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에서 내가 사랑하고 믿고 있는 것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부정적이고 슬픈 이야기를 해야 옳을까?
나 어릴 적 내가 살던 사대문 안, 청계천 6가 복개되지 않았던 시커먼 시궁창 물과 양 옆의 판자촌, 그리고 종로 6가에 하나밖에 없던 공동수도, 공동 화장실.
그 앞에 종이 표를 들고 차례를 기다리고 길게 서있던 나와 내 이웃들.
비 오는 날, 종로 6가 골목길은 까만 진흙탕이었지.
술 취한 자칭 개병대 출신 아저씨는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열 받아서 웃통을 벗어제치고 그 지저분한 진흙탕 길에 온몸으로 구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악다구니로 거품을 물며 사납게 욕을 해대고 울분을 토해냈었지.
더럽기도 하지만 무서워서 아무도 말리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등굣길에 버스 정류장에서 구걸하던 할아버지, 애 안은 여인 그리고 남루한 거적 같은 옷을 걸친 나 보다 어렸던 아이들.
그런 것이 역사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 글쓴이가 기억하는 서울 한복판에서 있었던 어린 시절의 일부이다.
그때 나는 학급에서 거의 유일하게 3층집에 살았다.
그러나 증조할머니도 살아 계시던 그 시절 먹을 것이 상당히 궁했었다.
그때 굶지는 않았지만 밥 대신 끼니를 때워야 했던 많은 것들이 검은 빛이 도는 밀가루 개떡, 감자 삶은 것 그리고 수제비였었다.
4대가 어울린 대가족이 사는 그곳에 어쩌다 닭 알 두어 개에 쌀뜨물, 그리고 새우 젖으로 부풀린 계란 찜에 숟가락이 자주 가면 옆에서 밥 먹던 형이나 삼촌들이 눈에 힘을 주고 쳐다보던 기억이 난다.
아, 그리고 을지 국민학교 다니다가 동네에 불이 나서 창신동 산동네로 이사 가 학군제 때문에 졸지에 전학할 수밖에 없었던 창신 국민학교 다닐 때는 6학년 20반, 1,500여 명 콩나물 시루 같던 학교 친구들이 도시락을 못 싸오는 아이들이 많아서 남의 나라에서 원조해준 옥수수로 쑨 죽을 얻어 먹다가 바뀐 옥수수 빵을 얻어먹고 수돗물과 함께 허기를 달랬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간에 내가 원해서 남미에 왔다.
여기 와서 이들의 찌들은 가난한 삶의 모습을 굳이 내가 알릴 필요가 있을까?
사람 사는 모습은 다 양지와 음지가 있는데.
이미 많은 이들이 제 삼 세계와 남미의 실상과 부정적인 것들을 다 알려서 맹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난 남의 나라가 우리와 상대적으로 우월하니 못 하니 하는 소리를 입밖에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 게 또 뭔 의미가 있을까?
다만 물질적인 것을 쫓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웃어서 아름다운 사람들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내가 숨 쉬며 대화하는 곳에 사는 이웃들이 인상 쓰며 욕하는 것 보다 웃는 모습을 보면 따라서 즐겁지 않은가?
삶의 질과 가치를 물질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다 아는 터인데.
우리와 저들의 아름다운 미래는 웃음으로서 더 밝아질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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