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웨이트의 초대형 원유 운반선 (VLCC, Very Large Crude oil Carrier)
인도 요기니 이야기
배를 오래 타면 이상한 행동을 하는 선원들이 가끔 있다.
항해 중에 선미에서 바다를 보고 있다가 용왕님이 자기를 부른다고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질 않나, 나처럼 상륙 중에 희한한 경험을 하고 내가 지금 제정신인가 의심이 들기도 하니 말이다.
'NAMMI SPIRIT' 호가 소말리아 해적으로 악명을 떨치는 아덴만을 거쳐 아라비아해로 진입하니 전에 인도 최대 항구인 봄베이 항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난다.
지금은 원래 이름인 뭄바이로 바뀌었는데 상륙 나갔다가 허름한 사리(인도 여인들이 타이트한 상의 위에 걸치는 천)를 걸쳤지만,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중년 여인을 만났다.
후덥지근한 거리를 걷던 나에게 그 여인이 말을 걸었다.
재미있는 게임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인도 여인들은 그들의 카스트 제도와 가부장 전통이 엄격하게 전해져 내려오기에 사리 끝의 남는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남정네들과 좀체 눈도 안 마주치는데 먼저 말을 거니 이방인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하물며 윤곽이 뚜렷하고 눈이 커다란 인도의 예쁜 여인이 말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숫자를 두 개만 생각해 보라고 했다.
이건 또 뭐래?
아무튼 고개를 끄떡했다.
그중 더 좋아하는 숫자 하나만 생각해 보란다.
‘O.K.’라고 말하자, 그녀가 2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어~, 7을 포함한 두 개의 숫자를 생각하다가 내가 특이하게 쓴다는 말을 많이 듣는 2를 생각했는데...
‘맞다.’고 말하니 그녀가 생글거리면서 자기가 한 가지 게임을 더 해 볼 테니 맞추면 1불만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래, 뭐 1불쯤이야 Go ahead, please.
당신이 좋아하는 꽃 두 종류를 생각해 보라 했다.
꽃 좋아하지 않는 사람 어디 있겠느냐만 특별히 이 꽃이라는 것은 없었기에 나미와 같이 교정을 걸을 때 자주 보았던 길가의 코스모스와 포르투갈 오뽀르또 항의 노천카페에서 보았던 겨울 수선화를 생각했다.
그러자 그중 하나를 빼라고 했다.
‘으음~’ 하며 작은 신음을 내뱉자 내 눈을 쳐다보며 ‘Cosmos’를 좋아하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햐~,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에 ‘와우~’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뭐 그냥도 도와줄 수 있는 건데 약속을 한 거니 선뜻 돈을 꺼내주었다.
그리곤 당신 애인 이름을 영어로 생각해 보란다.
이것도 맞추면 1불을 주란다.
자기가 먹여 살려야 할 중생들이 여러 명 있다면서.
과연 그것도 맞출 수 있을까 해서 대답을 하고 N, A에다가 끝 자를 I로 해야 하나 Y로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으니 종이에 적어 보라고 했다.
그녀가 볼 수 없게 가려서 적으니, 접어서 자기에게 주라고 해서 그렇게 하자 나미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럴 수가...
무슨 대단한 독심술이라도 가진 사람인가 의아하게 생각하고 쳐다보니 웃으면서 자기는 요가를 하는 요기니인데 오래 수행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능력이 생긴다며 ‘Give me one dollar more, please.’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손을 보라며 아까 받은 1달러짜리를 흔들면서 다른 손에 있던 이름 적힌 종이를 구겨 쥐고 잠시 후 손을 펴니 종이가 사라졌다.
마술 부리나 내 눈을 의심하며 그녀를 쳐다보자 초롱초롱한 눈에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이야기 해줄 것이 있다고 했다.
당신 자식이 아들하고 딸 두 명이 있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어 버렸다.
‘에이, 나도 그런 말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가던 길을 걸어갔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You'll have to believe me.’라고 내 뒷전에 대고 말하였다.
가다가 잠시 후 뒤를 돌아보았더니 조금 전의 그녀가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질 않았다.
사파이어 빛같이 파르르 아름다운 아라비안 씨를 도도히 가르고 있는 'NAMMI SPIRIT' 호의 후갑판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인도 쪽을 바라보고 예전 그 요기니를 돌이켜 봤다.
그녀가 내가 생각했던 숫자 2와 코스모스, 그리고 나미 이름을 알아맞힌 건 결코 우연일 수가 없어.
뭔가가 있는 건 틀림없는데 아이가 둘이라니 그건 또 뭐래?
나 모르게 누가 키우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앞으로 자식을 두 명 갖는다는 말인가?
하긴 나도 아가씨들 엉터리 손금 봐줄 때 앞으로 자식이 몇 명 있겠고 재물 복이 많다고 뻥을 치긴 했는데...
뱃전을 가르는 파도 소리와 함께 멀리 인도 쪽으로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작은 어선들이 그물질하고 있었고 그 갈매기들은 그물 주위에서 일용할 양식을 먹으려고 다투듯이 물속을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배 옆으로 만새기 떼들이 오색영롱한 빛깔을 뽐내며 유영하고 있었다.
이런 더운 바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 물고기는 7~8마리가 떼지어 수면 가까이 헤엄치면서 좀체 낚시를 물지 않는다.
배가 정박 중에 베테랑 선원들은 이놈을 훌치기낚시로 잡는데 갑판 위에 올라오면 앞이마가 융기해 있고 큰 지느러미가 있으며 1미터가 넘는 몸체가 시시각각 무지개 색깔로 변해 아름답다 못해 슬퍼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 물속에서 나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요기니의 기괴했던 목소리도 겹쳐서 들려 왔다.
“You'll have to believe me, believe me, believe me...”
‘뭘 믿으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나도 오랜 단조로운 해상생활에 조금 맛이 가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아니 보고 싶은 나미와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서 그런 게 아닐까.
만일 이게 사랑이라면 인연을 주는 건 우리 의사와는 무관한 것일까.
‘아니, 국장님. 한참 찾았잖아요. 지금 레촌을 굽고 있는데 와서 간 좀 보시고 술 한잔합시다.’라며 손을 잡아끌었다.
남미에서 즐겨 먹는 새끼 돼지 통 바비큐 요리이다.
문득 떠오른 요기니와 만새기 생각에 개운치 않았는데 갑자기 식욕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아니 술이 당겼는지도 모르겠다.
주방으로 들어가니 맛있는 냄새가 코로 솔솔 들어왔다.
뻬루로 이민 간 유빈 누나가 동생 오면 해준다고 몇 번이고 이야기하던 맛있는 음식이다.
주방 안에는 이미 몇몇 선원들이 둘러서서 레촌 기름에 손과 입이 번드르르해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
싸롱(고급사관 수발드는 조리원)에게 내 방에 가서 맥주 한 박스 갖고 오라고 시켰다.
뭔가 냄새를 맡고 뒤따라 들어온 1항사도 방긋하며 신이 나서 자기 방에서 맥주 한 박스 더 가져오라고 시켰다.
선원들이 좋아서 지르는 함성이 아라비아해 한바다에 울려 퍼졌다.
참 이 맛에 배를 타지.
내 돈 안 내고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이렇게 맛있는 새끼 통돼지 바비큐를 양껏 먹을 수 있으니.
이런 자리에 이삼 등 항해사나 기관사 등 초급 사관들은 잘 끼질 않는다.
사관과 신사의 품위를 지킨다고.
그런데 일등항해사쯤 되면 새댁 시절을 훨 지난 줌마렐라처럼 낄 데 안 낄 데 가릴 거 없이 온갖 데 다 기웃거린다.
물론 사람 나름이겠지만, 선원들도 나이 어리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간 사관들보다는 분위기 좋게 같이 어울려주는 것을 당근 더 좋아한다.
입에 살살 녹는 레촌에 맥주 몇 캔을 입에 털어 넣으니 주방에서 보이는 배 뒤로 하얀 물거품이 길게 따라오며 나미가 손짓하는 것같이 보였다.
역시 너나 할 거 없이 외로운 바다에 오래 있으면 맛이 가는 게 맞는 모양이다.
만기 되면 얼른 하선해야지.
헛것이 보이거나 환청이 들려 추한 모습 보이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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