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레

희야, 이승철(부활) y 수리남의 박권현 씨

부에노(조운엽) 2016. 4. 13. 07:53

 

 

박권현 씨 부부

 

 

26년째 남미 대서양서 새우잡이

 


국토의 80%가 열대우림으로 이뤄진 남미 아마존 강 상류의 수리남.
거대한 보아 뱀이 도로를 기어 다니는 이 나라에 26년째 거주해온 박권현(55) 씨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조용하고 느긋하게 자연과 섞여 사는 나라'라며 '여전히 한국 꿈을 많이 꾸지만, 이제는 수리남이 고향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경남 창원 출신의 박씨는 어려운 여건 속에 부산의 야간 실업고를 다니며 낮에는 선박수리업체와 조선소에서 관련 기술을 배웠다.

고교졸업 후 선박 정비업에 종사하던 그는 '대서양의 새우 어업기지인 수리남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지인의 소개로 1985년 마린 기업이라는 원양어업 회사에 입사해 먼 길을 떠났다.

수리남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69년 한국 선박 5척이 수리남에 처음으로 진출해 조업한 이래, 많을 때는 태극기를 단 한국어선 120여 척이 동시에 새우를 잡아 올렸다고 한다.
박씨는 '도착해보니 한국 어촌에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한국인 선원이 많았다'며 '한국인뿐만 아니라 인도인과 유럽인, 흑인 등 전 세계 선원들이 한데 섞여 작업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회상했다.
한국인 선원이 최대 700명 정도 수리남에 머물다 보니 그 시절에도 한국식당과 식료품점이 있어서 한국 음식 맛은 잊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박씨는 수리남에 도착한 이듬해인 1986년 아내와 아들, 딸을 모두 불러들여 수도 파라마리보의 2층 목조 집에 살림을 차렸다.
가족들은 수리남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지만, 한국에서 형편이 어려웠던지라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군말 없이 가장 곁으로 왔다.

그의 아내는 수리남에 도착하자마자 남편 동료의 식사를 챙기고 입출항을 도우며 밤낮없이 일하다가 허리 디스크에 걸려 몸을 못 가누는 처지에 놓였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아내가 앞으로 무리하면 안 되기에 박씨 혼자 벌어서 생활할 수 있는 수리남에 영구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특히 수리남은 네덜란드어를 공식 언어로 쓰면서 '스라낭 통고'라는 현지어와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등 11개 언어를 섞어서 사용하는 곳이라 아이들 교육에 유리하겠다는 판단이 결심을 굳혔다.
3년 계약으로 수리남에 발을 들여놨던 박씨는 동희산업으로 소속을 옮겨 지금까지 새우잡이 한국 선박들을 관리하고 있다.

 

 

 


네덜란드 식민지였다가 1975년 독립한 수리남의 영토는 한반도 면적의 4분의 3 크기지만 인구는 50만 명에 불과하며 인도계가 37%, 백인과 흑인 혼혈인 크레올 31%, 인도네시아 자바인이 15%를 차지한다.
숲 속에 도심이 위치해 집 앞마당에는 망고, 파파야, 체리, 바나나 등 열대과일 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고, 꽃나무 사이로 이구아나가 기어 다니며 도심 수로에서 낚시질해서 잡은 물고기를 그대로 요리해 먹을 수 있는 곳이다.

박씨 가족이 처음 정착하던 1980년대는 수리남이 독립한지 얼마 안 돼 쿠데타가 일어나 휴지, 비누 같은 생필품을 배급받아 쓰기도 했지만 큰 혼란은 없었고, 유럽, 아프리카, 인도, 인도네시아의 풍습이 섞여 문화적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박씨는 '수리남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곳인데 최근 들어 유전과 광물자원을 개발하고 벌목한다고 마구잡이로 파헤쳐 훼손이 심각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유가가 계속 오르면서 한국 선박들도 많이 떠나 지금은 15척밖에 남지 않았고 선원도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 베트남인들로 대체돼 한국 교민은 60여 명에 불과하다.

 

 

 

Miss Suriname

 


한인회장을 맡은 박씨는 '산업역군으로 수리남에서 조업하다 돌아가신 한인 선원 서른두 분의 묘가 있는데 연고자가 없어 언제 이장될지 모른다'며 '한국의 원양산업협회 도움을 받아 봉안묘를 설치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알루미늄을 비롯한 지하자원이 풍부한 곳이라 한국기업들이 눈여겨보고 적극적으로 진출했으면 한다'며 '특히 수리남에서 자란 한인 2세들이 양국의 가교역할을 하도록 잘 자라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김태원이 부활 사운드의 핵이라면 그 사운드를 더 찬란하게 하는 것은 이승철의 보컬이다.

‘희야’는 이승철을 위한 곡이었다.

이승철의 미성은 록보컬로서는 단점이 될 수 있었지만 이러한 곡들로 인해 오히려 최고의 서정성으로 팬들에게 어필한다.

향후 조용필의 후계자로 지목 받을 만큼 가요계의 거목으로 성장한 이승철이지만 김태원의 식견이 아니었더라면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 록의 황금기에 태어나 최고의 대중적 지지를 얻었던 부활.

이들은 록과 정반대에 서있던 소녀 팬들까지 록의 영역으로 초대했고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라이브를 꽃피우게 했다.

그리고 20년이 넘은 지금까지 지치지 않는 활동으로 대한민국 록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희야, 부활

 

희야 날 좀 바라봐 너는 나를 좋아했잖아
너는 비록 싫다고 말해도 나는 너의 마음 알아

사랑한다 말하고 떠나면 나의 마음 아파할까봐
뒤돌아 울며 싫다고 말하는 너의 모습 너무나 슬퍼
빗속을 울며 말없이 떠나던 너의 모습 너무나 슬퍼

하얀 얼굴에 젖은 식어가는 너의 모습이
밤마다 꿈속에 남아 아직도 널 그리네

희야 날 좀 바라봐 오 희야 오 날 좀 봐
오 희야 희야 오 희야 오 희야

오 나의 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