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원의 항해일지

침몰 위기의 ‘HAPPY NINA’ 호

부에노(조운엽) 2019. 7. 24. 06:28

 



북태평양에서는 별거 아닌 파도 

  


침몰 위기의 ‘HAPPY NINA’ 호

 

 

“따르릉 따르릉”

감은 눈으로 침대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비몽사몽간에 시계가 울려 잠이 깼다.

5시 20분에 기상도가 나오니까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며 통신실로 갔다.

파도가 약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배가 요동을 쳤다.

 

선원들이 피우는 Duty Free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팩시밀리를 켰다.

주파수를 17메가 헬스 대에 맞추어 놓고 창문 밖을 쳐다봤다.

한참 보고 있으니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에서 성난 파도가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선수, 좌우 현으로 바닷물이 넘나들어 잠수함을 방불케 했다.

 

팩시밀리에서 ‘삐’ 소리를 내며 기상도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수신 상태가 양호한 것을 확인하고 욕실로 가서 샤워했다.

파도가 심할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한다.

중심을 못 잡고 미끄러져서 어디 한 군데라도 다치면 나만 손해지.

자빠지지 않게 벽에 붙어 있는 손잡이를 잡아가며 대충 샤워를 마친 후 기상도를 받아서 선교로 올라갔다.

 

하우스 마린 맨 위에 위치하여 시야가 확 트여 있는 선교는 배의 무게 중심에서 멀기에 흔들림 폭도 크다.

당직 일등 항해사와 캡틴이 거친 바다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파도가 선창을 넘어 선교 유리창까지 때렸다.

‘HAPPY NINA’ 호가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 속을 항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통로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비틀거리며 기상도를 갖고 나타나니 캡틴과 1항사가 고개를 끄떡이며 굳은 표정으로 기상도를 펼쳐봤다.

저기압의 세력은 더 커지고 본선은 그 중심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배를 돌릴 수도 없는 일이고 망망대해에서 피항할 데도 전혀 없다.

본선이 저기압 진행 방향의 중심 아래쪽을 통과하면 뒤바람을 받아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옆바람을 받으면 거친 파도에 갑판 위의 원목을 묶은 와이어가 터질 수도 있어 큰일이다.

원목이 바다 위에 떨어져서 부메랑처럼 파도에 다시 본선을 때려 선체에 구멍이라도 나면 침수되어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선장과 1항사가 기상도와 해도를 번갈아 보면서 변침할 항로를 의논했다.

캡틴의 지시대로 조타수가 키를 수동으로 바꾸고 침로를 변경했다.

일단 상황을 더 지켜보기로 하고 캡틴과 나는 당직자들을 남겨두고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파도가 식당 창문 밖에까지 올라와 ‘HAPPY NINA’ 호를 바닷물로 깨끗이 청소해주었다.


배가 심하게 흔들려 국이 쏟아질까 봐 국그릇을 한 손으로 잡고 모래알 씹듯이 대충 식사를 하고 있는데 선교에서 1항사의 다급한 선내 방송 소리가 들렸다.

“선장님! 7번 홀드 위의 와이어가 몇 개 터졌어요. 급히 올라오셔야겠습니다.”

선장은 방송을 듣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숟가락을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황급히 식당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우려했던 일이 기어코 벌어진 모양이다.

바닷물이 갑판 위를 넘나들지 않을 때야 라이싱을 다시 하는 것은 일도 아닌데 이 파도에 어쩌란 말인가.

한두 시간 만에 사그라질 파도도 아니고 몇 날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원목이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배가 침몰이라도 하게 되면 이 추운 바다에서 과연 몇 분을 견딜 수 있을까.

 

캡틴이 갑판부원들을 선교로 호출하는 방송이 나왔다.

나도 선교로 올라가니 갑판부 선원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고 기관장과 1기사도 올라와 있었다.

7번 홀드 위의 와이어 몇 개가 터져서 원목이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본선과 전 선원의 생사가 걸려 있는 일이라 ‘HAPPY NINA’ 호의 총책임자인 캡틴이 긴장하여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파도에 라이싱이 터져서 이대로 운항할 수는 없고, 항로를 잠시 파도 방향으로 바꿀 테니 그사이 1항사와 갑판장은 라이프 재킷을 입고, 로프로 몸을 묶고 7번 홀드 위의 와이어를 새로 묶으시오. 워키토키 갖고 가고, 최대한 안전에 유의하시오. 나머지 갑판부 선원들은 작업 준비를 도와주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1층 현문 입구에서 비상 대기하시오. 각자 위치로!”

 

선원들이 움직이려 하는데 일등 갑판원이 갑자기 나서며 캡틴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선장님. 갑판장님 대신 제가 갑판으로 나갈게요. 갑판장 행님은 가족이 많이 딸려 있고 나는 총각인께로 제가 나갈라요.”

1갑원의 돌발적인 발언으로 인해 잠시 정적에 쌓였다가, 침묵을 깨고 안 선장님이 입을 열었다.

“초사. 어찌했으면 좋겠소?”

잠시 머뭇거리던 1항사가 입을 열었다.

“선장님. 갑판장 나이도 있고 하니 1갑 의견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갑판장이 나섰다.

“안 돼요. 1갑 저놈은 앞으로 살날이 구만 리같이 많이 남았고 장가도 안 갔는데요. 그 마음은 고맙지만 ‘해피 니나’ 호와 전 선원의 생사가 달린 이 위험한 일은 그래도 배 짬밥을 더 많이 먹은 제가 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기관장이 말문을 열었다.

“캡틴. 이러면 어떻겠소. 기관실에서 새 와이어 끝에 고리를 용접해서 달아줄 테니, 경험 많은 1항사와 갑판장이 7번 홀드 좌우 현 네 군데에 엑스자로 걸어만 주면 데릭으로 와이어 한가운데를 들어 올리는 거요. 임시방편으로 원목이 움직이지 않게 윈치하고 같이 고정만 시켜놓고 나중에 파도가 잔잔해지면 그때 다시 라이싱하면 안 되겠소? 그렇게 하면 일도 쉽고 위험도 적을 것 같은데 윈치는 내가 조종할게요.”

기관장의 말에 캡틴이 1항사와 갑판장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본선의 생사가 달린 위험한 작업 시간을 최소로 줄이려면 기관장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겠소. 1갑의 갸륵한 마음은 잘 알겠으나 갑판장 몸에 묶은 로프나 잘 잡아주시오. 다른 의견 있는 사람은?”

 

1기사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한발 앞으로 나와 기관장에게 말했다.

“기관장님. 동기인 1항사도 나가는데 젊은 제가 윈치를 잡아야죠. 영감님은 캡틴과 같이 브리지에 계십시오.”

모두 말없이 숙연한 가운데 선 기장과 1기사의 얼굴을 쳐다봤다.

“1기사, 알았네. 그러면 모두 신속하게 작업 준비하시오!”

캡틴의 명령에 갑판부 선원 모두 내려갔다.


캡틴이 남아있는 사관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1갑, 저놈. 이번에 무사히 수습되면 내 직권으로 진급시켜야겠네. 1기사 자네는 1항사와 함께 술 한 잔 진하게 살게.”

기관장이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려~, 캡틴. 대단한 놈들이시. 이 상황에서… 나중에 같이 한잔 사세.”

나도 가슴이 먹먹하고 눈가의 이슬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선교에서 내려와 조리장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고 고생하는 선원들을 위해 특식을 마련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아버지 나이보다 더 지긋한 조리장은 파도에 지쳐 파리한 얼굴에 고개를 끄떡이며 ‘뭐 맛있는 음식을 해야 잘했다고 할까’라고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음식을 먹어보지도 못하고 황천객이 될 수도 있는 우리들.

이런 묘한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경험 많은 사람을 지칭할 때 산전수전 그리고 공중전 다 겪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 수전이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일까? 


 


 
 

 

RailArt박우물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야죠. 결론은 해피엔딩. 왜냐하면 멸쩡히 지금 이 글을 추억하면서 올렸으니까.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04-28

마당쇠 글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04-28

David 국장님! 정말 흥미진진한데요.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04-28

워렌버팡 정말 목숨이 내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 파도를 보니 왠지 모를 살기를 느낍니다. 모두 무사하시길......   04-28

saci 이 글이... 내가 부에노님을 좋아하게 된 동기가 된 글인데... 저 아름다운 선원들의 차라리 내 몸을 버려서 동료를 살리고 또 배를 살리자는 저 장엄한 결심에... 가슴이 울리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이미 올리신 항해일지죠... 이런 말하면   04-28

saci 페미니스트들이 화낼지 모르지만... 이러한 전우애를 비롯한 동료애는 남자들에게서 훨씬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지요... 정말 대단하고 내가 초라해지는 느낌이었지요... 나에게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내가 선뜻 저리 나설 수 있었을까... 난 아직 젊으니까...   04-28

saci 내가 할게요... 이럴수 있을까... 저 무서운 파도 속으로... 결국 희생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절대 절명의 순간에 나를 던지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나의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명목은... 결국 또 가짜구나... 하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04-28

saci 한 글이었지요... 부에노님... 오늘은 음악이 달려서 더 비장합니다... 잘 선곡하셨어요... Manolo Carrasco 음악... 상당히 라틴적이면서도 클래식적이라 좋아합니다.... 이미 가슴 속에 들어있는 다음 글을 또 기대합니다......   04-28

젤소미나 안녕하세요... 여러 나라방을 떠도는 나그넵니다. 이곳 라틴방은 너무나 분위기가 좋아서 꼭 들르는 곳이죠. 오늘 사진도 그렇고 글도... 음악도 너무나 감동적이네요. 어글리 코리안 얘기만 듣다 진정한 한국 남성의 기상을 이곳에서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04-28

낙사 정말 감동적인 글입니다. 사선을 넘나드는 사나이들의 우정 짱입니다.   04-29

saci 혹시 올리브 주인장 젤소미나님이 오셨었나. 그럼 정말 영광인데...   04-29

Moroti y Hunghu 와하~ 뭉클. 음악 짱. 우리영감님 글 감동, 또 감동. 빨리 빨리 후속. ㅎㅎ 어~어~별써 날라왔네. 얼른 또 가야겠네여. 화팅~   04-29

 

지심행 와~ 멋진 사나이들. 역쉬~ 한국의 싸나이들은 믿음직해요. 너무 리얼하다. 그런데 그러다 정말 불 났나요? 저 배 사진은 누가 찍나요? 정말 대단한 파도인데 배가 파선 안되나요? 무섭다. 어느 소설이 이보다 더 흥미진진하랴. 음악도 멋져요.   07.04.29 12:21

 

부에노 누나. 한바다에서 실제 항해 중에 사진같은 저런 파도는 애기들 장난이고... 정말 아무 것도 아녜요. 바다를 보세요. 파고가 얼마 안 되잖아요. 사진을 구하려고 몇 시간을 서핑했는데 맘에 드는 것이 없어서 아쉬운대로... 음악 맘에 드세요? 기뻐요. 저도 사실 처음 들어요. ㅋ 만날 패던 사람(?)이 보내줬어요. 감사합니다. ^^   07.04.29 20:38

 

지심행 어머나 상상을 하기도 겁나네요. 그런 항해를 하시다니... 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랑을 위해 ^^  너무 애 많이 쓰셨어요.   07.04.29 20:49 

 

saci 나 별로 많이 안 팼는데... 지심행님이 더 패라고 해서... 조금만 더 팼지요... 하하하...   07.04.29 23:03

 

지심행 ㅎㅎ saci 님 부에노님 배가 좀 들어 가셨을라나?   07:25 

 

南斗六星 아이구~, 사진 속의 파도가 너무 험합니다. 조금만 더 파도가 높았으면 배도 넘어갔겠네요. 저 배 위에 화물이 있었으면 다 끝장났겠죠? ㅎㅎ   07.04.29 09:41

 

부에노 smap 님, 반가워요. 그까이거 별 거 아니라우... 라틴방에서 분에 못 이겨 한바탕하시더니... 이제 saci 언니한테 찍혔어... ㅋㅋㅋ   07.04.29 20:42 

 

saci 아니... 이 분이 그럼... smap 님이였어요? 한문으로 이름을 적어서... 난 쫄아가지구... 할아버지인 줄 알았잖아... 속았네...... 나 안 찍었어요...... 틀린 말한 것 하나도 없는데... 그럼 인사 다시...... 나도 오늘 처음 인사하는 걸로...... 안녕? smap님...   07.04.29 23:30

 

南斗六星 요전번에 메모장에서 이미 들통났었던건데... ㅎㅎ 그럼, 처음 뵙는 듯이 다시 인사할게요. Hola~ saci님...   08:51

 

그라시엘라 눈시울이 뜨거워져 끝까지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전쟁이 따로 없군요. 자연과의 전쟁...... 사나운 바다...... 아름다운 바다...... 06.12.05 01:29 

 

rapha 정말 손에 땀을 쥐게하는... 예전 제 부친께서도 선원 생활을 한동안 하셨는데... 그때 알류우산 열도로... 캄챠카로... 얘기만 들었어요. 이런 상황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어렸을 때이니... 06.12.05 1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