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변한 안양역
비운의 육 여사가 문세광의 총에 맞아 돌아가실 전후로 안양에 산 적이 있다.
그때 막 전철을 만들고 있었다.
거기 사는 학생들은 광화문에서 회유하는 유진 여객 버스를 타거나 열차로 학교를 다녔는데 열차는 한 번 타보고 겁이 나서 다시는 안 탄 기억이 난다.
열차 통학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 타봤는데 낭만 보다는 학생들이 상당히 살벌하게 보였다.
남학생들은 모자에 설탕물을 먹이고 챙을 일자로 펴서 삐딱하게 쓰고 호크를 푼 채 나팔바지를 입고 불량한 티를 내며 아무나 째려보는 것 같았다.
여학생들 역시 치마를 올려 입고 아가씨와 건달들같이 히히덕 대며 어울려 다니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까봐 조마조마하며 먼 산만 보고 서부역까지 갔었다.
그후로는 괜히 조 터질까봐 열차는 안 타고 버스만 타고 다녔다.
열차는 널널했지만 버스는 정말 콩나물 시루처럼 미어 터졌다.
다행히 여학생들이 주위에 있으면 부드럽게(?) 가는 거고, 냄새나는 남학생이나 아자씨가 옆에 있으면 짜증났다.
후암동에서 용산고 까까머리 애들과 수도여고 천사들이 내릴 때까지는 숨도 못 쉴 정도로 꽉꽉 채워서 사오십 분을 갔으니...
내가 안양 살 때는 기차길 건너 비산동에 대농 그룹 계열의 큰 방직회사가 있었다.
거기서 일하는 아가씨들이 무지 많았다.
그렇지만 마주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녀들 출퇴근 시간과 내가 그 앞을 지나가는 시간대가 맞지 않았나 보다.
충신동으로 가기 전까지 비산동 개울 옆 주택가에 할아버님이 직접 지으신 집에서 살았는데 캐나다로 이민 가신 막내 고모님이 가끔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왔었던가...
아무튼 일요일 저녁에 고모가 학교 기숙사로 돌아간다고 버스 타는 데까지 바래다 주던 기억이 난다.
그때 마당에는 연못이 하나 있었다.
그거 만들 때 형과 삼촌도 땅을 팠고 나도 팠던 기억이 난다.
근처 개울 가에서 고기를 잡아다가 그 연못에 넣기도 하고...
거기 살 때 옆집에 수도 여고 다니던 예쁜 누나가 한 분 살고 있었다.
그때는 일 년 선후배만 되도 하늘과 땅이었다.
그 누나가 나를 무척 이뻐했다.
시험 기간만 아니면 종종 나를 불러서 말을 시켰다.
난 무척 부끄러워 하던 시기였지만 누나가 부르면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때 가슴이 상당히 뛰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세상이 다 보랏빛으로 참 아름다웠지...
그때 좋아하던 음악을 이야기하고...
커서 하고 싶은 꿈들을 이야기하고...
학교와 친구들, 선생님,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도 많이 하고...
라디오의 음악프로를 틀어놓고 아랫목 이불 밑에서 이야기하면서 누나의 발만 닿아도 가슴이 콩당콩당 했었는데...
그때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듣다가 누나가 약수물 뜨러 가자고 해서 한밤중에 뒷산에 올라가기도 했다.
귀신 나올 거 같이 무서워서 나 혼자는 밤에 절대 안 갈 텐데, 누나는 겁도 없이 종종 음악 듣다 말고 같이 가자고 했다.
맑은 밤하늘 아래 고요한 숲속에서 누나와 둘이 앉아 무수히 많은 별들을 쳐다보며 이야기하던 추억이 아련하다나...
내 생애, 철들고 나서 그때만큼 순수했던 때가 또 있을까?
개울 물은 엄청 깨끗해졌다나...
약숫물 뜨러 가던 곳은 황량한 도시 가운데 덩그라니 남았다...
옛 기억을 도저히 찾을 수 없게 변했다.
날아가는 새만 봐도 까르르 웃는 즐거운 학창시절...
두루미인가?
요 새는 학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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