글로 쓴 ‘이곳에 오시면 전복, 소라 등 싱싱한 해산물을 싸게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전직 마도로스가’라고 쓴 종이를 보여주고, 찾아오는 한국 선원들에게 해산물과 술을 팔았단다.
지금도 현지인들은 전복, 멍게 같은 것을 먹을 줄 모른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바닷가에 나가면 전복이나 홍합, 조개 등이 갯바닥에 널려 있었다고 한다. 어쩌다 오는 한국 선원들이 해산물을 맛있게 먹고 주고 간 돈을 모아 그 자금으로 굴 양식을 했는데 별 재미를 못 보고 다시 성게 양식을 했단다. 그곳 바닷가는 별로 오염되지 않아 성게가 주먹보다 크게 잘 자라서 일본에 수출하게 되었단다. 바닷가에 널려 있는 전복도 잡아 같이 수출해서 엄청 재미를 보았다고 했다.
바닷가에서 일만 하고 혼자 지내는 이 때 묻지 않은 영혼의 소유자와 그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쳐주던 아리따운 여선생은 몇 년을 같이 지내다 보니 정이 들어 자연스럽게 살을 섞게 되었단다. 부인 닮은 예쁜 자식들도 생기게 되어 그동안 너무너무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했다. 그렇게 꿈만 같던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 바닷가에서 일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쓰러지게 되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자기 신세에 자포자기하다시피 술만 먹고 몸을 잘 지키지 못한 것과 교통사고 후유증이 늙어서 나타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하고 어느 정도 나아지자 모든 걸 정리하고 이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단다.
부인의 사랑도 지극하여 늙고 병든 K 형을 버리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주는데 자기는 너무너무 행복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자기가 한국에 살았다면 이런 행복을 꿈이나 꾸어봤겠냐고 하면서 지금도 부인 살이 스치기만 해도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다나……. 아이들은 어쩌고? 귀여운 딸이 ‘빠빠, 빠빠!’ 하면서 눈앞에서 재롱을 피우는 것을 보면 꿈인지 생시인지 자기도 모르게 팔을 꼬집어본다고 했다. 정말 남미 아이들 어렸을 때는 너무 예쁘더라.
예전에 남미의 한 아름다운 항구에서 사라져 잊혔던 그 곰보 형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는 것이 전설처럼 믿어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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