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별아 님
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
오래 전 이야기다.
소설가 이경자 선생에게서 중국 루그 호수 근처에 사는 모소족이라는 낯선 소수민족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이.
선생은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곳이 바로 모계사회였어. 중국어로 여아국, 어머니가 다스리는 나라!”
모소족 모계사회의 질서와 규율을 요약하자면 다음 같다고 했다.
어머니로부터 떠나지 않는다.
여자와 남자는 사랑하되 함께 살지 않는다.
자식은 어머니가 기른다.
그리하여 그곳에는 아버지가 없고, 남편이 없고, 아내가 없고, 시어머니가 없지만,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여자와, 따뜻하고 부드러운 남자와, 영원히 연인인 남자와 여자가 산다고 했다.
오래 전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했던가?
그것 참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꿈같은 일이라고, 아마도 피식 웃어 버렸던 것 같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다시 흘러, 마침내 현실 속에서 '어머니의 나라'를 실현해 가는 이경자 선생의 '딸아, 너는 절반의 실패도 하지 마라'를 읽는다.
개인적으로 아는 작가의 글을 읽는 건 즐겁고도 괴로운 일이다.
행간에서 물씬 풍기는 그만의 향기를 마음껏 즐기면서도, 씩씩하고 강한 외양에서 낌새챌 수 없었던 그만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읽으며 짠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의 28년은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28년은 완고한 남편 밑에서 살다가, 56세로 이혼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결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작가.
보수적인 집안의 장남과 결혼해 두 딸을 연이어 낳고서야, 아들을 간절히 바라는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나 평생을 주눅 든 채 살아온 어머니가 당신의 딸들에게 퍼부었던 모욕과 학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작가.
그의 진솔하고도 통렬한 고백 앞에서 무슨 말을 더 보태고 뺄 것인가?
“사람은 남을 사랑하기 전에 자신부터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자기를 사랑하고 아낄 때 그런 사람으로 변화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자신을 맞추면 자칫 자기를 놓칠 수 있다. 사랑이 끝났을 때 황폐해지는 사람은 이렇듯 내가 나를 놓았기 때문이다.”
“음식은 가장 높은 열에서 끓지만 끓을 때 익지 않는다. 끓고 나서 약한 불로 뜸을 들일 때 익는다. 과일은 한여름 무더위에 몸통을 키우지만 맛을 내지는 못한다. 이끼에 수분이 줄어들고 땅이 입을 다물어 더 이상 물을 삼키지 않는 건조한 가을볕에 빛깔이 짙어지고 맛이 든다.”
이 책은 제목대로 작가가 딸에게 주는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십 년 전, 가부장 사회라는 '익숙한 지옥'과 모계사회라는 '낯선 천국' 사이에서 혼돈에 휩싸였던 작가는 이제 가을볕에 숙성된 과일처럼 달큼하면서도 서늘한 삶의 모습을 보여 준다.
딸들에게만은 '넌 여자가 왜 그래?, 넌 여자답지가 않아!'란 말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남성중심주의 사회에 맞서 뜨거운 한여름을 보낸 엄마가, 이제는 가을처럼 무르익어 딸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가진 다양한 차이를 아름답게 보는 의연함, 유연성, 대범함과 그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지닌 사람으로 자라나길 소망한다.
자신의 상처와 실패를 거울로 삼아 딸들에게 '성공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닌, 행복해져서 비로소 성공하는' 삶을 주문하는 것이다.
나는 딸을 가져 보지 못했지만 누군가의 딸이자 수많은 딸들의 친구로서 작가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모소족 여자들이 남자를 평가하는 기준은 돈이나 외모나 지위나 학벌이 아니라, 부지런하고 따뜻하고 화를 내지 않으며 잘 웃는 사람이란다.
어머니의 나라에서 가장 높은 가치는 억센 힘이 아니라 다정한 웃음이라는 것이다.
그처럼 가난하지만 비참해 보이지 않고, 우울증이나 도둑 따위가 아예 없는 평화로운 사회가 이 세상 어느 귀퉁이에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단다.
정말?
정말! 그 이야기를 믿고 싶다.
내처 믿어 보기로 한다.
그곳에서라면 누구라도 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을 것이다.
죽도록 행복해도 괜찮을 것이다.
글 김별아 님
사랑이 올까요, 백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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