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서 아름다운 아르헨티나 세뇨리따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스무 살의 겨울, 나는 첫사랑에 실연을 당했다. 무릇 모든 일의 처음이 그러하듯, 어리고 어리석고 어설픈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잃었을 때 나는 사랑을 잃었다고 온 세상에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긴 생머리를 짧은 커트로 싹둑 자르고, 귀를 뚫고, 속눈썹이 눈을 찔러 시력이 약화됨을 기회 삼아 쌍꺼풀 수술을 했다. 무겁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니 목덜미가 허전했지만 아침마다 머리를 감고 말리는 시간이 훨씬 줄었다. 귀를 뚫은 자리가 아물기 무섭게 오색영롱하게 빛나는 구슬 귀걸이를 사들이기 시작했고, 그것을 찰랑거리며 다니노라면 우울했던 마음까지도 반짝거렸다. 쌍꺼풀 수술은 제법 큰 결심이 필요했는데, 어쨌거나 환부가 아무는 동안 나는 몸의 아픔에 기대어 마음의 아픔을 얼마간 덜었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 법석을 벌이고 나니, 그해 겨울이 거짓말처럼 지나 있었다. 언제 그토록 실연의 상처로 앓았냐는 듯이 다시 가슴을 두근거리며 새로운 사랑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스무 살, 가장 예쁜 나이.
하지만 공선옥의 소설 '내가 가장 예뻤을 때'처럼 나의 스무 살도 마냥 예쁘고 순수하고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실연의 씁쓸함을 곱씹으며 요란한 방황을 하는 중에도 나는 사람들을 만나 몰래 세미나를 하며 소위 '불온서적'들을 읽었고, 고작 한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의젓하고 존경스럽게만 느껴지던 선배는 수배 중에 체포되어 감옥에 갔고, 매운 최루탄 연기와 독한 소주에 찌들어 버린 우리는 맘껏 웃기보다는 자주 소리 죽여 울었다.
지금은 까마득한 옛날로만 느껴지는 1980년대, 정치 사회적 격랑의 시기, 그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너무나 불행했고
나는 너무나 안절부절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중에서
고백하자면, 나는 얼마 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삶은 어제에 있는 것도 내일에 있는 것도 아닌, 바로 오늘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과거에 억매이고 미래에 저당 잡혀서는 언제나 온전히 살지 못하리라는 진실을.
바로, 지금, 여기서 살아라!
하지만 내가 가장 예뻤던 스무 살 그때, 나는 소설 속의 '수선화회' 회원들처럼 어지러이 방황하고, 이리저리 부딪히고, 여기저기 상처받느라 내가 예쁜 줄도 몰랐다.
아니, 예쁘면 안 되는 줄로 알았다.
학교에 갈 때면 화장기 하나 없는 민낯에 귀걸이를 빼내어 가방에 넣고 낡은 청바지에 운동화만 끌고 다녔다.
그래도 자꾸 미안하고 괴로웠다.
나보다 더 아프고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조차도 사치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수인 해금이, 미혼모 승희,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한 정신이, 노동판에서 잔뼈가 굵어 가는 만영이, 뒷골목을 배회하는 진만이, 고문을 당하고 강제 입영 당했다가 결국 의문사한 승규의 이야기를 읽으며 문득문득 책장을 덮고 한참을 쓰라리게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숱한 슬픔과 아픔 속에서도 '우리는…… 아직 좀 더 흔들려도 좋을 때잖아.'라고 말하던 용감하고 순수했던 그들.
그래도 그때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래서 쓰러지거나 물러설 수 없었다.
다시금 소설 속의 한마디에 위로받는다.
“희망을 가져라. 무슨 희망이냐면…… 빛은 어둠 속에서 나온다는 거, 아름다움은 슬픔에서 나온다는 거, 모든 행복은 고통 뒤에 온다는 거. 진짜 빛이 있고 진짜 아름다움이 있고 진짜 행복이 있다면 말이야.”
비록 어리고 어리석고 어설펐을지언정, 우리의 스무 살은 일생을 통틀어 가장 예쁘고 눈부셨다.
그처럼 세상에는 때때로 슬프고 아파서 더욱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출처 : 인터넷 좋은생각 사람들 김별아 님
아침 이슬, 양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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