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에서도 성공한 가수 이장희
공부가 지겹던 학생 시절 한밤에 라디오를 틀면 늘 그가 거기 있었다.
'In the year of 2525'라는 시그널 음악으로 시작되던 그 프로그램을 잊을 수 없다.
그 프로그램은 1973년 새해 첫날부터 창신국민학교 선배인 이장희 씨가 맡기 시작한 '0시의 다이얼'이다.
이장희는 이 해 '그건 너'를 발표하여 당시 가요계를 휩쓴다.
'모두들 잠들은 고요한 이 밤에 어이해 나 홀로 잠 못 이루나'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이장희가 당시 사랑에 빠졌던 이화여대 불문과 학생에게 바치는 곡이었다.
'그건 너 때문'이라고 외치던 이 노래는 나중에 금지곡이 되는데 그 이유는 남에게 책임을 왜 전가시키느냐는 것이었다.
조영남, 그는 이장희의 삼촌 친구였다. 당시 서울중학교 2학년이었던 이장희는 집에 놀러온 키 작은 고등학생이 툇마루에 앉아 기타를 치는 걸 보고 '졸도할 것 같았다'고 말한다. 팝송을 부르며 기타를 치는 조영남의 모습은, 어린 이장희의 눈에는 충격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이 운명의 만남은 이장희를 가수의 길로 들어서게 한 계기였다. 그러나 조영남은 이장희를 음치라고 놀린다. 그의 노래는 음악성보다 분위기나 어떤 기분으로 들어야 맛이 난다. 그는 어쩌면 노래 부르는 가수 기질보다 중얼거리는 음유시인의 기색을 지녔다.
이장희가 서울고, 연세대라는 학력을 내밀 수 있게 된 건, 성실한 학구열 덕분이 아니라 네 살 때 천자문을 배웠다는 그의 천재성 때문이라고 봐야 하리라. 그는 중3때 그리고 고3때 벼락공부를 했던 기억을 얘기한다.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은 아들에 대해 한숨을 내쉬는 어머니를 보고는, 오기가 생겨서 한 달 만에 해치운 '공부'가 그를 고등학교에, 그리고 대학에 입학시켰다. 그렇지만 취미와는 상관없이 입학한 생물학과가 그에게 재미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그는 고교 시절 싸움에 휘말려들어 왼쪽 눈의 망막이 망가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날마다 현미경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대신 그는 해리 벨라폰테와 행크 윌리엄스의 노래에 미쳐 있었다. 이 무렵 그는 음악다방 '쎄시봉'에 출입한다. 거기엔 당시 홍대생인 명사회자 이상벽이 있었다. 쎄시봉에 출입하는 당시 멤버들은 화려했다. 신중현, 송창식, 서유석, 김민기, 김세환, 김도향, 조영남... 이장희는 거기서 그들과 놀았다.
"노래가 이상하잖아." 이장희가 밤무대에 데뷔할 무렵, 업소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노래 부르는 스타일이 좀 낯설었던 까닭이리라. 그리고 그 한 마디는 '불합격'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때 김세환과 윤형주, 그리고 송창식이 업소 주인에게 호소를 한다. 인기 DJ 이종환의 권유로 처음 앨범을 냈던 건 1971년이었다. '겨울 이야기'란 타이틀의 앨범에는 2년 동안 스스로 작사 작곡한 노래가 실려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노래들이 저절로 '발'을 달고 가슴과 머리에서 걸어나왔단다. 당시 인기가 높았던 트윈폴리오의 히트곡들은 대부분 번안가요였었다. 이장희의 자작곡들이 가요계에 주목을 끌게 된 건 2집 '그애와 나랑은'을 냈을 때인 1972년이었다.
가수로, DJ로, 명성을 쌓아가던 이장희는 1974년에 결혼을 한다. 아내는 방직회사 사장의 딸이었다. 그런데 신혼의 단꿈을 깨기도 전에 두 차례의 된서리를 맞는다. 1975년이었다. 그해 여름 정부는 가요 정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히트하고 있던 노래들을 대대적으로 '금지곡 목록'에 올렸다. 그의 노래 '그건 너', '한잔의 추억', '불 꺼진 창' 등이 모두 그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졸지에 그는 '입'이 봉해진 가수가 되어 버렸다. 그해 겨울엔 더 큰 시련이 닥쳐왔다. 인기 연예인 80여 명이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었다. 그는 윤형주, 이종용 등과 함께 겨울 감방 속으로 들어갔다. 연행된지 20여 일 만에 그는 풀려났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1976년에 그는 종로구 서린동에 반도패션 종로지점을 운영한다. 판매원 숫자가 20여 명을 헤아릴 만큼 큰 매장이었다. 한 동안 사업에 열을 올렸으나, 일이 잘 풀리니, 다시 가수 생활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작곡과 음반제작을 시작한다. 1978년에 그의 손에서 록그룹 '사랑과 평화'가 탄생한다. 김수철, 김현식도 그가 발굴한 가수였다. 이런 '남모르는' 성공을 거두고 있을 무렵, 옷장사는 그의 관심에서 뒷전으로 밀려난다. 1980년에 제주도와 마라도에 갔다가 거기서 사업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거기 땅을 사서 무공해 채소를 키워 서울의 부자들에게 직접 팔겠다는 야심이었다. 일단 성산포 앞의 농토를 조금 사놓고 공항으로 갔는데, 비행기가 뜨지 않았다. 그해 광주에서 피의 진압이 시작된 때였다.
작가 최인호와 가수 이장희는 인연이 많다. 이장희의 중, 고, 대학 동창인 라디오 코리아 사장 최영호 씨의 형이 바로 최인호다. 게다가 그는 이장희의 고등학교 2년 선배였다. 영화 '별들의 고향'은 원작 소설의 작가인 최인호를 세상에 떠오르게 했는데, 이때 이장희의 영화주제곡들도 함께 떠올랐다. '별들의 고향' 앨범은 대히트를 했다.
이장희는 80년 가을 캐나다에 갈 일이 생겼다.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태평양가요제에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수 김태화와 작곡가 김도향, 그리고 음반제작자인 이장희가 함께 갔다. 셋은 내친 김에 미국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런데 거기서 최인호를 만난 것이다. 최인호와 이장희는 거기서 미국 대장정을 하기로 의기투합한다. 이장희가 중고차를 사고, 최인호는 가스 값을 대기로 한다. LA를 출발, 캘리포니아주를 지나, 애리조나주의 그랜드 캐년, 유타주의 브라이스 캐년, 모뉴먼트 밸리, 그리고 세인트 조지, 허리케인, 네바다, 라스베거스로 내달렸다. 광막한 미국 서부가 두 사람의 가슴 속에 거대한 에너지로 달려들었다. 그 여행 이후 이장희는 미국에 살 결심을 굳혔고, 최인호는 그 감동을 익히고 다듬어 단편 소설 '깊고 푸른 밤'을 썼다. 이 작품은 1982년 이상 문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배창호 감독은 1985년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크게 히트시켰다.
뒤늦게 소설을 읽은 이장희는 최인호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소설 속에는 한국에서 대마초 파동에 휘말렸다가 미국 여행길에 오른 가수가 나온다. 물론 그가 이장희다. 그런데 이장희가 화가 난 건, 자신이 형편없는 인생 실패자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최인호의 말. "임마, 악당이라도 내 소설의 주인공이 됐으면 영광이지 뭘 그래?" 농담 섞인 핀잔에도 이장희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최인호는 슬며시 사과를 했다고 한다. 라디오코리아는 그래서 탄생한다. 이 작은 방송국에 대한 교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1992년 LA폭동 때 라디오코리아는 상황실, 대피소, 자위대 본부 구실을 하기도 했으며 부시 전 대통령과 교민대표의 협상 장소로도 쓰였다. 이장희는 이 업체 외에도 스포츠 서울 USA와 옐로페이지 사업을 하는 인포코리아를 갖고 있다. 이제 이장희는 LA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더 유명해졌다. 그가 한국에 오면 조영남, 김민기,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조동진, 이상벽, 최인호가 모두 모인다. 수십 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방랑기 많고 감상적이고 자유롭다.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을 닦고 종종 우울함에 빠지는, 만년 소년이다. 조영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이 가수에 대한 추억 긷기를 마칠까 한다.
"한번은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 윤여정, 최영희 패거리들과 함께 시인 김남조 선생 댁에 저녁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바로 그날 이장희가 우리 모두를 자지러지게 만들었어요. 김남조 시인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그 친구가 선생의 장시 한 편을 좔좔좔 읊어나간 거에요. 우리 모두는 할 말을 잃었지요."
글 이빈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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