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은퇴 이민

전설 같이 사라진 사람 y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부에노(조운엽) 2016. 12. 29. 14:36

 




 

해변 휴양 도시 비냐 델 마르, 

멀리 보이는 꼰꼰 외에도 칠레의 긴 해안선을 따라 별장들이 늘어서 있다. 

 

 

 

전설 같이 사라진 사람

 

 

 

K 형의 첫인상은 무척 차가웠다.

항상 말없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 우수에 차 있었고 웃는 낯을 보기가 힘들었다.

얼굴은 어렸을 때 수두를 앓아서 얽었고 젊었을 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 마저 절었다.

그나마 키까지 난쟁이 똥자루만큼이나 작았다.

 

내가 그 배에 올라갔을 때 그는 이 년 가까이 그 배에 타고 있었다.

그 당시 외항선의 승선계약은 일 년인데 연장한 것이다.

보통 배를 일 년 정도 타면 지겹기도 하고 고국이 그리워 귀국하고 싶어 안달하는데 말이다.

  

일단 업무파악을 하고 나서 좀 한가해졌을 때 그 선원을 내 방으로 불렀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서 직책이 낮은 선원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술이나 한잔 받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인데, 술이 몇 순배 돌고 나니 자기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놓았다.

  

고향이 부산 기장 하고도 그 위의 월래인데 그런 몸으로 사람 구실도 못하고 장가도 못 갈 거 같아 어렵게 배를 타고 나와 남미에 괜찮은 나라 있으면 그곳에 내려서 빠삐용 같이 살고 싶다나.

당시 남미는 선원들에게 파라다이스로 생각되는 곳이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 싼 물가에 널려있는 아름다운 세뇨리따들.

  

뭐 다 좋은데 나하고 타고 있을 때는 무단 하선하지 말라고 했다.

선원들이 외국에서 도망가면 뒷감당이 무척 고달프다.

우선 기항한 나라 관할 이미그레이션에 실종 신고를 해야 하는데 사람을 죽여 놓고 실종신고를 할 수도 있으니 이를 입증할 때까지 배는 묶이고 책임자들은 조사받으러 관계관청을 드나들어야 한다.

물론 대사관에도 신고해서 안기부나 군에서 나온 무관에게 가혹 행위는 없었는지 모든 것이 이해가 갈 때까지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배가 묶이니 선주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고.

  

배 속력만큼이나 느리게 가는 시간 속에 그 이야기는 까맣게 잊고 이 항구 저 항구를 화물 따라 움직이다가 남미의 어느 항구에 들어갔다.

 

거기서도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바에서 아름다운 아가씨들과 맥주도 마시는 등 마도로스의 낭만을 만끽하고, 하역이 끝나 출항을 하려는데 아뿔싸 그 K 형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무단 하선한 것으로 생각했다.

에이전트 차를 타고 한국 선원들이 잘 가던 술집을 찾아다녔지만 아무 데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신속하게 선주에게 보고하고 대리점과 협의하여 선주 개런티로 일단 배는 출항하게 되었다.

혹시 나중에라도 돌아오면 다음 항구로 보내 달라 하고.

그렇게 K 형은 사라지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멀어졌다.

어디가 됐든 행복하게 살기를 빌면서…….

  

몇 년 후 다른 배를 타고 K 형이 무단 하선한 그 항구에 들어갔을 때 그를 수소문해봤다.

그랬더니 인근 다른 항구에서 작달막한 동양인을 보았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아~ 죽지는 않고 살아 있나 보다’라는 짐작만 하고 그 나라를 떠났다.

인근의 항구라는 곳이 그리 가깝지도 않았기에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또 몇 년이 흘러 이번에는 다른 회사 유조선을 타고 K 형이 살고 있다는 항구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만날 수 있으려나 하는 기대를 하고 입항해서 수소문해봤다.

그랬더니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혼자 해산물 양식을 하다가 은퇴하고 근처 바닷가 별장에서 두문불출하고 현지인 아내와 살고 있다는 소식이 내 레이더망에 걸렸다.


대리점 직원에게 위스키를 한 병 선물로 주고 그 동양인에게 연락할 방법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그다음 날 대리점 직원이 희색이 만연해서 그 사람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왔다고 했다.


고맙다는 인사치레를 하고 한가할 때 그 집으로 전화를 해보았다.

전화를 받는 세뇨라가 외국인에게 전화가 오니 경계하는 게 역력하게 느껴졌다.

짧은 스페인어로 K 형과 몇 년 전에 같이 배를 타던 아미고(친구) 통신장이라 하면서 통화할 수 없냐고 물었으나 말도 잘 안 통하고 바꾸어주질 않았다.

  

날 밤, 머플러를 하고 선글라스를 쓴 멋진 현지 여인이 귀여운 소녀 손을 잡고 나를 찾아왔다고 해서 현문으로 나가봤더니 ‘세뇰 조’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하니 자기와 같이 갈 수 있냐고 했다.

내 성을 아는 걸 보고 그 K 형이 보낸 사람으로 알아차리고 입고 있는 옷차림으로 따라 나갔다.

두 모녀가 주위를 조금은 경계하며 그녀의 차를 타고 라이트를 켜고 한 이십여 분 갔더니 바닷가 숲이 울창한 곳에 별장같이 보이는 외딴집의 불빛이 보였다.

약간의 긴장과 설렘 속에 정원이 넓고 풀장까지 있는 그 집 안으로 들어가니 현관에 아주 작은 몸집의 초로의 사내가 휠체어에 앉아 파이프를 문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누구였겠는가?

다 살아있으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 거지.

반가운 포옹을 한 후에 그 K 형과 밤새 비노(포도주)를 마시며 그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선 그때 그 항구에서 내리기로 하고 한 레스토랑의 주인 여자와 의도적으로 친해지려고 노력했다나.

출항하는 날 새벽에 그동안 모아놓았던 돈과 옷가지 몇 개만 챙겨서 몰래 그 레스토랑에 찾아가 자기를 도와달라고 했단다.

미리 비상금만 따로 챙겨놓고 나머지 돈을 주면서 일단 자기를 숨겨주고 이 나라에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세뇨라는 K 형의 눈을 지긋이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떡이고, 바로 차를 타고 인근의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생을 하는 딸에게 그 돈을 주면서 도와주라고 말하고 갔다.

  

짬 나는 대로 그 세뇨리따에게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바닷가에 나가 낚시를 하고 물질을 하면서 고기와 어패류를 잡아 시장에 싼값에 팔아서 입에 풀칠하고 허름한 움막 같은 곳에서 살았단다.

몇 년 숨어 살 듯이 하면서 스페인어로 어지간한 의사 표현을 할 정도가 되자 그 여선생에게 그 항구에 들어오는 한국 배에 한글로 쓴 ‘이곳에 오시면 전복, 소라 등 싱싱한 해산물을 싸게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전직 마도로스가’라고 쓴 종이를 보여주고, 찾아오는 한국 선원들에게 해산물과 술을 팔았단다.

  

지금도 현지인들은 전복, 멍게 같은 것을 먹을 줄 모른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바닷가에 나가면 전복이나 홍합, 조개 등이 갯바닥에 널려 있었다고 한다.

어쩌다 오는 한국 선원들이 해산물을 맛있게 먹고 주고 간 돈을 모아 그 자금으로 굴 양식을 했는데 별 재미를 못 보고 다시 성게 양식을 했단다.

그곳 바닷가는 별로 오염되지 않아 성게가 주먹보다 크게 잘 자라서 일본에 수출하게 되었단다.

바닷가에 널려 있는 전복도 잡아 같이 수출해서 엄청 재미를 보았다고 했다.

  

바닷가에서 일만 하고 혼자 지내는 이 때 묻지 않은 영혼의 소유자와 그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쳐주던 아리따운 여선생은 몇 년을 같이 지내다 보니 정이 들어 자연스럽게 살을 섞게 되었단다.

부인 닮은 예쁜 자식들도 생기게 되어 그동안 너무너무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했다.

그렇게 꿈만 같던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 바닷가에서 일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쓰러지게 되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자기 신세에 자포자기하다시피 술만 먹고 몸을 잘 지키지 못한 것과 교통사고 후유증이 늙어서 나타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하고 어느 정도 나아지자 모든 걸 정리하고 이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단다.

  

부인의 사랑도 지극하여 늙고 병든 K 형을 버리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주는데 자기는 너무너무 행복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자기가 한국에 살았다면 이런 행복을 꿈이나 꾸어봤겠냐고 하면서 지금도 부인 살이 스치기만 해도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다나…….

아이들은 어쩌고?

귀여운 딸이 ‘빠빠, 빠빠!’ 하면서 눈앞에서 재롱을 피우는 것을 보면 꿈인지 생시인지 자기도 모르게 팔을 꼬집어본다고 했다.

정말 남미 아이들 어렸을 때는 너무 예쁘더라.

  

예전에 남미의 한 아름다운 항구에서 사라져 잊혔던 그 곰보 형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는 것이 전설처럼 믿어지지 않는가?

 

 

 

알젠의 봄 부지런하신 부에노님.....일찌감치 원고를 마무리하고 주옥같은 삶의 글을 올려주셨군요.....남의 얘기가 아닌.....전설같지 않은 삶의 얘기가 피부 속을 파고 듭니다......그림같고 소설같아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살냄새가 물씬 풍겨 납니다....음악 역시... 12-20
Rainbow 한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소설.그러나 현실에서 있을 법한 야그 잘 보았어요.일취월장 하시고 좋아하는 약주 적당히 하시길.소설의 주인공처럼 건강 잃으면 현실의 행복을 간직하기 힘드실 것 같아요. 늘 행복하길.. 12-20
julio 부에노님~무지개님 말씀을 명심 하십시요... 12-20
한강 소설을 쓰는구나~ 하고 ㅎㅎㅎ 이야기 하는게 바로 부에노님 같은 분들 한테 할수 있는 이야기 구나 하고 떠 올려 봤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 고맙습니다. ^^ 12-20
saci 훌리오님이 다시 오셨네.... 너무 반갑네............ 부에노... 남미 여자들은 원래 이리도 다 착하니..? 동화책에 나오는 것 처럼...? 그럼 남미 남자들 이야기 좀 해줘.... 나도 태권도를 배워서 남미에 가면... 저리 멋진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거야..? 12-20
saci 근데..요즘 남희씨는 죽었니...? 어째 항해일지는 안올라오고 남의 사랑만 훔쳐오니......? 그래도....궁금하고만....... 12-20
라스까사스 부에노님, 글 잘 읽었습니다.^^ 히브리노예들의 합창이 이 글과 이렇게 잘 어울리다니...^^ 돌이켜보면 제가 이 라틴방엘 들어온것도 소설같기도 하지만 사람냄새 팍,팍 나는 부에노님의 글때문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저역시 주제넘지만 Rainbow님, julio님 12-20
라스까사스 과 같은 말씀 드리고 싶군요. 지난번 말씀드린것 같지만 저역시 1년 반전 예상치않게 완전히 건강을 잃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사람이기때문입니다. 물론 부에노님이야 워락 낙천적인 분이시고 또 건강 잘 알아서 챙기시겠지만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_* 12-20
julio saci 님아... 님아는 vacacion 너무 길군요.?. 12-20
부에노 산에 올라갔다 왔더니 꼬리글이 많이 달렸군요. 감사합니다. 요즘 부정적인 것들과 스트레스로 인해 항해일지를 못 쓰고 있었어요. 그래서 예전에 겪었던 쉬운 이야기들을 풀어봤네요. 삭제 12-21
부에노 반가운 닉들... 사실 저 분은 부인이 둘이었어요. 저 선생과 가게를 보던 아가씨... 거기서 술만 판 게 아니고 여자도... 그런데 있는 그대로 쓸 순 없잖아요. 라스까사스 님, 음악은 Liberty에 촛점을 두었어요. 나나 무스꾸리 노래를 좋아하기도 하고... 삭제 12-21
부에노 saci 온니... 남자든 여자든 다 상대적인 거 아닌가? 온니는 어디 가도 늘 웃으면서 행복하게 잘 살 거야... I believe in saci. 기운 내서 항해일지 올릴게요... julio 님, 항상 반가워요. 울 알젠 님도... Rainbow 님, 한강 님도... 삭제 12-21
saci 샤찌..너..어디 갔니...?....아무데도 안갔구만......그리고...... 당연하지...부에노가 샤찌를 believe in 안하면 누구를 하냐........ 스트레스는 웃음의 대가가 받으면 되니..? ....... 기운 차리고... 남희씨와 진한 연애나 하지..... 12-21
미래미시 인생의 굴곡이 심한 그러나 나름대로 행복한 사람 k군요...소설같은 인생 참 많고 다들 내인생 소설로 쓰면 전집이야~~그러는데 부에노의 인생소설이 전집이 되겠는데요? 가슴 찡한 생의 이야기네요.. 근데 사찌 말데로 남희씨랑은 헤어졌나...항해일지 12-21
미래미시 가 안보이네요....기다리고 있어요~~ 12-21
별지면-내리는비 부에노님이 아 하고 말하면 척 하고 알아듣는 나는 멍소리가 좀 날 필요한 게 있겠지요 ....그래도.....있는그대로 쓰면 안돼요 ...인간은 존엄한 존재라 위인전을 쓸때두 포장은 필수죠!!! ....^^ 12-21
Zapata 나도 희망이 있네~ 한잔 해야 겠다. 포도주 반병은 들어가는 큰 잔으로~ 우찌 나도 모르는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었을꼬? 목욕 시킬때 꼭 머리를 감겨준다는 칠레 여인 이야기는 들었다만~ 12-21
칠레안드레스 히브리 노예의 합창이 글과 함께 너무 좋습니다. 인간은 좌절하면서도 희망과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사는 일생. 요즘 부에노가 많이 우울해요. 12-21
Hun 부에노님.글 잘보고있습니다.그냥 소설이라니하고 글을읽기시작하면 왠지허전하고 사실을 기초해서 쓰신걸로 생각하면 왠지 맴이 아프고.....그렇네요..^^ 그나저나 남희씨와 독일청년은 어디로 도망갔는가 봅니다.건강 잘챙기세요^^ 12-22
bruce 부에노님, 님의 글귀를 지난번부터 접하고 가끔 라틴방을 기웃거립니다.좋은음악과 마음속 남아있는 역정이 끌어오르는 글귀... 저는 중국상해에 있습니다. 가족과 떨어저 혼자 지내다보니 님의 글귀만 가지고도 혼자 눈 감고 느끼고 있습니다. 12-23
김도환 전설같은 사랑에서 가슴시리도록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읽고 부에노님의 모든 글을 읽고있습니다,,,, 그런데 k형님이 또 나오시는군요,,,, 전설같은 사랑에서는 k형님무단하차해서 그후로 못보다가 그 미망인을 만난것으로 알고있는데 이글에서는 k형님 돌아 12-28
김도환 가시기전에 한번 만날걸로 되어 있네여 어떻게 된건지 이해가 안돼네여^^ 12-28
부에노 하하하~ K라는 성이 김 씨도 있고... 강, 고... 이 글은 다른 나라에서 겪은 실화입니다. 아무튼 관심을 갖고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기분 좋은 하루 되시고요. ^_^ 삭제 12-28
asarabia 우연히 부에노님 글만 읽고있는데 밤새버렸네요. 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