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기형도
요절한 시인 기형도
언젠가 모 신문사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국문과 재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윤동주와 기형도를 꼽았다고 한다.
우리 카페의 원로 시인이신 지심행 님과 알헨 꽃미녀 미래미시 누나도 좋아하는 시인이 기형도이다.
특히 유고집으로 출간된 '입 속의 검은 잎'은 이전의 어떤 시인도 표현하지 못한 암울하고 독창적인 시어로 현실을 그려 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입 속의 검은 잎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 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로 등단한 이래 그가 남긴 40여 편의 시들은 29세라는 짧은 그의 생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89년에 출간된 첫 시집이 2002년까지 50쇄 20만 부가 독자에게 팔렸다고 하는데, 아름다우면서도 절망적인 세계관이 투영된 시어들이 현대인들에게 맞았는지도 모른다.
'장밋빛 인생'이란 시에서 절망적이고 염세적인 그의 내면세계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당시 암울한 시대 탓일 수도 있지만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무관하지 않다.
1960년 경기도 연평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중풍으로 몸져누운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지켜봐야 했다.
또 생계를 위해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어머니를 차가운 방에서 기다리며, 뛰어서 신문을 돌리고 오는 누이 몸에서 신문 기름 냄새를 맡아야 했다.
여섯 살 때 한자가 가득한 신문을 읽어 신동이란 소리를 듣고, 학교에서도 늘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은 그였지만, 가정 방문을 두려워하고 상장을 말없이 종이배로 접어 바다 위로 띄워 보낼 만큼 내성적이었다고 한다.
1979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기형도는 문학회에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했다.
그는 평소 노래를 즐겨 부르고 늘 이야깃거리가 풍부했으며 누구에게나 재미있고 설득력 있게 말을 잘해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중앙일보 신문기자 시절 많은 시를 썼다.
한번은 어떤 문학 평론가가 그의 시를 호의적으로 다룬 원고를 신문사에 보냈는데, 마침 그 지면을 담당하던 그는 단호하게 신문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불현듯 세상을 떠났다.
1989년 종로의 한 극장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가족력인 뇌졸증으로 밝혀졌다.
죽음.
특히 천재성을 지닌 젊은이의 죽음은 미처 다 펼쳐 보이지 못한 예술혼 때문인지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기형도의 무덤은 문학을 동경하고 시를 꿈꾸는 이들에게 일종의 성지라고 한다.
시인의 요절과 죽음의 그림자 짙게 드리워진 시집은 이후 기형도 신화를 빚어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그의 작품 세계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일컬었다.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한 것은, 타인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해져, 갇힌 개별자의 비극적 모습이 마치 무덤 속의 시체처럼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데에 있다. 시인은 그의 모든 꿈이 망가져 있음을 깨닫는다. ('입 속의 검은 잎'의 해설에서 발췌)
그의 시는 낯설고 우울하다. 어두운 이미지, 고독과 죽음에 직접 연결된 이미지들이 흔하게 쓰인다. 하지만 먼 곳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현실의 세계를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자주 이야기한다. 위험한 가손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 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풍병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셨다.' 엄마 생각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생각'에서 '찬밥처럼 방에 담겨'와 같은 표현은 신선하게 느껴지면서도 무척이나 현실적이다. 어린 시절 혼자서 집을 지키며 엄마를 기다려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그 정서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한편 우리는 조용한 서정성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시는 어둡고 우울하지만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 처연하게 느껴지거나, 심지어 담담하기까지 한다. 우리 나이 또래였던 그가 살아 있으면 어떤 글을 쓰고 있을지 궁금하다.
아침이슬, 양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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