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이야기

전원주의 꿈

부에노(조운엽) 2010. 4. 25. 11:12

 

 

 

 

 

전원주의 꿈

 

 

전원주 씨의 아가씨 때 꿈은 시집 잘 가서 현모양처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프로포즈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 흔한 중매자리도 안 들어왔다.

그래서 그 당시 횡횡했던 인신매매단에라도 끌려갔으면 하는 막연한 바램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전원주 씨에게 닥쳤다.

길을 가다가 인신매매단으로 보이는 일단의 험악한 사람들에게 강제로 차에 실려졌다.

드디어 바라던 꿈이 이루어지나 하고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

 

 

 

 

전원주 씨를 본 두목으로 보이는 사람이 '야, 너 내려.' 하는 것이었다.

안 내리려고 인상을 쓰면서 차에 탁 버티고 있었더니, 두목이 하는 말...

"얘들아, 차 버리고 가자."

 

이에 격분한 전원주 씨는 그녀만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특출한 미모(?)를 무기로 성우와 탈랜트에 도전해서 와신상담하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

 

 

나의 삶, 전원주

 

 

연예계도 엄청나게 경쟁이 치열하다.
방송국에 연예인만 1,600여 명이 있고, 그 중의 대다수가 무명이다.
다 아시겠지만 무명시절은 기약도 없고 항상 배가 고프다.
그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연출자들에게 얼굴 도장 찍는 일이다.
그래서 일이 있으나 없으나 매일같이 연출자들에게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이려고 왔다갔다 한다.
무슨 일이든지 '많이 뛰고 만나서 얼굴 도장 찍는 것'이 기본이다.

내가 키가 이렇게 작은 게 어릴 때 못 먹고 일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
5학년 때부터 제일 많이 한 일이 물지게를 지고 식수를 길어 나르는 일이었다.
인천에 살 때였는데 그 곳은 짠물이 많이 나서 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 무거운 물지게가 나를 짓눌러서 이렇게 키가 안 자란 것 같다.
어린 나이에 밥도 짓고 무지무지하게 힘든 나날이었는데, 그 때 어머니가 우리를 강하게 교육시키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역시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계모'라고 믿었을 만큼 어머니에게 많이 혼나고 얻어맞고 자랐는데, 그 땐 울면 더 맞았고 만약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그 날은 완전히 죽는 날이었다.

여러분도 자녀를 키울 때 강하게 키워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 나약하고 자신의 실수 등에 대해 변명하는 사람은 절대 출세 못한다.
산에 가서 잡초를 뽑을 때도 뿌리 채 쉽게 뽑히지 않는다.
그만큼 혹독한 환경에서 악착같이 컸기 때문이다.
반대로 온실에서 자란 화초를 생각해보라.
살짝만 힘을 줘도 금방 뽑히지 않는가?
우리도 잡초처럼 살아야 하고 자녀도 그렇게 키워야 한다.

 

 

전원주 씨 결혼사진 

 


내가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가정부 역만 20년을 했다.
주인 마님만 강부자, 여운계, 사미자 등 수도 없이 바뀌어도 나는 영원한 가정부였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숙명여대 출신이라고 하면 무척 놀라고, 이렇게 작은 전원주도 운전하고 다닌다고 하면 더 놀란다.

한 번은 운전을 하고 가는데 경찰이 사람 없는 차가 혼자 굴러가는 줄 알고 뒤쫓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 일이 내겐 엄청난 컴플렉스와 스트레스였고, 나는 '연예계 생활의 첫 단추를 한 번 잘못 꿰어서 계속 그런 이미지만 갖고 산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처음에는 교편을 잡았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잘못한 일이 있어서, 훈육선생이 학생들 한 명씩 뺨을 때리는데, 옆에 있던 나도 키가 작으니 학생인 줄 알고 뺨을 가차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쓰러진 채로 결심을 했다.
"이건 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학교를 퇴직했다.

뭘 할까 하다가 바로 그 당시 동아방송에서 공모했던 성우 모집에 응했다.
하나님은 정말로 공평하셔서 나는 목소리 하나는 타고 났었다.
프로그램을 맡아서 방송을 하는데 목소리가 너무 고와서 꽤 인기가 있었다.
내 목소리만 듣다가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방송국에 와서 내 얼굴 보고 졸도한 남자 여럿 있었다.

114 안내양들이 겪었던 애환을 나도 수없이 겪었다.

내가 TV 방송에 출연할 때 얘기를 하겠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연예계는 엄청나게 치열하다.
대사를 다 외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잊어 먹지 않도록 암기연습도 죽도록 하고, 연습 시간을 확보하려면 시간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그래도 떨면 대사를 까먹기 마련이라 배포까지 키워야 한다.
그래야 캐스팅이 잘 된다.

우리는 녹화에 3번 지각하면 쫓겨나고, 같은 장면 NG 3번 내면 다음부터는 안 써준다.
내가 무당 역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대사 중에 가장 힘든 것이 귀신 이름을 7가지 외우는 것이었다.
일주일 내내 연습했는데 연기 도중에 예상치 않았던 꽹과리 소리가 요란히 울리는 바람에 그만 까먹고 말았다.
그 때부터 연출자들 사이에 '전원주는 새대가리'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은 진짜 무서운 것이다.

한나절에 무려 30명에게 전파 되더라.

김을동 씨는 잠이 많아서 지각을 하는 바람에 배역을 못 받은 적도 있었고, 김성환씨는 극중 대감 이름 7명을 줄줄이 읊어야 했는데, 그걸 컨닝을 하려는 요령을 피우려다 누군가가 컨닝용으로 대감들 이름을 적어놓은 부분을 지우는 바람에 막상 그 대목에서 너무 당황하여 '최불암 대감, 박근형 대감...' 등으로 실제 인물의 이름을 말하는 바람에 6개월 간 배역을 못 받은 적도 있었다.
그 때부터 전원주는 가정부, 김성환은 도둑, 운 좋으면 포졸로 이미지가 굳어버렸다.

밑바닥 생활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마님 역할은 비스듬히 누워서 '밥상 들이거라.' 하는 말 한 가지면 끝나지만 가정부 역은 밥상 들고 방문을 10번 이상 들락 날락 거리고, 상이 바닥에 소리 안 나게 놓아야 하는 등, 제법 힘든 노동이다.
게다가 애까지 업은 채로 밥상을 나르는 역이 있는 날이면 정말 중노동이었다.

그러고도 집에 오면 그 장면 하나라도 보려고 TV를 켜면 안 나올 때가 부지기수였다.
편집된 것이다.
우리들은 방송에서 편집되면 그나마 한 푼 출연료조차 없는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결혼해서 애를 키우면서까지도 나는 어머니께 종종 얻어맞았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TV 에 안 나오거나 나와도 가정부에다 그나마 1, 2초면 사라진다.' 등등 어머니 부아를 돋구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랬다.
"이 년아 어째 너 하나가 이리 속을 썩이냐. 너만 잘 풀리면 원이 없겠다."

그러나 나는 돈 한푼 없었어도 매일같이 방송국에 출근했다.
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김성환 씨하고 함께 방송국에 들르는 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저기 봐. 식모하고 도둑놈하고 또 왔네." 하고...

아들놈이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다.
아들놈이 보고 싶고 축하해주고 싶어서 학교에 갔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기에 집에 왔더니 벌써 와 있는 것이었다.
그 때 아들 녀석이 한 말,
"엄마는 뭐 하러 학교에 와 가지고 망신을 시키고 그래..."
나는 묻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애들이 나를 보고 '식모 왔다!'라고 놀렸을 게 분명했다.
그 때 나는 정말로 탤런트 생활을 때려치울까 밤을 새워가며 고민했었다.

처음에 산에 오르기로 해도 출발하기가 망설여진다.
그 때 과감하게 일어나서 출발하는 것이다.
한참 오르다 보면 힘도 들고 땀도 난다.
그 때 이 정도만 하고 그만할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정상의 맛을 영원히 못 본다.
끝까지 올라가면 모든 것이 발 아래 있는 법이다.
정상의 맛은 아무나 느끼지 못한다.
참고 꾸준히 목표만 바라보고 인내를 거듭할 때 기회가 오는 것이다.

먹고 살기도 힘들어서 시장을 봐도 미아리 시장 밤 8시 정도 장이 파장할 때 가곤 했다.
그 때 가면 팔다 남은 야채 등을 헐값에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시장 어디에선가 장사하는 아주머니 한 명이 시장이 떠나갈 듯 유쾌한 웃음을 웃어 대는 것이었다.
그 웃음을 듣는 순간 나는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웃고 살자.'라고 굳게 결심했다.

그 다음부터 나는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집에서 거울을 앞에 놓고 웃는 연습을 했다. 아들이 '엄마 왜 그래, 웃지마 귀신 나올 거 같아.' 할 정도로 미친 듯이 웃어 제꼈던 것 같다.
그랬더니 10일만에 웃음 소리가 시원하게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방송국에 들른 나는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연출자들한테 약이나 올려 주자".
연출자 대기실에 연출자들이 20명 정도 모일 때를 기다려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가서 갑작스럽게 '와하하하~~~' 하고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어 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나오면서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가 이 나이에 이런 짓까지 해서 먹고 살아야 하다니'라는 생각 때문에...

그랬는데 어느 날 새 드라마를 촬영하는데 조연 중에 한 명으로 내가 발탁되었다.
시골의 순박한 아주머니 역할이었는데, 시골 아줌마들은 통상적으로 목소리도 크고, 웃음도 잘 웃어야 하는데, 연출자들이 혼비백산하도록 웃어제꼈던 그 날의 내 행동이 인상깊게 남아있었는지 '드라마 성격에 전원주 웃음소리가 딱이다.'라는 의견이 나왔던 것이었다.
그 드라마가 바로 그 유명한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였고 장장 7년 6개월을 장수한 대히트 드라마였다.
거기에서 드디어 나는 떴던 것이었다.
그만큼 방송국에서의 경쟁은 엄청나게 치열한 것이었고 나도 혼신의 힘으로 경쟁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랜 고생 끝에 인기인이 되었다.
CF도 줄줄이 찍었고, 20년을 참고 뜬 태양은 지지도 않더라.
지금 난 일년치 스케줄이 새카맣다.
오늘만 해도 네 군데 일정이 있다.

강연 2번, 녹화 2번.

일이 많으면 피곤하지도 않고 일이 없을 때 힘들고 피곤한 법이다.
노력하는 사람은 작아도 커 보인다.
얼굴이 예뻐도 행동이 미우면 박색이고, 얼굴이 미워도 하는 짓이 예쁘면 아름답게 보인다.

난 꿈이 또 있다.

가수가 되어 음반을 내는 것이다.
지금 댄스 가수들이 나를 보고 '후배'님이라고 웃으며 얘기한다.
내 나이 70세지만 80세까지는 끄떡없이 뛸 자신이 있다.
여러분도 오로지 앞만 보고 열심히 뛰기 바란다.


 

  

 아! 옛날이여, 이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