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항해일지 중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면서

부에노(조운엽) 2019. 7. 20. 08:10

  

 


한진해운 컨테이너 선을 선두로 선단을 이뤄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대형 선박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면서

 

 

지중해를 유유히 건너 온 'NAMMI SPIRIT' 호는 이집트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포트사이드 항으로 진입했다.

배가 미속으로 항진하자 흰 옷과 하얀 터번을 둘러 쓰고 수염을 기른 이집트 상인들의 작은 배들이 따라 붙으며 먹을 걸 사라고 고함을 쳐댔다.

양배추와 오렌지가 싱싱해 보여 값을 물었더니 엄청나게 쌌다.

항구에서 선식을 통해 부식을 실을 때는 좀 비쌀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 현지인들이 배에 싣고 다니며 파는 것들은 아무래도 싸기 마련이다.

선원들에게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먹게하기 위해 두 쪽배에 실려 있는 것을 몽땅 샀다.

영수증 처리야 현지인에게 직접 산 걸로 해서 캡틴 사인만 받아서 본사에 보고하면 된다.

까짓거 다 떼어 먹어야 몇 푼한다고.

 

그런데 그 놈의 오렌지가 말썽을 일으켰다.

처음 먹을 때는 잘 몰랐는데 며칠 지나니 껍질에서 작은 벌레가 톡톡 튀어 나왔다.

배를 처음 탄 선원들은 질겁을 하고 이런 걸 어떻게 먹느냐고 화를 냈다.

그렇지만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1항사는 배를 타려면 비료, 농약 안 친 이런 맛없는 것도 다 먹어야 한다며 벌레를 개의치 않고 알갱이를 입안에 털어넣었다.

사실 배에서 선원들이 못 먹어서 탈이 나는 경우는 극한상황 말고는 거의 없고 장기 항해를 하는 외항선에서는 싱싱한 채소나 과일이 늘 떨어지기 마련이다.

16세기 대양항해 하던 범선 선원들은 장기 항해하면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굶어 죽기 전에 비타민이 부족해 이나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NAMMI SPIRIT' 호는 운하 통과를 위해 대기중인 화물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지정된 위치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본선을 기다리고 있던 급유선으로부터 벙커 C와 A를 급유 받았다.  

이어 예정된 시간에 현지 파이로트가 승선하여 운하에 진입하였다.

그 사막 언저리에는 이집트와 이스라엘과의 전쟁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파괴된 건물 잔해와 부서진 탱크도 보였고, 전쟁 끝난지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치우지 않고 그냥 놓아둔 이유는 뭘까?

고철로 팔아도 제법 돈이 될 텐데.

 

대기온도는 사십여 도에 육박했고 은빛 사막에 불어오는 회색 모래 바람과 함께 선박 통행량이 많아 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과 냄새에 시야가 좁아지고 숨 쉬기가 거북했다.

늘 하던 수에즈 운하 통과 방법대로 선대를 구성해 차근차근 운하를 통과하여 홍해로 들어갔다.

 

통신실 볼트문 밖으로 낯 익은 풍경을 바라보며 이집트 무선국과 포트 콘트롤의 통신을 듣고 있던 중 선박 조난 통신과 호출, 응답 주파수인 500KHz에서 긴급 신호가 울렸다.

해상에서 조난 다음으로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모르스 통신이다.

 

얼른 수신을 해보니 홍해 입구에 미확인 기뢰 주의를 알리는 전문이었다.

젠장, 전쟁 끝난지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기뢰라니...

아무튼 멋 모르고 항해하다 그런 것에 부딪치면 누가 손해인가?

긴급 통신문을 브리지로 갖고 올라가니 당직 이항사와 조타수만 천정에서 나오는 에어컨 구멍 아래에 서서 숨을 헐떡이며 전방을 견시하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 리버풀에서는 추웠지만, 적도가 가까운 사막 지방을 지나니 급상승한 기온에 체감 온도가 더 높게 느껴졌다.

캡틴은 운하 통과하면서 식사 때 외에는 선교에서 파이로트와 함께 선박을 지휘하느라 무척 피곤했으리라. 

해도를 보니 기뢰가 부유하는 위치와 본선 항로가 약간 떨어져 있다.

노련한 당직 이항사가 침로를 기뢰에서 더 먼 곳으로 수정했다.

바다에서 부유물이 한 곳에만 가만히 있는 게 아니잖아.

바람따라 파도따라 이리저리 떠다니는 거니까.

무수한 상선이 항해하는 바다에 그런 위험한 부유물이 있으면 얼른 제거해야지 이 나라에서는 장비와 인력이 많이 부족한 모양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긴급 통신문만 내보내서 선박의 승조원들을 긴장하게 만들까.

 

코스를 바꾸니 선미쪽으로 커다란 포물선의 물거품이 보였다.

캡틴이 눈을 부비며 선교로 들어왔다.

베테랑 선원들은 자다가도 배의 미세한 변동상황을 육감으로 금방 감지한다.

캡틴으로부터 '뭔 일인데?'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긴급 통신문을 보여주었다.

전문과 해도를 번갈아 보고 기뢰 발견 위치와 본선 코스를 확인한 캡틴이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침실로 내려갔다.

 

좌현으로 아스라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제다 항에 입항하려고 대기 중인 선박들이 많이 보였다.

선박 무선 전화 VHF에서 '치익'하는 잡음과 함께 가끔 한국 선원들 목소리가 들렸다.

"한국 배 있어요?"

이어 들리는 '채널 몇 번으로 나오세요.'라는 한국말.

VHF 채널 16은 조난 통신을 위해 보호되는 주파수로서 선박과 선박, 육상국 간에 호출, 응답을 할 때만 사용하고 실제 통신은 다른 채널로 바꿔서 사용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나미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지금쯤 독일에서 업무파악한다고 그 예쁜 가슴을 출렁대며 씩씩거리고 다니겠지.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학생 때 저런 나미에게 맞을 짓만 골라 하고 다닌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예리한 그녀 역시 내가 자기 시선을 끌기 위해 작전하는 걸로 생각했던 건 아닐까.

이것도 사랑이라면 보통 인연이 아닐 텐데...

이제 다음 항구에 들어가면 만기 하선이다.

교대하고 한국에서 좀 쉬었다가 나미를 만날 수 있는 독일에 자주 들어가는 배를 골라 타야지.

 

우리가 살면서 날마다 숨쉬는 공기처럼 소중한게 가족과 이웃들인데, 그 소중함을 잘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지루한 항해 중에 이렇게 서로를 위하고 소통할 수 있는 동료 선원들이 있어서 오늘도 'NAMMI SPIRIT' 호는 망망대해를 심심치 않게 순항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