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지만 한편으로 짠한 은하 씨 이야기
동시대를 살아온 가수 이은하.
학교 가는 것이 별로 재미있지 않았던 시절에 라디오는 아주 좋은 친구였다.
밤을 지새우며 듣던 음악 프로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았지만, TV에 종종 나왔던 그녀를 보면 무척 반가웠다.
동갑인 줄 알았던 그녀의 이야기가 보여서 퍼왔다.
가수 이은하는 올해 만 50세다.
그녀가 펑키 디스코 '밤차'를 부르며 사방으로 손가락을 찌르던 게 34년 전인 1977년 일이니, 뜻밖에 나이가 적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만 12세에 음반을 내고 데뷔했으며 그때 나이를 세 살 부풀렸었다.
다시 말해 '밤차'를 불렀을 때 그녀는 고작 16세였다.
그녀는 '나이가 어린데다가 발육 상태도 좋지 않아 가슴에 뭔가 넣고 노래를 불렀으며, 한참 춤추고 노래하다 보면 가슴이 등 뒤로 돌아가 있었다.'고 말했다.
70년대 중반부터 약 15년간, 그녀는 이 나라 대중음악의 스타였다.
어머니가 '하나의 별이 아니라 별 무리가 돼라.'며 본명 이효순 대신 지어준 이름 '은하'처럼, 그녀는 수많은 히트곡을 냈다.
그리고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빠르게 잊어버렸다.
그녀는 국민학교 6학년이던 1973년 '임마중'이 실린 첫 음반을 냈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 TBC 가요대상 신인가수 후보에 올랐다.
신인가수 후보에 오르면 주민등록등본을 떼서 내야 했는데 당시 만 16세였던 사촌 언니 등본을 일단 내고 다음 해인가, 겁이 나서 정식으로 호적상 나이를 1958년생으로 바꿨다.
그때 '58년 무술년 개띠' 하고 외우고 다녔다.
사실 1961년생이지만 말이다.
이은하는 2007년 다시 법원에서 생년월일 정정 허락을 받아 본래 나이를 되찾았다.
이때 이름도 본명 '이효순' 대신 '이은하'로 바꿨다.
가수 데뷔하느라고 속였던 나이는 되찾았지만, 스타가 되기 위해 택했던 예명은 지켰다.
데뷔 34년 만에 비로소 공식적인 '이은하'가 된 것이다.
"아버지가 아코디언 연주자셨어요. '새나라쇼'라고, 악극단이라고 해야 하나, 전국을 다니며 공연하는 팀에 계셨죠. 이미자 선생님 반주도 할 만큼 실력 있는 분이었어요. 아버지가 지방 공연을 데리고 다니면서 '베이비 쇼'라고, 꼬맹이에게 노래시키는 걸 하셨어요. 하춘화 선배님도 '베이비 쇼' 출신이에요. 그래서 얼마 전에 '데뷔 50주년'을 한 거죠. 제가 어렸을 때 노래를 잘 했던 모양이에요."
그러나 이은하는 서울 홍릉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 ‘베이비 쇼’를 그만두게 된다.
어머니가 ‘애까지 딴따라 시킬 셈이냐.’며 아버지를 말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은하의 아버지는 ‘베이비 쇼’를 그만두지 않았다.
“우리 집이 청량리 133번지 한길가였어요. 학교 갔다 오면 아버지가 길가에 저를 세워놓고 통기타 반주에 맞춰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를 부르게 했어요. 꼬맹이가 얼마나 지겹겠어요. 노래 부르다가 꾸벅꾸벅 졸면 기타로 냅다 머리통을 갈겼죠. 그러다가 기타가 부서지면 또 사오고…. 그걸 보다 못한 동네 어른이 ‘애 그만 괴롭히고 가능성 있으면 시키고 아니면 때려치우라.’고 해서 오아시스 레코드를 찾아간 거에요. 아버지는 저를 이미자 선생님처럼 키우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그때 음반을 내준 작곡가 김준규 선생님께서 그랬어요. ‘얘는 이미자가 아니라 제2의 김추자.’라고요. 그때부터 김추자 선배님 노래를 부르면서 연습을 했어요.”
열두 살에 부른 ‘임마중’을 들어보면 전혀 초등학생 같지 않던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변성기가 일찍 왔나 봐요. 그렇지만 ‘허스키하다’는 얘기를 들은 건 1976년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부터에요. 그때 작곡가 원희명 선생님께서 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 노래를 시켰어요. 이 노래가 두 옥타브 올라가는 ‘하이 C’ 노래에요. 나중에는 목이 너무 아파서 침도 못 삼킬 정도가 됐어요. 제가 ‘저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하니까 선생님께서 ‘한 번만 더 불러보자.’고 했죠. 그때 부른 게 음반에 실린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에요. ‘꺼이꺼이’ 할 정도로 목이 쉬어 있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제가 열다섯 살이어서 감정을 못 잡으니까 그 선생님께서 머리를 쓴 거에요. 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목을 고생시킨 거죠.”
국민학교 6학년 때 데뷔했으면 학교는 어떻게 다녔을까.
“그때 1974년 선화예중이 개교했어요. 그 학교 실기시험에서 가곡 ‘보리밭’을 불러 합격했는데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대중가수가 되겠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사실 학교에 다닐 수 없었어요. 지금도 선화예중을 보면 한이 남아 있죠.”
이력을 보면 ‘경남여고 졸’이라고 돼 있던데….
“그게 사실은 답십리에 있던 전수학교에요. 사람들은 제가 부산에 있는 경남여고를 나온 걸로 아는데, 서울의 ‘경남여상’이라는 학교였어요. 무늬만 그 학교 나온 걸로 해놓고, 학비만 내고 영어, 수학을 집에서 과외로 배웠어요. 지난번에 나이 되찾을 때 졸업증명서 떼려고 알아보니 학교가 없어졌더라고요. 그리고 나이를 세 살 높였기 때문에 중학교 과정이 날아가 버리기도 했어요.”
부모님은 건강하신지….
“예. 신당동에 사세요. 어머니가 77세, 아버지가 74세. 우리 집엔 여태껏 경사가 딱 두 번 있었어요. 엄마 칠순잔치, 아빠 칠순잔치. 자식이 저하고 남동생(45) 둘뿐인데 둘 다 결혼도 안 하고 애도 낳은 적 없으니 잔치를 치를 일이 없었죠. 결혼을 안 한 건 하고 싶은데 없어요, 남자친구가. 너무 어려서 가수가 돼서 사회생활을 잘못했어요. 그리고 남자들이 저를 좀 ‘센 여자’로 봐요. 뒤에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그래서 저한테 결혼하자고 한 남자가 없었어요.”
그러나 이은하에게 청혼했던 남자가 있었다.
그는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기타리스트다.
이은하가 스물네 살이던 1985년, 그는 이은하의 아버지를 찾아가 ‘은하와 결혼하겠습니다.’라고 대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톱스타의 아버지는 이 청년의 순정에 재떨이를 휘둘러 내쫓았다.
이은하는 ‘내 운명이기도 하고, 그 사람과는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77년 ‘밤차’를 발표해서 대히트를 쳤는데, 그 안무는 누가 봐줬는지….
“그때 누가 안무를 해줘요. 화장도 제가 하고 옷도 제가 사 입고…. 그 춤도 제가 생각해 낸 거에요. 잘 보면 손가락이 아니라 ‘승리의 V’ 자를 여기저기 찌르는 거에요. 그 노래가 ‘멀리~ 기적이 우네.’ 하고 한참 뜸을 들이잖아요. 그게 어색해서 여기저기 찌른 거죠. 그런데 그해 가을에 존 트라볼타 주연의 ‘토요일 밤의 열기’가 개봉됐어요. 그 포스터 기억하세요? 존 트라볼타가 손가락으로 하늘로 찌르고 있죠. 저도 덩달아 ‘디스코의 여왕’이 됐어요.”
그리고 얼마 안 돼 혜은이의 ‘제3한강교’가 나왔다.
“혜은이 언니하고는 라이벌 관계가 유난했죠. 우리가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언니는 예쁜 가수, 저는 씩씩한 가수. 언니는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죠. 그래서 여자들한테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적었어요. 제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 없었어요.”
두 사람이 라이벌이 되면서 마음고생도 많이 했겠다.
“저는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TV 카메라가 클로즈업을 안 해주는 거에요. 만날 멀리서 찍는 풀샷이죠. 혜은이 언니는 나왔다 하면 클로즈업해서 얼굴을 보여주는데. 그런데 76년인가 내가 MBC에서 1등 하니까 비로소 얼굴을 가까이 비춰줬어요. 그때 눈물을 펑펑 쏟아서 화장 범벅이 되고…. 그 장면을 기억하시는 분이 많더라고요.”
두 사람은 외모뿐 아니라 음색과 창법도 다른데….
“분장실에 둘이 같이 있으면 PD들이 와서 혜은이 언니한테 그래요. ‘우리 혜은이, 밥은 먹었니?’ 그리고 저한테는 ‘이 자식, 또 처먹냐?’ 배고파서 김밥 한 줄 먹고 있는데 말이죠. PD들이 저한테는 만날 이 자식, 저 자식 했어요. 그런데 80년대 들어서 컬러 TV가 생기니까 제 얼굴을 제가 못 봐주겠더라고요. 그래서 17㎏ 뺐죠.”
당시 혜은이에 대한 매스컴의 편애는 신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79년 동아일보 ‘연예 수첩’에서 ‘이은하가 갖가지 괴상망측한 의상을 입고 나와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고 쓴 반면, 혜은이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보도했다.
그 뒤에 나온 게 김창완 씨가 프로듀싱한 음반인가?
“그렇죠. ‘사랑도 못해본 사람은’이 실린 앨범이죠. ‘가지 마오’를 비롯해서 산울림 노래도 여러 곡 불렀고요. 그 음반 어렵게 나왔어요. 제가 음악적으로 욕심이 있어서 김창완 씨에게 부탁했는데 8개월 만에 곡이 나왔어요. ‘이은하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곡이 잘 안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1984년 발매된 이 음반은 재킷 사진부터 이은하의 기존 이미지를 바꾼 작품으로 평가된다.
김창완은 당시 서라벌 레코드 문예부장으로 일하면서 ‘산울림’으로 활동하던 시절이다.
이 음반을 내고 이은하는 그 해 ‘못다 핀 꽃 한 송이’를 부른 김수철과 함께 남녀 가수왕 자리에 올랐다.
이은하는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에 따라 TBC가 없어질 때, 마지막 쇼에서 너무 울어 한동안 TV 출연을 못하기도 했다.
“그때 제가 첫 무대에 나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을 불렀는데, 객석을 보니까 강부자 선생님과 장미희 씨가 울고 있어요. 저도 괜히 눈물이 나서 노래하는 동안 계속 울었죠. 그리고 다음 날 KBS와 TBC 통폐합 기념 쇼에 출연하러 갔더니 담당 PD가 ‘야, 너는 그렇게 사태파악이 안 되냐? 그냥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로부터 몇 달간 그날 운 사람은 KBS에 못 나갔어요.”
이은하는 1986년 ‘미소를 띠며…’를 다시 히트시키지만, 그해 가을 정수라의 ‘난 너에게’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10대 가수에도 끼지 못하는 수모를 겪는다.
1989년 전영록과 함께 ‘돌이키지 마’가 담긴 음반을 냈으나 이미 이은하의 인기 그래프는 정점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89년이면 스물여덟 살이니까 한참 활동해야 할 때인데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그렇죠. 그리고 92년에 우리 아버지가 아주 확 말아 드셨어요. 집까지 전부 싹 날리셨어요. 사기꾼들이 아버지를 건설 관련 회사 바지사장으로 앉혀놓고 다 빼먹고 튄 거에요. 그때 저희가 살던 정릉 단독주택이 8억 원 정도 했어요. 나무도 많고 연못도 있던 집이죠. 그걸 빚쟁이들이 5억에도 안 쳐주는 거에요. 경매에 넘어가면 사려고. 결국 경매에서 6억 7천만 원에 낙찰됐어요. 그때 그걸 5억만 쳐줬어도 어떻게든 빚을 막을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밟을 때는 철저하게 밟더라고요. 그때 집에 좋은 나무가 무척 많았는데 엄마가 새 주인한테 ‘나뭇값으로 500만 원만 쳐달라.’고 하니까 ‘나무 뽑아 가세요.’ 하더래요.”
그때부터 고생이 시작된 걸까.
“딱 10년 고생했죠. 2002년 12월 31일 모든 은행빚을 청산했으니까요. 이자까지 쳐서 한 20억 넘게 아버지 빚을 제가 갚았죠.”
뭐로 빚을 갚았을까.
“노래해서 갚았지 다른 게 뭐 있겠어요. 밤업소 나가는 거죠. 그때 제가 서른 살인데, 집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역삼동 월세방에 살면서 저녁 7시쯤 의정부나 동두천에서 밤무대 일을 시작해요. 그러면 남양주, 청량리 들러서 신림동, 영등포, 인천까지, 하루에 7, 8군데 뛰면 새벽 2~3시쯤 끝나요. 이 생활을 10년 가까이했어요. 사흘마다 부도수표와 어음이 돌아오는데 정말 정신없더라고요. 새벽에 집에 돌아와 전화 음성 녹음기를 틀면 온갖 욕설과 협박이 녹음돼 있고…. 아버지는 창피하니까 두문불출하시고 나는 노래만 불러왔으니까 아는 게 없고…. 정말 약 먹고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많이 했죠.”
열두 살에 데뷔하고 열여섯 살에 최고 스타가 됐으니 내리막길도 빨리 온 셈이다.
“너무 어려서 스타가 돼서, 추락하던 그때 기분은 뭐라고 말할 수 없고 정말 감당할 수 없었어요. 너무 혼란스러웠죠. 시간 낭비도 많이 했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이 산이에요.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큰 산 올라가면 계곡도 깊고, 동산 올라가면 내려갈 때도 완만하고…. 인제야 그걸 알았죠. 남들처럼 학교생활도 하고 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제가 부모라면 어릴 때 연예인 안 시켜요.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정상적으로 나오고 그다음에 뭘 해야 무슨 어려움이 닥치면 극복할 힘이 있어요. 너무 어려서 가수하고 인기 얻고 그러면 바보가 돼요. 안타깝죠.”
이은하가 음악 외에 애정을 쏟는 것은 골프다.
구력 30년에 가까운 그녀는 현재 KLPGA 연예인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친 건 10년가량밖에 되지 않는데 승부욕이 없어서 그리 잘 치지는 못하고 보기 플레이 정도 한다.’고 말했다.
지나고 나니 ‘인기’라는 건 무엇인지….
“물거품이죠. 신기루에요. 살아보니까 누구나 언젠가는 굴곡을 겪게 돼 있더라고요. 그런데 굴곡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되죠. ‘부모’라는 노래를 보면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고 하잖아요.
부모가 돼야 비로소 부모 마음을 아는 거죠. 후배 연예인 중에 너무 뻣뻣한 애들을 자주 봐요. 그래도 저는 아무 말도 안 해요. 지금 말해봐야 알아듣지 못해요. 연예인들이 어디 가서 대접만 받지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앞으로 십 년 뒤를 못 보기 때문에 그래요.”
연예인으로 살아온 것에 후회는 없는지?
“아니에요. 어차피 제가 갈 길이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저를 보니 ‘가수 이은하’로 살아온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많더라고요. 그리고 지금도 희망이 있잖아요. 노래라는 희망. 한국에서 여자가 이 나이에 희망에 찰 수 있는 직업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녹음실에 와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뭔가 제 역할을 하는 것 같고,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저도 좀 더 신중하게 돼요. 이 나이에 또 실패하면 안 되니까요.”
그녀는 두 달 된 닥스훈트 한 마리를 안고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제 아들로 입양했어요. 강아지 이름이 짱짱이에요. 남영동에서 짱으로 살라고요.”
그녀는 재즈 가수로 다시 일어선다.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이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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