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레

국내 통기타 포크송 가수 1세대 서유석의 타박네야

부에노(조운엽) 2013. 2. 5. 07:52

 

 

 

 

인생 마지막 꿈은 사랑이란 제목으로 엔딩곡을 만드는 것

 

 

1970년대는 급격한 산업화와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청년 중심의 팝과 대중가요가 등장한 시기였다. 이런 음악을 직·간접으로 듣고 자란 사람들이 바로 ‘7080’ 세대다. 이 시대 민중 깊숙이 스며들어 국민 정서를 자극하고 공감대를 형성해왔던 ‘7080 스타’의 근황과 대중가요 속에 숨은 이야기를 들어본다.  

 

‘가는 세월’의 주인공인 서유석은 국내 통기타 포크가수 1세대다. 가수라는 직업보다는 라디오방송 진행자로 우리에게 더 친숙한 그가 어느새 환갑을 넘긴 나이가 됐다. 그런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서울 여의도 인근의 한 사무실에서 최근 그를 만났다. 첫 만남의 느낌은 예전에 활동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목소리도 쩡쩡해 무척 건강해 보였다.

 

요즘 그의 하루는 너무 짧다. 방송하랴 행사장 쫓아다니랴 할 일은 점점 많아지고, 그나마 천천히 가던 시간마저 가속도가 붙어 하루가 어찌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이제 먹을 만큼 먹은 나이인지라 건강도 챙겨야 하는데, ‘큰 일’을 벌여놨으니 반드시 끝을 봐야 할 판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다 다친 의인들을 제대로 치료, 후원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서유석은 근무 중 불의의 사고로 어렵게 살아가는 전국의 경찰관 가족을 돕기 위해 민간 차원의 지원단체를 설립하느라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사단법인 ‘경찰·소방 공상자 지원 국민연대’ 설립 신청서를 최근 행정자치부에 제출하고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라디오 교통방송을 30년 넘게 진행해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진 사람들이 대부분 경찰관이고, 이들 중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가슴 아픈 사연을 접할 때마다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왔다.

“지금 이 시간에도 경찰 다섯 명이 식물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범인을 추적하다 다쳤는데도,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을 누가 돕겠습니까.”

 

그는 현역 경찰관과 소방공무원 1만 명이 회원으로 가입하는 사단법인 ‘경찰·소방 공상자 지원 국민연대’를 곧 발족한 후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우리 주위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불우한 경찰·소방 가족을 적극 지원할 계획이다.

“형사로 근무하다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이 젊다 보니 자식들도 어리고, 엄마는 가사도우미를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어요. 한창 엄마 손을 타고 자라야 할 아이들을 보면 너무 가슴이 아파요.”

서유석은 사단법인이 정식으로 운영되면 이런 가정에 최고 250만원씩 지원할 수 있게 된다며 흐뭇해했다.

 

그는 요즘도 매일 아침 7시에 DMB 한국교통방송국으로 출근해 2시간짜리 ‘서유석의 교통집중’을 진행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가끔 교회나 종교단체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나가 대중가요가 아닌 찬송가를 부르며 복음성가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아침 방송 일을 끝내면 서울시내 헬스클럽을 찾아가 체력을 단련한다. 매일 러닝머신에서 4㎞를 뛰며 유산소운동으로 건강을 지킨다. 주5일 근무로 토·일요일에는 테니스와 집 뒤에 있는 안산으로 등산을 간다. 술은 30년 넘게 아침방송을 하다 보니 자연히 끊게 됐고 담배는 4년 전에 끊었다. 오전 4시에 일어나 저녁 10시쯤 귀가하는 그의 규칙적인 생활 리듬은 절대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서유석은 한양대 음대교수인 누나의 제자이자 띠동갑 김신욱(50)씨와 1985년 늦깎이 결혼을 해서 현재 경원(20), 영원(18)양 두 딸을 두고 있다. 큰딸은 현재 미국 마사추세스 주립대학 2학년에 다니고 있고 작은딸은 수능시험을 앞둔 고3이다. 서유석은 입시지옥에서 벗어난 개방적인 자식 교육을 위해 두 딸과 아내를 2002년에 말레이시아로 보내고 4년간 ‘기러기 아빠’로 지낸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니까 가사 도우미도 없이 혼자 잘 견뎌낸 거 같아요. 방학 때 가족과 만나고 저도 1년에 한두 번씩 말레이시아로 들어갔거든요. 만약 외로움을 탔으면 지금 보다 훨씬 빨리 늙었을 거예요.”

 

그는 ‘지금 가족과 함께 사니까 그때 가장 많이 고생했다는 생각이 들고, 떨어져 있으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떤다.

“인생이 긴 것 같아도 길지 않고, 그렇다고 시간이 적은 것도 아니고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집니다. 저는 명예는 다 가졌어요. 운동선수, 가수, 방송인이라는 3관왕을 달성했으니까요.”

그는 “가정이든 사회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사랑’이란 두 글자”라며 “제 인생의 마지막 꿈은 ‘사랑’이란 제목으로 엔딩곡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유석은 누구?  

 

서울 토박이인 가수 서유석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교장을 지낸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엄하게 자랐다.

해방둥이인 그는 신촌에 있는 창천초등학교와 서울중·고교,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어머니는 신사임당 초대 수상자로 금란여고 교장을 역임했으며, 아버지는 덕수상고·서울고·성동고 교장을 지냈으니 가정교육은 엄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때 핸드볼 선수생활을 시작했고 고교대표 때 아버지가 학교 교장이었다.

그는 졸업 후 체육특기자로 대학에 진학했으며 나중에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

 

그는 대학 시절 학교 입구에 있는 ‘퀸’이라는 음악다방에 들락거리면서 음악과 자연스레 인연을 맺는다.

“그때부터 음악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남들 보다 미국 서부지역의 대표적인 컨트리 음악이나 모던 포크 음악을 먼저 알게 됐어요.”

서유석은 ‘퀸’다방 주인이 건물 옆에 ‘카사노바’라는 국내 최초의 라이브 카페를 개업하면서 당분간 사람을 구할 때까지 카운터 일 좀 봐 달라고 해 밤마다 업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에보니 아이스’라는 통기타 가수가 개런티 문제로 출근하지 않자 단골손님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그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대신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는데 반응이 의외로 좋아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 후 서유석은 고정 가수로 출연했고, 우연히 카페를 찾은 코미디언 구봉서와 서영춘 씨, 동양TV 쇼 담당 PD에게 발탁돼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외국 음악이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에 그는 동양 TV 쇼 프로그램인 ‘쇼쇼쇼’에 나가 팝가수 밥 딜런의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노래 ‘블로인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을 불러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는 행운을 맞는다.

그 당시 국내 여건상 반전가요나 사회비판 노래를 부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 때였다.

서유석은 방송에서 바른 말을 잘해 중앙정보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를 정도로 찍혀 있었다고 귀띔한다.

 

서울대 미대에 다니던 김민기는 러닝셔츠에 고무신 차림에 직접 작곡한 ‘친구’와 ‘아침이슬’ 두 곡을 들고 명동 생맥주 카페 ‘명동장’으로 찾아와 그와 상의하기도 했다.

서유석은 후배 가수 양희은의 매니저 역할을 하면서 ‘아침이슬’이라는 명곡을 연결시켜 주기도 했다.

방송 진행은 동양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 DJ로 처음 시작했다.

가끔 사회를 비판하는 말을 그대로 방송에 내보내 중앙정보부 직원들의 연행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한 적도 있다.

대전으로 내려가 친구가 경영하는 업소에서 불렀던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가는 세월’이다.

이 곡은 1976년 8월에 발표됐는데, MBC 인기가요 14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국민애창곡으로 불렸다.

 

이듬해 MBC라디오 반공드라마 ‘그림자’의 주제곡 ‘그림자’를 터뜨려 다시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황소걸음’과 독도 지키기 운동을 위해 한돌이 작곡한 ‘홀로 아리랑’도 연이어 히트됐다.

1983년부터 MBC 라디오 교통방송 프로그램인 ‘푸른 신호등’의 진행을 맡아 16년 7개월 동안 ‘안전 교통 파수꾼’ 역할을 해왔다.

그는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떨어지기도 했다.

 

 

글 추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